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게 성공비결을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간단했다.
"정말 밤잠 안자고 일했습니다"
2002년 세계시계이사국협회 주최로 스위스 바젤에서 열린 국제 세미나 행사장. 아벨란제 스위스 시계협회장은 당시 한국시계공업협동조합 이사장 자격으로 세미나에 참가한 김기문 로만손 회장에게 다가와 농담조로 한마디 건넸다.
"로만손(ROMANSON) 브랜드는 시계의 본고장인 스위스 마을 이름인 '로만시온'에서 따왔다면서요. 스위스 지명을 도둑맞았네요."
'로만손'은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유명한 '토종' 시계 브랜드다. 중동과 터키,러시아 등 주요 수출국에서는 최고급 명품 브랜드로 대접받는다. 로만손은 세계 60여개국에 연간 40여만개의 시계를 자체 브랜드로 수출하고 한 해에 200여종의 신제품을 세계 시장에 쏟아낸다.
김기문 회장(52)은 1988년 자본금 5000만원으로 창업해 숱한 시련과 좌절을 딛고 로만손을 글로벌 시계브랜드 업체로 성장시켰다. 김 회장은 오른팔이 왼팔보다 엄지손가락 한 마디만큼 더 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회사 설립 이후 해외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30~40㎏에 달하는 시계 샘플 가방을 들고 전세계를 돌아다닌 탓에 그렇게 됐다는 얘기가 시계업계에서 '전설'처럼 전해진다.
김 회장이 대표적인 자수성가형 기업인으로 성공을 이루기까지 밟아온 인생 역정은 '롤러코스터'였다. 그만큼 굴곡이 많고 파란만장했다. 종갓집 종손으로 남부럽지 않은 환경에서 자라났으나 무일푼 상태에서 창업했고 부도 위기를 몇차례 겪으며 오늘날의 로만손을 일궈냈다.
김 회장은 1955년 충북 괴안군 도산면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집안 소유의 땅이 논 100마지기 이상 됐고 그의 할아버지는 꽤 큰 규모로 쌀장사를 했다. 그의 어릴적 꿈은 '목장주'. TV에서 본 영화 '자이언트'의 영향이었다. 영화 주인공인 제임스 딘처럼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초원에서 소떼를 몰고 다니고 싶었다. 인문계로 진학하기를 원하는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청주농고로 진학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대학도 축산학과(충북대)로 갔으나 영화를 보며 품었던 이상과 현실은 달랐다. 결국 '목장주'의 꿈을 접고 대학도 중도에 그만뒀다.
김 회장은 1970년대 후반 '중동 건설 붐'이 한창일 때 사우디아라비아로 건너가 현장 근로자로 일했다. 어머니가 폐암에 걸려 투병생활이 길어지면서 치료비가 많이 들어 집안이 기울었다. 장남으로서 동생들을 공부시키고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에 '중동행'을 결정했다. 그는 "그곳에 있을 때 언제나 곁에서 지켜 주실 것같던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는 데 그후 삶의 태도가 좀더 현실적으로 변했다"며 "사업가의 꿈을 품기 시작한 것도 그 때였다"고 회고했다.
김 회장은 귀국한 후 지인들과 함께 '솔로몬시계공업사'라는 작은 회사를 차렸다. 이전까지 시계에 대해선 아는 게 없었지만 회사에서 영업을 총괄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업계에서 '영업통'으로 명성을 쌓아가던 중 그의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련이 닥친다. 영화를 제작하던 친척의 보증을 선 것이 화근이었다. 친척의 영화사업이 망하면서 서울 장안동에 있던 3층 양옥집도 날리고 회사도 더 다닐 수 없게 됐다.
졸지에 길거리에 나 앉게 돼 실의에 빠져 있을 때 평소 그의 능력과 성실함을 눈여겨 본 거래처 대표들이 찾아왔다. '사업자금을 모아 줄테니 재능을 살려 보라'는 것이었다. 김 회장은 그때 빌린 자금으로 로만손을 설립해 본격적인 사업가의 길에 들어선다.
로만손도 초기에는 다른 중소업체와 마찬가지로 OEM(주문자상표 부착생산)으로 시계를 만들어 일본업체에 납품했다. 그러나 그 업체가 채산성을 이유로 수입선을 갑자기 홍콩 업체로 바꿔 버리는 바람에 하루아침에 판로가 막히게 됐다. 김 회장은 "어차피 물러설 곳도 없는데 하나를 만들어도 내 브랜드로 하자"고 결심했다. 하지만 당시 내수시장은 삼성시계 아남시계 오리엔트 등 큰 기업들이 다 가지고 있어서 갓 창업한 작은 회사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브랜드에 대한 선입관이 적은 해외 시장을 뚫는 수밖에 없었다. 김 회장은 공산품을 100% 가까이 수입하던 중동시장부터 개척했다. 시계 500~600개가 든 샘플을 들고 바이어들을 찾아 다녔고 해외에서 열리는 시계 전시회마다 무조건 달려가 샘플을 전시했다. 그러나 수출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남들과 차별화된 '로만손'만의 제품이 없었기 때문이다. 김 회장은 밤잠을 설쳐가며 제품 개발에 몰두한다. 그 결과 세계 최초로 시계유리 표면을 보석처럼 입체적으로 세공해 만든 '커팅 글래스'시계가 탄생한다. 이 제품은 중동 등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로만손의 이름을 세계 시장에 알렸다.
