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인이 수용하는 보편적 가치 되살려야
태극마크 붙이는 순간 寒流로 전락해
지난 2월 가수 겸 음반제작자 박진영씨가 한 일간지에 '내가 애국자라고?'라는 칼럼을 써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는 지난 몇 년간 가장 불편했던 말이 '한류역군' '애국자' 등이었다고 했다. 그는 되묻는다. "우리가 우리 대중문화에 한류라는 태극마크를 붙일 필요가 있을까? 그리고 그것을 우리나라의 자랑,우리 민족의 자긍심 고취용으로 사용하는 것이 과연 적절할까?"
한류는 언제부턴가 동아시아의 새로운 문화현상으로 주목받았다. 정부는 신성장동력으로 추앙했지만,어느 틈엔가 韓流가 아닌 寒流가 됐다는 탄식이 커지고 있다. 왜 한류의 불길은 급작스레 사그라지고 있을까? 한류는 흘러간 유행으로 끝나버릴 것인가,아니면 지속 가능한 문화현상으로 거듭날 수는 없을까?
◆한류가 성공했던 이유
한류의 근원은 199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 드라마가 중국,베트남 등지에서 인기를 끌고,2000년 아이돌그룹 HOT가 중국 공연에 성공하면서 '한류'란 신조어가 중국 언론에 등장했다. 특히 2004년 일본에서 대히트한 '겨울연가'는 한류의 상징으로 떠올랐고,'대장금'이 그 바통을 이었다.
성공한 한류 작품들을 보면 △아시아적 정서와 맞닿은 가부장제를 그리거나('사랑이 뭐길래') △여성 우위라는 트렌드를 짚어내거나('엽기적인 그녀') △순애보로 만인의 추억을 일깨우거나('겨울연가') △집념과 헌신의 휴먼 스토리를 담아내거나('대장금') 한 것들이다. 한마디로 한국인이 아니어도 공감할 수 있는 아시아적 보편성을 획득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반한류,혐한류
중국 언론에 의해 만들어진 '한류'란 말에는 이미 한국 대중문화의 급속한 확산을 경계하는 '반(反)한류'의 의미가 담겨 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한류가 해외에서 각광받는 것을 마치 그 나라 문화를 정복한 것인 양 여기는 '우리 것만 최고'의 독선이 팽배했다. 여기에 한국인의 도드라진 배타적 민족주의 경향은 영화·드라마에도 태극마크를 붙였다(고구려 사극들,영화 '한반도' 등). 애국심에 호소하는 문화상품은 결국 국경을 넘는 순간 보편성을 잃어 '혐(嫌)한류'로 돌변하게 된다.
문화 상품 자체로서의 매력도 잃고 있다. 한 일본 잡지가 분석한 한국 드라마의 뻔한 공식이 이를 대변한다. 한결같이 기업 경영자,재벌2세와 평범한 여성의 신데렐라 스토리에다,남자 주인공은 늘 터프하며,20대에 이미 성공했고,주인공은 불치병에 걸리고,가난해도 휴대전화는 최신·최고급형이다. 세상에서 제일 재미없는 드라마가 다음 장면을 안 봐도 뻔한 것이다.
◆한류 의식 안 했을 때 한류가 떴다
한류는 특정한 의도와 목적에 의해 탄생한 것이 아니다. 영화,드라마의 감독·제작자들이 열심히 공들여 만들었더니 어느 날부턴가 아시아권에서 널리 뜬 것이다. 처음부터 '한국문화 전파''문화수출 역군' 같은 거창한 목적을 내세웠다면 결코 해외에서 각광받지 못했을 것이다. 한국의 문화상품은 태극마크를 붙이지 않았어도 일정한 품질을 갖췄을 때 자연스레 해외에서 수요가 창출됐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류를 무분별한 돈벌이 대상으로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참신성은 사라지고 진부함만 남았다. 한류 스타를 내세운 붕어빵식 영화·드라마들이 봇물을 이룬 것은 1980년대 홍콩 느와르나 쿵푸 영화가 고만고만한 내용에 늘상 나오는 얼굴들로 급작스레 식상해진 전철을 밟는 것이 아닌가 우려된다.
