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급쟁이가 사장을 꿈꾸지 않으면 직장생활의 의미가 없다"
공과대학을 나온 경상도 출신의 기계업체 최고경영자(CEO). 프로필만 봐도 '마초맨' 같은 이미지가 떠오른다. 최승철 두산인프라코어 사장은 이런 추측을 벗어나지 않는 영락없는 '마초맨'이었다. 툭툭 내던지는 무뚝뚝한 경상도 사투리. 참석자들과 모두 1 대 1로 술잔을 주고받는 두주불사형 음주 스타일. 구릿빛으로 그을린 얼굴. 최 사장은 터프한 CEO의 전형이었다.
하지만 휴대폰을 꺼내 직접 찍은 손녀의 사진을 보여줄 때는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따뜻한 할아버지'로 돌아와 있었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나지막한 목소리로 독일 가곡 '들장미'를 부르는 최 사장은 어느 새 마초맨의 모습을 벗어던지고 로맨티스트라는 새 옷으로 갈아 입고 있었다. 최 사장은 강함 속에 부드러움을 감추고 있는, 아니 강함과 부드러움을 겸비한 CEO다.
최승철 사장은 비교적 유복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는 1948년 경상북도 영천에서 치과의사 아버지와 음대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6남매 중 막내였다. 초등학교 때 영천에서 대구로 이사했다. 당초에는 서울로 이사가려고 했었다. 서울 분이셨던 어머니가 고향에서 살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6·25 전쟁 후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던 큰아버지가 낙선하면서 최 사장의 집도 덩달아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게 됐다. 치과의사인 아버지는 병원 운영을 통해 전보다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했기 때문에 생활 기반이 다른 먼 곳으로 이사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최 사장의 집은 다른 의사 집안에 비해 부유한 편은 아니었다. 아버지가 술을 꽤나 좋아해 많은 돈을 술값으로 바쳤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다른 의사 친구들은 야산도 있고 논도 있었는데 최 사장의 집은 대구에 있는 집 한 채가 부동산의 전부였다. 그래도 아버지가 의사였기 때문에 먹고 사는 데 지장은 없었다. 공대 동기생 36명 가운데 집에서 보내온 돈으로 기숙사비까지 낼 수 있었던 사람은 최 사장을 포함해 두명밖에 없었다.
그는 음악을 좋아하는 부모의 영향을 받아 어려서부터 음악을 즐겼다. 아버지는 음악가(音樂家)가 되지 말고 소리를 즐기는 사람이라는 뜻에서 '음락가'가 되라는 당부도 남겼다. 음악가는 프로페셔널이고, 음락가는 아마추어다. 그의 음악 실력은 수준급이다. 이미 고 3 때 베토벤 합창 교향곡 4악장의 보표를 자세히 읽을 정도였다.
대구에서 명문 경북중ㆍ고를 졸업한 최 사장은 서울대 기계공학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원래 공대 진학을 희망한 것은 아니었다. "고교 시절 미학이나 심리학을 전공하면 어떨까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고3 때는 전공보다 커트라인(합격가능선)을 갖고 지원할 과를 정했습니다. 담임선생님이 경북대 의대를 가라고 했습니다. 내심 서울대 의대 진학을 바라던 아버지가 잔뜩 열을 받으셔서 의대 가지 말고 서울대 공대에 가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공대생이 됐죠."
'다시 대학 가면 미학을 전공할 거냐'는 질문에 "미학을 전공하면 사장은 못할 것 같다"며 "다시 대학 갈 기회가 있으면 상과대학을 갈 것 같다"고 말했다. 돈 버는 방법을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을 것 같다는 게 이유다.
대학 졸업 후 첫 직장은 대우자동차의 전신인 신진자동차였다. 이후 대한전선으로 옮겼는데 그 회사가 대우전자로 바뀌었다. 두산기계에는 1977년 합류했다. 직장을 세 번 옮기면서 주위에서 직장을 너무 자주 옮기는 것 아니냐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이전 직장 경험이 많이 도움이 됐다"는 게 최 사장의 설명이다.
"기계공학과 출신이 자동차 회사, 전자업체(두산전자)에 다니다 공작기계 만드는 회사에까지 다니게 되면서 시너지 효과가 난 거죠. 특히 임원이 되니까 다양한 경험이 좋은 자산이 되더군요."
최 사장은 다시 과장 시절로 돌아간다면 도덕성 문제에 더 신경 쓸 것 같다고 답했다. 과장 시절에는 관련 업체 사람이 7만원어치 술을 사주고 차비로 3만원을 챙겨주는 일이 흔했다는 것. 그는 "지금은 기업이 바뀌기 시작했지만 예전에는 그게 도덕적으로 나쁜지 몰랐다"며 "그런 행동방식이 바뀌어야 우리 기업이 보다 발전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최 사장은 두산그룹의 주력 계열사 CEO 가운데 유일하게 해외 경험이 없는 순수 국내파다. 물론 해외에서 공부하거나 근무할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유학은 여건이 안 돼 포기했고 해외 근무는 회사에서 보내주지 않았다. 그럴 기회가 생기면 선배들이 말렸다. 해외 경험이 없어서 그런지 영어 스트레스도 많이 받는다. 하지만 "장사하는 데 문제 없다"고 자신있게 말한다. 결국 콘텐츠가 중요한 거 아니냐는 얘기다.
