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브리의 논술비타민] 7. 창의적 발상(하) -뻔한 가치판단을 뒤집어라
송나라 황제 휘종이 시를 畵題로 그림을 그리게 한 또 다른 이야기가 유성(兪成)의 형설총설(螢雪叢說)에도 있다. '꽃 밟으며 돌아가니 말발굽에 향내 나네(踏花歸去馬蹄香)'라는 화제가 주어졌다. 말발굽에서 나는 꽃 향기를 그림으로 그리라는 주문이다. 모두 그림을 시작도 못하고 있거나,기껏해야 코를 흥흥거리고 있는 사람의 표정을 그리는 정도로 끙끙대고 있었다. 어쩌면 대부분의 화가들은 화폭 가득하게 꽃만 그렸을지도 모른다. 이때 한 화가가 다음과 같은 그림을 그렸으니,요즘 다시 태어나 논술을 한다면 논술 고수가 되었음에 틀림이 없으렸다. 그림에는 달리는 말의 꽁무니를 따라 나비 떼가 뒤쫓아 가고 있었다. 말발굽에 향기가 나므로 나비는 꽃인 줄 착각하여 말의 뒤를 따라간 것이다.

얼마 전 서울대 정시 논술에서 '競爭'과 관련된 문제가 출제된 적이 있었다. 다들 競爭은 부정적인 것으로 보고 수험생들은 답안에서 일제히 경쟁에 대하여 비판의 공격을 퍼부었다고 한다. 보나마나 경쟁이 심해지면 이기적,개인주의적 인간들이 많아지고 이로 인하여 사회가 삭막해지느니 어쩌니 하는 논거의 내용들로 답안이 채워졌겠지. 그러나 이때 채점 교수님의 눈을 사로잡는 한 답안이 있었으니,그 핵심은 경쟁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교수님께서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셨다. 그 답안이 높은 점수를 받은 것은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2007학년도 서강대 수시 2학기 논술고사에서도 環境 관련 문제가 논제로 나왔는데 3700여장의 답안 중 2000장가량의 결론이 비슷했다고 한다. '근대화를 추진하되 그로 인해 발생하는 환경문제를 최소화하는 지속 가능한 개발을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고서야 어찌 좋은 성적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또 다른 흔한 표현은 "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좋은 환경을 만들자"였다고 한다. 이처럼 개성 없는 비슷한 표현이 무더기로 쏟아진 이유는 많은 학원에서 '開發'과 관련된 문제가 출제되면 무조건 '지속 가능한 개발'이 정답이라고 가르쳤기 때문일 것이다. 대학에서는 좋은 점수를 줄 수 있는 답안으로 "내가 시장이라면, 주민들의 의견을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물어 이러저러한 개발을 하거나 보존을 하겠다"는 식의 자기 언어로 자기 논리를 편 것을 들었다.

이런 판박이 답안은 3번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청산별곡 등 네 가지 글을 주고 이 중 하나의 입장을 선택해 나머지를 비판하라는 문제였는데,많은 답안이 "서로의 입장과 의견을 조율해야 한다"는 절충안이었다고 한다. 대학 측은 "나머지를 비판하라고 요구했는 데도 학생들은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으려 했다"고 하며 이런 답안엔 절대로 좋은 점수를 줄 수 없다고 했다. "학원 논술 수업에서 가르치는 전형적인 兩是論的 태도"라고 지적도 분명히 하였다. 김영수 서강대 입학처장은 "사교육에서 배운대로 결론을 낸 것으로 보이는 답안지는 대부분 불합격 처리했다"고 말했다. (○○일보 2006년 11월8일)

또 다른 대학의 기출 문제에서 '忠'과 '孝' 중 가치 판단의 선택에 관한 문제가 있었다. 자~! 이쯤 되면 우리 생글 독자들은 감이 잡힐 것이다. 대부분의 수험생들이 '효'보다는 '충'이 중요하다면서 논지를 이끌어가고 있을 때,한 수험생은 '효'를 택하여 합격의 길로 힘차게 나아가고 있었다는 전설 아닌 전설이 있었단다. 이 수험생의 논거는 무엇이었을까? 바로 '충'을 버리고 '효'를 택한 구한말 의병대장 이인영을 예로 들었으니 이 얼마나 절묘했는가? 물론 이 답안의 논지는 가족 이기주의,혹은 집단 이기주의로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논술에서 중요한 것은 내용이나 주장에 대한 가치 판단보다는 논거의 참신성이다.

물론 모든 답안이 참신성을 염두에 두고 지금까지 이야기 한,소수의 편만 들어서는 위험할 수도 있음을 알아야 된다. 논술시험의 성격에 따라 전략을 달리 할 필요도 있다는 것이다. 내신의 실질반영률이 얼마 안 되는 극심한 경쟁률의 수시에서는 논술의 영향력이 절대적이다 보니 답안도 독창적이고,참신성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신과 수능 성적이 합격권에 들고 논술도 어느 정도만 치면 되는 경우에는 무난한 답안을 쓰는 것이 안전하다는 말도 할 수 있겠다.

한자읽기

畵題(화제), 競爭(경쟁), 環境(환경), 開發(개발), 兩是論的(양시론적), 忠(충), 孝(효)


'사하라 사막에 부는 열풍'을 뜻하는 '기브리'(ghibli)는 부산 사직고 김재우 선생님의 필명입니다. 기브리 선생님이 직접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쌓아온 논술 노하우를 공개합니다. 기브리 선생님은 부산대 사범대와 대학원(국어교육)을 나와 현재 부산교육청 논술지원단과 생글생글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기브리의 논술비타민'에 많은 분들이 성원을 보내주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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