☞한국경제신문 6월30일자 A9면

[뉴스로 읽는 경제학] 독점규제도 시대에 따라 바뀐다
미국 연방대법원이 반독점법과 관련해 재계의 손을 들어줬다.

미 대법원은 28일 판매사와 제조업체 간 '최저가격 협정'(상품 소매가격의 하한선을 미리 정하는 것)이 반독점법에 자동 위배되지는 않는다고 5 대 4로 판결했다. 이날 대법원은 핸드백 제조사인 브라이튼 리긴에 대한 명품 판매업체 케이스 클로셋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지방 및 항소법원의 판결을 뒤집고 제조사의 손을 들어줬다. 2002년 케이스 클로셋은 양사가 합의한 가격 밑으로 핸드백을 팔았다는 이유로 브라이튼 리긴이 일방적으로 공급 계약을 파기하자 손해 배상을 요구했었다. 대법원의 이번 판결은 최저가격 협정을 인정하지 않았던 96년간의 미국 관행을 뒤집은 것이다.

하급 법원들은 1911년 대법원의 '닥터 마일스 건' 판결을 근거로 판매사와 제조사의 최저가격 시비에 자동적으로 반독점법을 적용해왔다. 거대 제조업체가 상대적으로 약자인 유통업체에 일정 소매가격 이상으로만 팔도록 강요할 경우 공정 경쟁에 위배된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재계는 "공정한 가격에 따른 공정한 경쟁이 보장돼 결과적으로 소비자의 이익도 커진다"며 최저가격 협정을 법적으로 인정해줄 것을 주장해왔고 최근 대법원이 이를 받아들였다. 이 같은 판결은 반독점법의 엄격한 집행을 지향하는 37개 주정부 입장과 배치돼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판매 가격을 기업체 마음대로 인상할 수 있게 돼 소비자 권리가 침해될 것이라는 소비자단체 비판도 이어지고 있다.

김유미 한국경제신문 기자 warmfront@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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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휴대폰 제조업체가 2007년형 최신 모델의 휴대폰을 대리점에 공급하며 50만원 이하에 팔지 못하도록 계약을 맺었다면 이는 강자(공급업자)의 우월적 지위를 이용한 잘못된 계약으로 공정거래법 위반일까? 지금까지 미국 연방 대법원은 제조업체가 유통업체들의 가격 경쟁을 막아 독점 이윤을 챙길 수 있다는 이유를 들어 이 같은 최저가격 협정이 공정거래법(반독점법) 위반이라는 입장을 취해 왔다. 하지만 최근 미 대법원은 1911년 이후 96년간 지켜오던 이 같은 입장을 바꿔 최저판매가격이 반드시 반독점법 위반은 아니라고 판결했다. 거의 100년 만에 뒤집힌 이번 판결은 독점을 보는 시각도 산업구조와 시장 상황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것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미국의 판례에 주목하는 것은 자본주의 경제 체제를 유지하는 나라 중 미국이 가장 강력하게 독점을 규제하고 있고 독점을 규제하는 입법도 미국에서 가장 먼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미 대법원은 지난달 28일 명품 판매업체인 케이스 클로셋이 명품 핸드백 메이커인 브라이튼 리긴사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하급 법원의 판결을 깨고 제조사인 브라이튼 리긴사에 승소 판결을 내렸다. '판촉기간 중 합의된 가격 이하로 팔지 않는다는 조건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제조사가 계약을 일방 해지하자 판매사가 소송을 제기했고, 이에 대법원이 최종적으로 제조사의 주장을 받아들인 것이다. 존 로버츠 대법원장을 비롯한 대법관 5명은 판결문에서 "1911년의 대법원 판결 이후 최저판매가격에 대해 자동적으로 반독점법이 적용돼 온 관행이 더 이상 이치에 맞지 않다"면서 "최저가격이 공정한 경쟁을 보장하는 한 사안별로 법 위반 여부를 판단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제조사와 판매사가 최저가격 협정을 맺었다고 해서 무조건 공정거래법 위반으로 볼 것이 아니라 내용을 들여다보고 결정해야 한다고 판결한 것이다.

1911년 대법원 판결('닥터 마일스 건')은 힘이 센 제조업체가 상대적 약자인 유통업체와 맺은 최저가격 협정은 공정 경쟁에 위배된다는 내용이 골자였다. 이 판결 후 미국 법원들은 최저가격 시비가 일면 자동적으로 반독점법을 적용해왔다.

◆미 대법원 판결 배경=이번 미 대법원 판결은 반독점법의 적용도 시대에 따라 바뀌고 있음을 보여준다. 1911년 닥터 마일스건 판결이 나올 당시만 하더라도 제조업체들이 판매업체보다 거래 협상에서 월등히 힘이 셌기 때문에 판매업체들을 법으로 보호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할인점 체인점 프랜차이즈 온라인 판매점 등 유통업이 급속히 발달한 지금 제조업체는 유통업체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지 않다. 오히려 전국적인 체인망을 갖고 있는 유통업체들은 제조사에 직원 파견을 요청하는 등 거래 조건을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정할 정도다.

제조업체와 판매 유통업체가 함께 벌이는 판매 촉진 캠페인에 무임승차하는 일부 유통업체를 보호할 필요가 있느냐 하는 지적도 이번 판결에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어 제조업체와 판매업체가 공동으로 대규모 비용을 들여 광고 캠페인을 벌이는데 이에 동참하지 않은 일부 판매업체가 합의된 가격 이하로 제품을 판매했을 때 과연 '얌체' 판매업체를 보호할 필요가 있을 것인가의 문제이다. 이와 비슷한 상황은 몇 년 전 국내 서점업계에서도 벌어졌다. 당시 광고 판촉비용 지출이 적은 온라인 서점들이 도서정가제를 무시하고 책을 할인 판매하자 오프라인 서점들이 반발, 공정거래위원회가 개입했다. 공정위는 신간서적 문예창작서적 등 광고 판촉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서적에 대해서는 도서정가제를 인정하는 선에서 논쟁을 정리했다.

최저판매가격 유지가 얼핏 공정한 경쟁을 막는 것처럼 보이지만 기업들의 건전한 경쟁을 유도하고 있고 이를 우리나라나 미국 당국이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이번 미국 대법원의 판결을 두고 대법원이 제품 가격을 인상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줬다는 비판도 일부에서 나온다. 소수 의견을 내놓은 스테픈 브라이어 대법관은 "최저가격을 보장하면 덤핑에 대한 제조사의 불안이 없어져 소비자에 대한 서비스가 강화될 것이라고 하나 결국 제조업체가 가격만 올리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최저가격이 공정한 가격이어야 한다'는 입장을 대법원은 분명히 하고 있어 제조업체들이 가격을 쉽게 올리기는 어려울 전망이다. 전미제조업협회(NAM)의 틴 리겔 부회장은 "대법원 판결이 제조사의 최저가격 요구 권한을 광범위하게 보장하는 내용은 아니다"면서 판결의 확대 해석을 경계했다.

박주병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jbpar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