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 그것은 단순히 컴퓨터 칩을 가리키는 명칭에 지나지 않았다.

더구나 컴퓨터 성능의 급속한 진화에 따라 곧 다른 것으로 대체돼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질 운명이었다.

그러나 어느 땐가 사회적인 의미가 더해지는 순간 그것은 지속적이고 광범위한 쓰임새를 보이는, 그리고 그 어떤 표현보다도 강력한 함의를 지닌 말로 다시 태어났다.

바로 '386'이다.

'386'은 본래 컴퓨터 용어로 탄생했다.

컴퓨터 프로세서(칩)를 개발, 생산하는 미국의 인텔사가 1980년대 초에 내놓은 것이 286 프로세서였다.

인텔은 1985년 성능을 향상시킨 386 프로세서를 선보였으며 1989년엔 486급을, 1993년부터는 더 한층 앞선 프로세서인 펜티엄 시대를 열었다.

그것은 진화의 역사였다.

따라서 1990년대에 386이란 말은 486이나 펜티엄에 비해 한참 뒤떨어진, '구식, 구형'이란 의미의 상징어로 쓰였다.

이 말이 사회적인 의미를 담은 신어로 탈바꿈해 특정 세대를 지칭하게 된 것은 1990년대 후반 들어서다.

당시는 정보화 사회의 도래와 함께 1960년대에 태어나 30대의 나이에 들어선 세대가 정치적으로 주목받던 시절이었다.

자연스레 컴퓨터 용어인 386에 사회적인 의미가 더해졌다.

'30대+80년대 학번+60년대 출생'의 조합이 이뤄진 것이다.

새로운 의미로 부활한 '386'은 일종의 두문자어(頭文字語)이다.

아직도 사전에 오른 말은 아니지만 그 쓰임새의 빈도나 광범위성, 지속성 등을 보면 단어로서의 자격은 이미 충분히 얻었다고 봐야 한다.

사회적 의미를 담은 '386'이 강력한 언어 세력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이 말이 칼랑부르(calembour)이기 때문이다.

칼랑부르란 수사학적으로 일종의 동음이의어에 의한 말장난이다.

우리말로 하면 '신소리' 같은 것이다.

가령 1997년 말 한국의 외환위기 직후 많이 사용되던 '연봉錢爭(전쟁)' '외국錢力(전력)' 같은 표현이 그런 것이다.

각각 戰爭이나 戰力이란 말을 염두에 둔 것으로 '돈싸움' '돈의 힘'이란 의미를 암시하는 상징어다.

이런 말이 단순히 '돈싸움'이니 '돈의 힘'이니 하는 것보다 더 강렬하게 쓰이는 것은 그 말이 갖고 있는 언어적 '긴장감' 때문이다.

'386'도 본래 컴퓨터 칩을 가리키는 데서 출발해 새로운 의미가 더해지면서 본래의 쓰임새와의 사이에 '틈'을 만들었다.

이 틈이 언어적으로 '긴장'을 유발하는데, 이로 인해 이 말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면서 짧은 시간 안에 급속도로 퍼질 수 있었던 것이다.

'사오정(45세 정년), 오륙도(56세까지 직장에 있으면 도둑놈), 이태백(20대 태반이 백수)' 같은 말도 같은 유형의 말들이다.

'3金'(김영삼·김대중·김종필) 'G7'(서방선진 7개국)과 같은 말이 정식 단어가 아니면서도 강력한 의미 기능을 갖는 것도 마찬가지다.

'386'의 탄생 시점이 중요한 것은 이 말의 중심이 3에 있기 때문이다.

즉 '1990년대에 30대인 사람들'이 이 단어가 생겨난 배경의 핵심이다.

그러니 386세대는 2000년대 들어서는 486이라 해야 이치에 맞겠지만 그렇게는 잘 부르지 않는다.

물론 386이 혁신적인 가치관의 변화 등으로 재탄생이라 할 만한 어떤 '도약'을 이룬다면 그때는 '486'이란 말도 새로운 생명을 얻어 단어처럼 쓰일 수 있을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오피니언부 기자 hymt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