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짱있는 신입사원 돼라"

[한국의 CEO 나의 청춘 나의 삶] (32) 최평규 S&T그룹 회장
1979년 10월26일 저녁 미국 오클라호마 주의 한 중국음식점. 미국인 지인과 식사를 하고 있던 27세의 한국인 '풋내기' 사업가는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 듣고 절망에 빠져 버렸다.

충격적인 뉴스는 다름아닌 박정희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 이른바 '10·26사태'가 발생한 것이었다.

이 사업가는 삼영기계(현재 S&Tc)라는 회사를 막 설립한 뒤 사업을 시작하는 데 필요한 '피닝머신'(열교환기 부품을 제조하는 기계)을 수입할 목적으로 3주간 미국에 머물고 있던 참이었다.

"박 대통령 서거 소식을 들은 날은 기계를 수입하기로 결정하고 귀국하려던 바로 전날이었죠. 그 소식을 듣고나니 '이거 정말 큰일 났구나'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대통령이 돌아가셨는데 한국 경제가 제대로 돌아갈 수 있을까, 이런 상황에서 사업을 시작하는 게 가능한 일이까, 의문이 꼬리를 물더라고요.

그래서 기계를 수입하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일단 몸만 돌아왔습니다."

현재 매출이 1조3000억원에 달하는 13개 계열사를 거느린 최평규 S&T그룹 회장(55)의 사업 인생은 이렇게 우여곡절 속에서 시작됐다.

자신의 17평 아파트를 팔아 만든 300만원을 종자 돈 삼아 직원 6명의 삼영기계를 설립하고, 아버지 형 매형 등 3명의 집을 은행에 담보 잡혀 피닝머신을 수입하려할 때만해도 최 회장은 성공할 자신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대통령 서거라는 외부 환경의 급변으로 그는 사업을 시작해 보지도 못하고 그만 둘 처지에 몰린 것이었다.

최 회장은 "기계 수입을 포기하고 돌아와 1979년 연말에 술만 엄청나게 마셨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또다른 외부 환경의 변화로 그는 접었던 사업을 두 달 뒤 다시 시도하게 된다.

"1980년 1월12일 저에게 행운이 찾아 왔어요.

정부가 이른바 1·12조치를 단행해 원·달러 환율을 600원에서 480원으로 떨어뜨린(원화절상) 겁니다.

이 조치로 수입을 포기했던 기계의 원화 환산 가격이 갑자기 싸지게 됐죠. 그래서 그 기계를 다시 수입하기로 결심했죠. 그해 1월20일 기계를 부산에서 통관했습니다.

그걸 트레일러에 싣고 추풍령을 넘어서 돼지 국밥으로 점심을 먹는데 눈물이 납디다.

사업이 잘 될지 걱정도 여전히 많았고요."

걱정과 달리 그의 사업은 초기부터 비교적 빨리 안정돼 갔다.

물론 그의 부단한 노력 때문이었다.

"창업했을 때 나이가 너무 어리다보니 명함을 두 개 파서 다녔어요.

하나는 '부장 최평규'고 다른 하나는 '대표이사 최평규'였죠. 영업하러 갈 때는 부장 명함 들고 가고, 수주하면 대표이사 명함 보여줬죠. 그래도 열심히 하다보니 사업한 지 1년 만에 은행 빚을 다 갚았어요."

하지만 그의 사업인생이 탄탄대로를 달린 것만은 아니었다.

크게 봐서 두 차례의 위기가 그에게 찾아 왔다.

하지만 그때마다 최 회장은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위기를 극복해 오히려 기회로 삼았던 것이다.

첫 번째 위기는 창업 후 3~4년쯤이 지났을 때다.

공장에 불이 나 피닝머신이 홀랑 타 버린 것. 그는 사업을 포기하는 대신 새로운 '도전'를 했다.

"불에 탄 기계를 다 뜯어 봤죠. 다 해체해 놓고 보니 별 게 아닙디다.

그래서 특허에 안 걸리도록 내가 예전 것과 비슷한 기계를 세 대 만들었어요.

예전 기계랑 성능이 비슷해 매출이 세 배가 됐던 겁니다."

두 번째는 회사 매출이 150억원까지 커졌던 1996년의 일이다.

한국중공업이란 대기업이 그때까지 삼영기계에서 납품을 받던 제품을 직접 제작하겠다며 주문을 갑자기 끊어 버린 것이다.