◆한류를 외칠수록 한류는 죽는다
대중문화는 흔히 "흐른다",즉 유행을 탄다고 한다. 한류 역시 흐름이며,흐르지 않고 고이면 썩게 마련이다. 백원담 성공회대 교수는 저서 '동아시아의 문화선택,한류'(펜타그램,2005)에서 지속 가능한 한류를 위해 각국 문화의 다양성과 어우러지는 한류,끊임없이 생산하고 대화하는 한류를 제안했다. 대신 한류를 정부의 정책 대상으로 삼거나,문화 상품 수출의 호기로 여기거나,한국 문화 최고라는 발상은 버려야 할 것으로 지적했다.
이제 관객은 더 이상 무분별한 문화 수용자가 아니다. 재미도 없는데 한국 영화라고 마냥 봐주지 않듯이, 나라 밖의 한류 소비자들도 한류스타에 무작정 열광하지 않는다. 따라서 한류는 한류로 불리기 이전,즉 아시아의 보편성에 근접하던 시절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가 먼저 흥분해 한류를 외칠수록 한류는 사그라질 것이다. 한류를 버려야 한류가 산다.
▶도움말 주신분=양윤덕 선생님(경기 덕계고)
오형규 한국경제 연구위원 oh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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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류의 정체성 논란…외국 콘텐츠 이용해야하나
'한류'의 정체성 논란이 확산되는 가운데,지난달 30일 미래상상연구소 창립 기념 세미나에선 '한류,외국문화 원형에 빨대 꽂고 버틸 수 있나'란 이색 주제로 뜨거운 논쟁이 벌어졌다. 현재 한류에 대해 "우리의 허약한 콘텐츠 대신 외국문화 원형에 빨대를 꽂고 버텨가는 꼴"이란 비판론과,"할리우드 영화처럼 더 많은 외국문화 원형에 무수한 빨대를 꽂아 외연을 확대해야 한다"는 긍정론이 강하게 맞섰다.
먼저 '빨대 꽂지 말라!' 측 주제 발표에 나선 김택근 경향신문 논설위원은 "일본의 만화·인기소설 등이 한류의 현주소가 되었고,한국 내 일류(日流) 선풍은 한류 발전에 심각한 위해요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바닥난 콘텐츠를 외국문화 원형에만 의존한다면 우리 문화의 허약한 허리가 더 빨리 드러날 것"이라고 강조했다.
반면 '빨대 더 꽂아라!' 측 발표자인 홍사종 미래상상연구소 대표는 "할리우드가 '시월애' '괴물' 등의 리메이크 판권을 사서 영화를 만든 것처럼,도리어 일본 등 외국문화 원형의 가공은 우리 문화 콘텐츠를 세계시장에 진입시키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반박했다. 홍 대표는 "미국 디즈니가 만든 '백설공주'(그림형제 동화)와 '인어공주'(안데르센 동화)는 거침없이 빨대를 꽂아 베낀 경우이고 최근엔 '라이온 킹'(일본만화 '밀림의 왕자 레오') '뮬란'(중국 전설) 등 동양적 소재로도 큰 부가가치를 재창조했다"고 근거를 들었다.
토론에 나선 한성봉 동아시아출판사 대표는 "한류는 한국사회에서 생산된 문화콘텐츠가 해외에서 수용된 현상으로, 문화산업적 부가가치의 창출보다는 우리 문화의 전파와 이해의 측면으로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조희문 인하대 교수는 "일상용품도 상표를 덮으면 어느 나라 것인지 모르듯,한류도 콘텐츠 생산보다는 유통에 중심을 둬야 한다"며 "국가와 매체의 경계가 무너진 상황에서 우리는 지나치게 혈통순수주의를 내세우는 것 같다"고 꼬집었다.