최 사장은 1985년 부장 승진 인사 때 혼자 누락되면서 처음 CEO를 꿈꿨다. "그때 경쟁자를 이기겠다는 독심(毒心)을 품었죠. '두고 보자'고 마음 속으로 다짐했고, 3년 후 먼저 부장 승진했던 동기들과 같이 이사가 됐습니다." 그는 "월급쟁이가 사장을 꿈꾸지 않으면 직장생활의 의미가 없다"며 "CEO가 되기 위해서 젊었을 때부터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만 39세에 회사의 '별'인 임원이 됐을 때가 직장생활에서 가장 기뻤던 순간이었다.
"따라 주는 사람이 많아서 별을 달았다고 당시 생각했죠. 그 뒤부터 후배들에게 더 잘해줬습니다. 자신을 따르는 사람이 많을수록 능력 있는 리더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죠."
최승철 사장은 월급쟁이를 크게 세 종류로 분류했다. 회사에서 키워준 직원,스스로 큰 직원,관심 밖에서 살아 남은 직원이다. 최 사장 스스로는 1번과 2번의 중간쯤 된다고 평가했다. CEO가 되는데 운도 따랐고,노력도 뒷받침됐다는 고백이다.
"오너가 어떤 사람을 CEO로 선택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결정입니다. 굉장히 쉽게 보이지만 오너 입장에선 여러 개의 누적된 데이터를 갖고 고심을 거듭합니다. 제가 직원들을 대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최 사장은 직원들을 정리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그 사람이 성공할지 여부를 알려면 최소 1년은 기다려 줘야 한다"며 답변을 대신했다.
그러면서 그는 "제일 중요한 것은 사람의 마음입니다. 내 마음을 전하고, 상대방 마음을 어떻게 얻을 것인가가 중요하지요"라고 말했다. 그는 "상대방의 마음을 읽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며 "설령 나쁜 사람이라도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으면 오케이"라고 강조했다. "무능하다 싶은 직원도 뜯어보면 쓸 구석이 있습니다." 그는 인사에 대해선 기본적으로 성선설 편에 서 있는 게 분명했다.
송대섭 한국경제 기자 dssong@hankyung.com
공과대학을 나온 경상도 출신의 기계업체 최고경영자(CEO). 프로필만 봐도 '마초맨' 같은 이미지가 떠오른다. 최승철 두산인프라코어 사장은 이런 추측을 벗어나지 않는 영락없는 '마초맨'이었다. 툭툭 내던지는 무뚝뚝한 경상도 사투리. 참석자들과 모두 1 대 1로 술잔을 주고받는 두주불사형 음주 스타일. 구릿빛으로 그을린 얼굴. 최 사장은 터프한 CEO의 전형이었다.
하지만 휴대폰을 꺼내 직접 찍은 손녀의 사진을 보여줄 때는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따뜻한 할아버지'로 돌아와 있었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나지막한 목소리로 독일 가곡 '들장미'를 부르는 최 사장은 어느 새 마초맨의 모습을 벗어던지고 로맨티스트라는 새 옷으로 갈아 입고 있었다. 최 사장은 강함 속에 부드러움을 감추고 있는, 아니 강함과 부드러움을 겸비한 CEO다.
최승철 사장은 비교적 유복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는 1948년 경상북도 영천에서 치과의사 아버지와 음대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6남매 중 막내였다. 초등학교 때 영천에서 대구로 이사했다. 당초에는 서울로 이사가려고 했었다. 서울 분이셨던 어머니가 고향에서 살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6·25 전쟁 후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던 큰아버지가 낙선하면서 최 사장의 집도 덩달아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게 됐다. 치과의사인 아버지는 병원 운영을 통해 전보다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했기 때문에 생활 기반이 다른 먼 곳으로 이사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최 사장의 집은 다른 의사 집안에 비해 부유한 편은 아니었다. 아버지가 술을 꽤나 좋아해 많은 돈을 술값으로 바쳤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다른 의사 친구들은 야산도 있고 논도 있었는데 최 사장의 집은 대구에 있는 집 한 채가 부동산의 전부였다. 그래도 아버지가 의사였기 때문에 먹고 사는 데 지장은 없었다. 공대 동기생 36명 가운데 집에서 보내온 돈으로 기숙사비까지 낼 수 있었던 사람은 최 사장을 포함해 두명밖에 없었다.
그는 음악을 좋아하는 부모의 영향을 받아 어려서부터 음악을 즐겼다. 아버지는 음악가(音樂家)가 되지 말고 소리를 즐기는 사람이라는 뜻에서 '음락가'가 되라는 당부도 남겼다. 음악가는 프로페셔널이고, 음락가는 아마추어다. 그의 음악 실력은 수준급이다. 이미 고 3 때 베토벤 합창 교향곡 4악장의 보표를 자세히 읽을 정도였다.