그는 처음 2~3개월 동안 고민만 했다고 한다.

그러다 무턱대고 미국으로 날아가 세계적인 보일러 회사인 CE를 찾아갔다.

그런데 CE는 최 회장 제품에 의외로 높은 평가를 하고 수입을 결정했다고 한다.

최 회장은 "CE 납품을 계기로 1997년에 해외 수주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며 "여기에 외환위기마저 닥쳐 달러당 800원하던 환율이 1600원까지 치솟다보니 오히려 매출이 더 급증했다"고 말했다.

CE에 대한 납품과 외환위기에 따른 매출 급증은 최 회장이 사업을 한 단계 도약시키는 발판이 됐다.

이때 벌어들인 자금을 토대로 최 회장은 2003년 S&T중공업(옛 통일중공업), 2006년 S&T대우(옛 대우정밀), 올해 S&T모터스(옛 효성기계) 등을 차례차례 인수하면서 현재의 S&T그룹의 토대를 형성하게 됐기 때문이다.

이처럼 '맨주먹'으로 시작해 큰 그룹을 일군 최 회장의 어린 시절과 학창시절은 어땠을까.

최 회장은 "어린 시절에 대해 별로 할 얘기도 없고,하고 싶지도 않다"고 했다.

하도 가난했기 때문이다.

그는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는 공부를 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어렵게 컸다.

그는 다만 대학(경희대 기계공학과) 재학시절 무일푼으로 '닭발 중개상'이 돼 돈을 벌었던 일화를 소개했다.

그의 탁월한 비즈니스 감각을 시사하는 일화다.

"내가 살던 서울 휘경동과 이문동 지역 시장에 닭집이 하나 있었어요.

오며가며 봤더니 그집 주인은 닭을 잡고 닭발은 그냥 버리더라고요.

그걸 보고 '이거 되겠구나' 생각했죠. 닭집 주인을 설득해 공짜로 닭발을 가져다가 인근 포장마차에 팔아 먹은 거죠. 그거 엄청 돈이 됐어요."

그는 이 같은 사업 수완이 어머니로부터 얼마간 영향을 받은 것 같다고 설명한다.

최 회장이 고등학교 2학년일 때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그의 가족은 모두 상경했다.

어머니는 서울에 이사 와서 월세로 방 12개를 얻어 '경화여관'이라는 여관을 차렸다.

처음엔 여관 손님이 한 명도 없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손님이 줄을 서게 됐다고 한다.

"어머니가 매일 이불을 빨아 깨끗한 잠자리를 만든 게 효과를 본 거죠. 구석에 있는 여관이라 처음엔 신통찮게 생각했던 손님들도 일단 하룻밤 자고 나면 깨끗한 이부자리에 생각이 바뀐 거죠. 우리 어머니는 정말 비즈니스 감각이 좋았던 것 같아요"라고 최 회장은 말했다.

하지만 최 회장은 이런 타고난 수완보다 창업을 꿈꾸는 젊은이들이 갖춰야 할 더 중요한 덕목이 있다고 강조한다.

어떻게든 사업에 성공하겠다는 강한 의지와 부단한 기술개발이 그것이다.

"앞으로 우리 젊은이들도 창업을 해서 크게 성공할 수 있는 기회는 분명히 올 거예요.

다만 여기엔 조건이 있죠.기성세대보다 더 나은 기술을 개발해야죠. 더 좋은 아이디어를 갖고서 자신만의 기술을 개발하는 데 목숨을 바쳐야해요.

가족 재산을 다 담보로 넣고 내가 망하면 우리 가족 다 망한다,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이런 각오가 있어야 해요."

이와 함께 최 회장은 "비록 창업을 하지 않더라도 젊은이들은 자고로 배짱이 두둑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창업을 하기 전에 모두 5년 동안 샐러리맨 생활을 한 적이 있는 최 회장은 "신입사원은 배짱이 있는 지원자를 가장 먼저 뽑는다"고 했다.

그의 설명은 이렇다.

"사업을 하면서 많은 직원을 지켜본 결과인데, 배짱있게 큰소리치는 직원들은 일반적으로 유능한 경우가 많아요.

일단 자신이 큰소리쳐 놓은 게 있어서 이 말을 지키려고 죽으나 사나 일하는 경향이 높기 때문이죠."

이상열 한국경제신문 산업부 기자 mustaf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