이후에도 '커팅 글래스'출시 1년만에 홍콩시장에서 쏟아져나온 '짝퉁'(싸구려 모조 제품) 때문에 주문이 끊기고 1990년 8월 생산제품의 80% 이상을 수출하던 중동지역에서 걸프전이 발발해 치명적인 타격을 입는 등 숱한 위기가 찾아온다. 그는 이 같은 시련에 맞서 '독자 브랜드와 지속적인 연구개발로 각 시장에 맞게 차별화된 제품을 만들어 전세계 시장을 공략하는' 로만손의 성공 전략을 정립해 위기를 도약의 기회로 만들었다.
김 회장은 로만손이 내수시장에서도 1위에 오르는 등 성공궤도에 오르자 국내 중소기업의 전반적인 문제에 눈을 돌렸다. 그가 몸소 경험한 국내 중소기업의 척박한 환경을 개선하고자 대외활동에 적극 나섰다. 1998년부터 올 2월까지 9년 동안 시계공업협동조합 이사장으로 일했고 2005년에는 8개 조합원사들과 함께 개성공단에 입주했다. 그해 개성공단 입주기업들의 모임인 '개성공단 기업협의회' 창립을 주도하면서 개성공단을 상징하는 기업인으로 떠올랐다. 지난 3월부터는 300만 중소기업을 대변하는 중소기업중앙회 회장을 맡아 "몸이 몇개라도 부족할 만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김 회장은 로만손의 성공비결을 묻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답하곤 한다. "제 대답은 간단합니다. 우리는 정말 밤잠 안자고 일했습니다. 로만손만큼 아니 그 이상 성공하려면 우리보다 잠을 덜 자든지 머리가 좋든지,둘 중 하나는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남들처럼 평범하게 지내면서 성공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연구소나 책에서 나오는 성공전략같은 것이 성공을 가져다주진 않습니다. 성공한 사람보다 더 열심히 해야 성공합니다."
송태형 한국경제신문 기자 toughlb@hankyung.com
"정말 밤잠 안자고 일했습니다"
2002년 세계시계이사국협회 주최로 스위스 바젤에서 열린 국제 세미나 행사장. 아벨란제 스위스 시계협회장은 당시 한국시계공업협동조합 이사장 자격으로 세미나에 참가한 김기문 로만손 회장에게 다가와 농담조로 한마디 건넸다.
"로만손(ROMANSON) 브랜드는 시계의 본고장인 스위스 마을 이름인 '로만시온'에서 따왔다면서요. 스위스 지명을 도둑맞았네요."
'로만손'은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유명한 '토종' 시계 브랜드다. 중동과 터키,러시아 등 주요 수출국에서는 최고급 명품 브랜드로 대접받는다. 로만손은 세계 60여개국에 연간 40여만개의 시계를 자체 브랜드로 수출하고 한 해에 200여종의 신제품을 세계 시장에 쏟아낸다.
김기문 회장(52)은 1988년 자본금 5000만원으로 창업해 숱한 시련과 좌절을 딛고 로만손을 글로벌 시계브랜드 업체로 성장시켰다. 김 회장은 오른팔이 왼팔보다 엄지손가락 한 마디만큼 더 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회사 설립 이후 해외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30~40㎏에 달하는 시계 샘플 가방을 들고 전세계를 돌아다닌 탓에 그렇게 됐다는 얘기가 시계업계에서 '전설'처럼 전해진다.
김 회장이 대표적인 자수성가형 기업인으로 성공을 이루기까지 밟아온 인생 역정은 '롤러코스터'였다. 그만큼 굴곡이 많고 파란만장했다. 종갓집 종손으로 남부럽지 않은 환경에서 자라났으나 무일푼 상태에서 창업했고 부도 위기를 몇차례 겪으며 오늘날의 로만손을 일궈냈다.
김 회장은 1955년 충북 괴안군 도산면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집안 소유의 땅이 논 100마지기 이상 됐고 그의 할아버지는 꽤 큰 규모로 쌀장사를 했다. 그의 어릴적 꿈은 '목장주'. TV에서 본 영화 '자이언트'의 영향이었다. 영화 주인공인 제임스 딘처럼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초원에서 소떼를 몰고 다니고 싶었다. 인문계로 진학하기를 원하는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청주농고로 진학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대학도 축산학과(충북대)로 갔으나 영화를 보며 품었던 이상과 현실은 달랐다. 결국 '목장주'의 꿈을 접고 대학도 중도에 그만뒀다.