대구에서 명문 경북중ㆍ고를 졸업한 최 사장은 서울대 기계공학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원래 공대 진학을 희망한 것은 아니었다. "고교 시절 미학이나 심리학을 전공하면 어떨까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고3 때는 전공보다 커트라인(합격가능선)을 갖고 지원할 과를 정했습니다. 담임선생님이 경북대 의대를 가라고 했습니다. 내심 서울대 의대 진학을 바라던 아버지가 잔뜩 열을 받으셔서 의대 가지 말고 서울대 공대에 가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공대생이 됐죠."
'다시 대학 가면 미학을 전공할 거냐'는 질문에 "미학을 전공하면 사장은 못할 것 같다"며 "다시 대학 갈 기회가 있으면 상과대학을 갈 것 같다"고 말했다. 돈 버는 방법을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을 것 같다는 게 이유다.
대학 졸업 후 첫 직장은 대우자동차의 전신인 신진자동차였다. 이후 대한전선으로 옮겼는데 그 회사가 대우전자로 바뀌었다. 두산기계에는 1977년 합류했다. 직장을 세 번 옮기면서 주위에서 직장을 너무 자주 옮기는 것 아니냐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이전 직장 경험이 많이 도움이 됐다"는 게 최 사장의 설명이다.
"기계공학과 출신이 자동차 회사, 전자업체(두산전자)에 다니다 공작기계 만드는 회사에까지 다니게 되면서 시너지 효과가 난 거죠. 특히 임원이 되니까 다양한 경험이 좋은 자산이 되더군요."
최 사장은 다시 과장 시절로 돌아간다면 도덕성 문제에 더 신경 쓸 것 같다고 답했다. 과장 시절에는 관련 업체 사람이 7만원어치 술을 사주고 차비로 3만원을 챙겨주는 일이 흔했다는 것. 그는 "지금은 기업이 바뀌기 시작했지만 예전에는 그게 도덕적으로 나쁜지 몰랐다"며 "그런 행동방식이 바뀌어야 우리 기업이 보다 발전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최 사장은 두산그룹의 주력 계열사 CEO 가운데 유일하게 해외 경험이 없는 순수 국내파다. 물론 해외에서 공부하거나 근무할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유학은 여건이 안 돼 포기했고 해외 근무는 회사에서 보내주지 않았다. 그럴 기회가 생기면 선배들이 말렸다. 해외 경험이 없어서 그런지 영어 스트레스도 많이 받는다. 하지만 "장사하는 데 문제 없다"고 자신있게 말한다. 결국 콘텐츠가 중요한 거 아니냐는 얘기다.
최 사장은 1985년 부장 승진 인사 때 혼자 누락되면서 처음 CEO를 꿈꿨다. "그때 경쟁자를 이기겠다는 독심(毒心)을 품었죠. '두고 보자'고 마음 속으로 다짐했고, 3년 후 먼저 부장 승진했던 동기들과 같이 이사가 됐습니다." 그는 "월급쟁이가 사장을 꿈꾸지 않으면 직장생활의 의미가 없다"며 "CEO가 되기 위해서 젊었을 때부터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만 39세에 회사의 '별'인 임원이 됐을 때가 직장생활에서 가장 기뻤던 순간이었다.
"따라 주는 사람이 많아서 별을 달았다고 당시 생각했죠. 그 뒤부터 후배들에게 더 잘해줬습니다. 자신을 따르는 사람이 많을수록 능력 있는 리더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죠."
최승철 사장은 월급쟁이를 크게 세 종류로 분류했다. 회사에서 키워준 직원,스스로 큰 직원,관심 밖에서 살아 남은 직원이다. 최 사장 스스로는 1번과 2번의 중간쯤 된다고 평가했다. CEO가 되는데 운도 따랐고,노력도 뒷받침됐다는 고백이다.
"오너가 어떤 사람을 CEO로 선택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결정입니다. 굉장히 쉽게 보이지만 오너 입장에선 여러 개의 누적된 데이터를 갖고 고심을 거듭합니다. 제가 직원들을 대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최 사장은 직원들을 정리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그 사람이 성공할지 여부를 알려면 최소 1년은 기다려 줘야 한다"며 답변을 대신했다.
그러면서 그는 "제일 중요한 것은 사람의 마음입니다. 내 마음을 전하고, 상대방 마음을 어떻게 얻을 것인가가 중요하지요"라고 말했다. 그는 "상대방의 마음을 읽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며 "설령 나쁜 사람이라도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으면 오케이"라고 강조했다. "무능하다 싶은 직원도 뜯어보면 쓸 구석이 있습니다." 그는 인사에 대해선 기본적으로 성선설 편에 서 있는 게 분명했다.
송대섭 한국경제 기자 dsso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