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무사는 추운 겨울날 얼어 죽을지언정 곁불은 쬐지 않는다."

김대중 정권 말기인 2002년 초 취임한 박명재 검찰총장이 한 말이다. 당시는 각종 권력형 비리사건 속에서 검찰 수사가 권력실세들에게 휘둘린다는 비판이 일던 시기였다. 이를 의식한 검찰총장이 취임 일성으로 검찰에 자기반성과 개혁을 속담에 빗대 주문한 것이다.

신문들은 다음날 아침 그의 말을 일제히 대문짝만하게 보도했다. 특히 "얼어 죽어도 곁불은 쬐지 않겠다"란 대목을 제목으로 알리면서. 대부분의 사람은 물론 이 말을 별 생각 없이 그대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일각에선 이 말이 안고 있는 작은,그러나 중요한 결함을 놓치지 않고 있었다.

"이봐 자네,검찰총장이 '얼어 죽어도 곁불은 쬐지 않겠다'고 했다는데 그 '곁불'이 틀리게 쓰인 것 아닌가?" "누군가가 불을 쬐고 있는데 그 옆에 빌붙어서 얻어 쬐는 궁상맞은 짓은 안하겠다는 뜻이니 신문에 나온 대로 '곁불'이 맞잖아." "내가 알기로는 보통의 경우 양반 체면에 쬐지 않겠다는 불은 왕겨 같은 것을 태우는 '겻불'을 말하는 것 같은데…." "그런 말도 있지만 이 경우는 비굴하게 남의 곁에서 얻어 쬐는 불이라는 뜻이니까 '곁불'이 맞는 표기라고 봐야지."

2005년 별세한 원로 언론인 박용규 선생의 일화다. 그는 돌아가시기 이태 전 한 어문연구지를 통해 "나중에 사전을 찾아보고 나서야 친구가 지적한 '겻불'이 바른 표기이고 자신이 해석한 '곁불'은 엉터리 창작이었음을 알았다"며 "이런 게 바로 식자우환일 것"이라고 고백했다.

'겻불'은 말 그대로 '겨를 태우는 미미한 불'이다. 이 말이 우리 속담에선 '양반은 얼어 죽어도 겻불은 안 쬔다'란 말로 쓰여 '아무리 궁한 처지에 있을지라도 자기의 체면은 지키려고 애쓴다'는 뜻을 나타낸다. '양반은 물에 빠져도 개헤엄은 안 친다'는 속담도 같은 뜻이다. 모두 사전에 올라 있는 말이다. 그러니 검찰총장이 한 말도 바로 이 '겻불'이었던 셈이다. 이에 비해 '곁불'은 본래 '목표로 되지 않았던 짐승이 목표로 겨누어진 짐승의 가까이에 있다가 맞는 총알'이란 뜻이다. 예전에는 총탄을 발사할 때 화약에 불을 댕겨 했기 때문에 총 쏘는 것을 '불질'이라 했다. 곁불은 여기서 생겨난 말이다. 한글학회에서 펴낸 '우리말 큰사전'(1991년)이나 금성판 '국어대사전'(1995년) 등은 모두 겻불과 곁불의 차이를 이렇게 풀고 있다.

그런데 국립국어원에서 1999년 펴낸 '표준 국어대사전'이 문제로 등장한다. 여기서는 '겻불'의 풀이는 같지만 그 쓰임새는 순수하게 '겨를 태우는 불' 그 자체로 국한시켰다. 대신 '곁불'의 풀이는 완전히 달라져 전통적인 쓰임새는 사라지고 '얻어 쬐는 불'이란 의미로 대체됐다. 용례 역시 '선비는 죽어도 곁불은 안 쬔다는…'이란 소설 속 표현을 인용했다.

전통적으로 써오던 '양반은 얼어 죽어도 겻불은 쬐지 않는다'란 속담이 '표준 국어대사전'에 와서 뚜렷한 근거 없이 '곁불'로 바뀐 것이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 셈이다. 하지만 그다지 신뢰할 수 없는 자의적 올림말보다는 전통적 속담 말인 '겻불'을 익히고 쓰는 것이 옳은 방향일 것이다. '겻불'은 엄연히 살아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양반은 얼어 죽어도 겻불은 쬐지 않는다'란 말은 우리말 '딸깍발이'를 연상시킨다. '딸깍발이'는 신이 없어서 마른 날에도 나막신을 신는다는 뜻에서,'가난한 선비'를 일컫던 말이다. 작고한 국어학자 이희승 선생은 수필 '딸깍발이'에서 옛날 남산골 샌님들을 '사실로 졌지마는 마음으로 안 졌다는 앙큼한 자존심,꼬장꼬장한 고지식,양반은 얼어 죽어도 겻불은 쬐지 않는다는 지조,이 몇 가지들이 그들의 생활 신조였다'고 묘사했다.

'겻불'의 속담과 '딸깍발이'의 가치는 연말 대선을 앞두고 일찌감치 정치의 계절로 들어선 요즘,눈앞의 이익만을 좇기에 급급한 지식인의 약삭빠른 삶을 돌아보게 한다. 조금은 고지식하면서도 기개만은 꼿꼿한 딸깍발이 같은 사람도 있어야 세상은 살 만하지 않을까.

한국경제신문 오피니언부 기자 hymt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