김 회장은 1970년대 후반 '중동 건설 붐'이 한창일 때 사우디아라비아로 건너가 현장 근로자로 일했다. 어머니가 폐암에 걸려 투병생활이 길어지면서 치료비가 많이 들어 집안이 기울었다. 장남으로서 동생들을 공부시키고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에 '중동행'을 결정했다. 그는 "그곳에 있을 때 언제나 곁에서 지켜 주실 것같던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는 데 그후 삶의 태도가 좀더 현실적으로 변했다"며 "사업가의 꿈을 품기 시작한 것도 그 때였다"고 회고했다.
김 회장은 귀국한 후 지인들과 함께 '솔로몬시계공업사'라는 작은 회사를 차렸다. 이전까지 시계에 대해선 아는 게 없었지만 회사에서 영업을 총괄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업계에서 '영업통'으로 명성을 쌓아가던 중 그의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련이 닥친다. 영화를 제작하던 친척의 보증을 선 것이 화근이었다. 친척의 영화사업이 망하면서 서울 장안동에 있던 3층 양옥집도 날리고 회사도 더 다닐 수 없게 됐다.
졸지에 길거리에 나 앉게 돼 실의에 빠져 있을 때 평소 그의 능력과 성실함을 눈여겨 본 거래처 대표들이 찾아왔다. '사업자금을 모아 줄테니 재능을 살려 보라'는 것이었다. 김 회장은 그때 빌린 자금으로 로만손을 설립해 본격적인 사업가의 길에 들어선다.
로만손도 초기에는 다른 중소업체와 마찬가지로 OEM(주문자상표 부착생산)으로 시계를 만들어 일본업체에 납품했다. 그러나 그 업체가 채산성을 이유로 수입선을 갑자기 홍콩 업체로 바꿔 버리는 바람에 하루아침에 판로가 막히게 됐다. 김 회장은 "어차피 물러설 곳도 없는데 하나를 만들어도 내 브랜드로 하자"고 결심했다. 하지만 당시 내수시장은 삼성시계 아남시계 오리엔트 등 큰 기업들이 다 가지고 있어서 갓 창업한 작은 회사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브랜드에 대한 선입관이 적은 해외 시장을 뚫는 수밖에 없었다. 김 회장은 공산품을 100% 가까이 수입하던 중동시장부터 개척했다. 시계 500~600개가 든 샘플을 들고 바이어들을 찾아 다녔고 해외에서 열리는 시계 전시회마다 무조건 달려가 샘플을 전시했다. 그러나 수출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남들과 차별화된 '로만손'만의 제품이 없었기 때문이다. 김 회장은 밤잠을 설쳐가며 제품 개발에 몰두한다. 그 결과 세계 최초로 시계유리 표면을 보석처럼 입체적으로 세공해 만든 '커팅 글래스'시계가 탄생한다. 이 제품은 중동 등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로만손의 이름을 세계 시장에 알렸다.
이후에도 '커팅 글래스'출시 1년만에 홍콩시장에서 쏟아져나온 '짝퉁'(싸구려 모조 제품) 때문에 주문이 끊기고 1990년 8월 생산제품의 80% 이상을 수출하던 중동지역에서 걸프전이 발발해 치명적인 타격을 입는 등 숱한 위기가 찾아온다. 그는 이 같은 시련에 맞서 '독자 브랜드와 지속적인 연구개발로 각 시장에 맞게 차별화된 제품을 만들어 전세계 시장을 공략하는' 로만손의 성공 전략을 정립해 위기를 도약의 기회로 만들었다.
김 회장은 로만손이 내수시장에서도 1위에 오르는 등 성공궤도에 오르자 국내 중소기업의 전반적인 문제에 눈을 돌렸다. 그가 몸소 경험한 국내 중소기업의 척박한 환경을 개선하고자 대외활동에 적극 나섰다. 1998년부터 올 2월까지 9년 동안 시계공업협동조합 이사장으로 일했고 2005년에는 8개 조합원사들과 함께 개성공단에 입주했다. 그해 개성공단 입주기업들의 모임인 '개성공단 기업협의회' 창립을 주도하면서 개성공단을 상징하는 기업인으로 떠올랐다. 지난 3월부터는 300만 중소기업을 대변하는 중소기업중앙회 회장을 맡아 "몸이 몇개라도 부족할 만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김 회장은 로만손의 성공비결을 묻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답하곤 한다. "제 대답은 간단합니다. 우리는 정말 밤잠 안자고 일했습니다. 로만손만큼 아니 그 이상 성공하려면 우리보다 잠을 덜 자든지 머리가 좋든지,둘 중 하나는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남들처럼 평범하게 지내면서 성공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연구소나 책에서 나오는 성공전략같은 것이 성공을 가져다주진 않습니다. 성공한 사람보다 더 열심히 해야 성공합니다."
송태형 한국경제신문 기자 toughl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