('뉴스메이커' 728호 6월13일자 참조)
태극마크 붙이는 순간 寒流로 전락해
지난 2월 가수 겸 음반제작자 박진영씨가 한 일간지에 '내가 애국자라고?'라는 칼럼을 써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는 지난 몇 년간 가장 불편했던 말이 '한류역군' '애국자' 등이었다고 했다. 그는 되묻는다. "우리가 우리 대중문화에 한류라는 태극마크를 붙일 필요가 있을까? 그리고 그것을 우리나라의 자랑,우리 민족의 자긍심 고취용으로 사용하는 것이 과연 적절할까?"
한류는 언제부턴가 동아시아의 새로운 문화현상으로 주목받았다. 정부는 신성장동력으로 추앙했지만,어느 틈엔가 韓流가 아닌 寒流가 됐다는 탄식이 커지고 있다. 왜 한류의 불길은 급작스레 사그라지고 있을까? 한류는 흘러간 유행으로 끝나버릴 것인가,아니면 지속 가능한 문화현상으로 거듭날 수는 없을까?
◆한류가 성공했던 이유
한류의 근원은 199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 드라마가 중국,베트남 등지에서 인기를 끌고,2000년 아이돌그룹 HOT가 중국 공연에 성공하면서 '한류'란 신조어가 중국 언론에 등장했다. 특히 2004년 일본에서 대히트한 '겨울연가'는 한류의 상징으로 떠올랐고,'대장금'이 그 바통을 이었다.
성공한 한류 작품들을 보면 △아시아적 정서와 맞닿은 가부장제를 그리거나('사랑이 뭐길래') △여성 우위라는 트렌드를 짚어내거나('엽기적인 그녀') △순애보로 만인의 추억을 일깨우거나('겨울연가') △집념과 헌신의 휴먼 스토리를 담아내거나('대장금') 한 것들이다. 한마디로 한국인이 아니어도 공감할 수 있는 아시아적 보편성을 획득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반한류,혐한류
중국 언론에 의해 만들어진 '한류'란 말에는 이미 한국 대중문화의 급속한 확산을 경계하는 '반(反)한류'의 의미가 담겨 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한류가 해외에서 각광받는 것을 마치 그 나라 문화를 정복한 것인 양 여기는 '우리 것만 최고'의 독선이 팽배했다. 여기에 한국인의 도드라진 배타적 민족주의 경향은 영화·드라마에도 태극마크를 붙였다(고구려 사극들,영화 '한반도' 등). 애국심에 호소하는 문화상품은 결국 국경을 넘는 순간 보편성을 잃어 '혐(嫌)한류'로 돌변하게 된다.
문화 상품 자체로서의 매력도 잃고 있다. 한 일본 잡지가 분석한 한국 드라마의 뻔한 공식이 이를 대변한다. 한결같이 기업 경영자,재벌2세와 평범한 여성의 신데렐라 스토리에다,남자 주인공은 늘 터프하며,20대에 이미 성공했고,주인공은 불치병에 걸리고,가난해도 휴대전화는 최신·최고급형이다. 세상에서 제일 재미없는 드라마가 다음 장면을 안 봐도 뻔한 것이다.
◆한류 의식 안 했을 때 한류가 떴다
한류는 특정한 의도와 목적에 의해 탄생한 것이 아니다. 영화,드라마의 감독·제작자들이 열심히 공들여 만들었더니 어느 날부턴가 아시아권에서 널리 뜬 것이다. 처음부터 '한국문화 전파''문화수출 역군' 같은 거창한 목적을 내세웠다면 결코 해외에서 각광받지 못했을 것이다. 한국의 문화상품은 태극마크를 붙이지 않았어도 일정한 품질을 갖췄을 때 자연스레 해외에서 수요가 창출됐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류를 무분별한 돈벌이 대상으로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참신성은 사라지고 진부함만 남았다. 한류 스타를 내세운 붕어빵식 영화·드라마들이 봇물을 이룬 것은 1980년대 홍콩 느와르나 쿵푸 영화가 고만고만한 내용에 늘상 나오는 얼굴들로 급작스레 식상해진 전철을 밟는 것이 아닌가 우려된다.
◆한류를 외칠수록 한류는 죽는다
대중문화는 흔히 "흐른다",즉 유행을 탄다고 한다. 한류 역시 흐름이며,흐르지 않고 고이면 썩게 마련이다. 백원담 성공회대 교수는 저서 '동아시아의 문화선택,한류'(펜타그램,2005)에서 지속 가능한 한류를 위해 각국 문화의 다양성과 어우러지는 한류,끊임없이 생산하고 대화하는 한류를 제안했다. 대신 한류를 정부의 정책 대상으로 삼거나,문화 상품 수출의 호기로 여기거나,한국 문화 최고라는 발상은 버려야 할 것으로 지적했다.
이제 관객은 더 이상 무분별한 문화 수용자가 아니다. 재미도 없는데 한국 영화라고 마냥 봐주지 않듯이, 나라 밖의 한류 소비자들도 한류스타에 무작정 열광하지 않는다. 따라서 한류는 한류로 불리기 이전,즉 아시아의 보편성에 근접하던 시절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가 먼저 흥분해 한류를 외칠수록 한류는 사그라질 것이다. 한류를 버려야 한류가 산다.
▶도움말 주신분=양윤덕 선생님(경기 덕계고)
오형규 한국경제 연구위원 oh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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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류의 정체성 논란…외국 콘텐츠 이용해야하나
'한류'의 정체성 논란이 확산되는 가운데,지난달 30일 미래상상연구소 창립 기념 세미나에선 '한류,외국문화 원형에 빨대 꽂고 버틸 수 있나'란 이색 주제로 뜨거운 논쟁이 벌어졌다. 현재 한류에 대해 "우리의 허약한 콘텐츠 대신 외국문화 원형에 빨대를 꽂고 버텨가는 꼴"이란 비판론과,"할리우드 영화처럼 더 많은 외국문화 원형에 무수한 빨대를 꽂아 외연을 확대해야 한다"는 긍정론이 강하게 맞섰다.
먼저 '빨대 꽂지 말라!' 측 주제 발표에 나선 김택근 경향신문 논설위원은 "일본의 만화·인기소설 등이 한류의 현주소가 되었고,한국 내 일류(日流) 선풍은 한류 발전에 심각한 위해요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바닥난 콘텐츠를 외국문화 원형에만 의존한다면 우리 문화의 허약한 허리가 더 빨리 드러날 것"이라고 강조했다.
반면 '빨대 더 꽂아라!' 측 발표자인 홍사종 미래상상연구소 대표는 "할리우드가 '시월애' '괴물' 등의 리메이크 판권을 사서 영화를 만든 것처럼,도리어 일본 등 외국문화 원형의 가공은 우리 문화 콘텐츠를 세계시장에 진입시키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반박했다. 홍 대표는 "미국 디즈니가 만든 '백설공주'(그림형제 동화)와 '인어공주'(안데르센 동화)는 거침없이 빨대를 꽂아 베낀 경우이고 최근엔 '라이온 킹'(일본만화 '밀림의 왕자 레오') '뮬란'(중국 전설) 등 동양적 소재로도 큰 부가가치를 재창조했다"고 근거를 들었다.
토론에 나선 한성봉 동아시아출판사 대표는 "한류는 한국사회에서 생산된 문화콘텐츠가 해외에서 수용된 현상으로, 문화산업적 부가가치의 창출보다는 우리 문화의 전파와 이해의 측면으로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조희문 인하대 교수는 "일상용품도 상표를 덮으면 어느 나라 것인지 모르듯,한류도 콘텐츠 생산보다는 유통에 중심을 둬야 한다"며 "국가와 매체의 경계가 무너진 상황에서 우리는 지나치게 혈통순수주의를 내세우는 것 같다"고 꼬집었다.
('뉴스메이커' 728호 6월13일자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