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cus] 외국인 M&A 규제 '한국판 엑슨-플로리오법' 제정 논란
'한국판 엑슨-플로리오법'의 도입 여부를 두고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이 법은 쉽게 말해 국가 주요 산업 보호법. 철강 정유 반도체 등 국가 주요 산업에 대해 외국인(주로 외국기업)이 인수·합병(M&A)하려고 할 때 정부로부터 사전심사 및 승인을 받도록 하는 법률이다.

국가경제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판단이 서면 정부가 이를 불허할 수 있는 제도로 강력한 적대적 M&A 방어책 중 하나다.

이 제도가 이슈로 떠오른 것은 국회에서 2건의 관련 법률 제정안이 제출돼 본격적인 토론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2건의 법률안이란 열린우리당 이상경 의원의 '국가안보를 위한 외국인 투자규제 특별법'과 한나라당 이병석 의원의 '국가경제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외국인투자 등의 규제에 관한 법률안'이다.

이 법률안들은 SK㈜가 소버린펀드로부터 공격받아 정상적인 경영을 펼칠 수 없었던 것과 포스코가 아르셀로-미탈의 M&A 공격에 빠질 수 있다는 상황을 염두에 두고 이를 방지하고자 하는 차원에서 입안됐다.

이 법률안에 대해 찬반 양론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다.

주요 산업이 외국기업에 넘어간다면 전체 국가경제가 위태로워질 수 있는 만큼 반드시 도입해야 한다는 찬성론과 법률 제정시 외국인의 한국 투자가 위축되며 세계적인 자본자유화 흐름에도 거스른다는 반대론이 그것이다.

◆ 외국인 적대적 M&A 위협 심각해

포스코 설립자인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은 "아르셀로-미탈에 의한 포스코의 적대적 M&A 위협은 생각보다 훨씬 심각하다"고 강조했다.

아르셀로-미탈은 M&A를 통해서 세계 1위에 오른 철강업체. 이 회사가 공식적으론 포스코에 대해 적대적 M&A 계획이 없다고 말하지만 믿을 수 없다는 것이 박 회장의 얘기다.

그는 "M&A하겠다고 하고서 M&A에 나서는 사례 봤느냐"고 반문한다.

외국인들이 보유한 포스코의 지분은 4월23일 현재 59%. 반면 한국 자본으로 볼 수 있는 국내 기관과 개인들의 지분은 20%를 약간 넘는다.

아르셀로-미탈이 외국인들에게 시가보다 높은 가격에 주식을 넘겨 달라고 제안한다면 손쉽게 30% 이상의 지분을 확보, 경영권을 장악할 수 있는 상황이다.

외국 사모펀드인 소버린은 2003년 SK㈜의 지분 약 15%를 기습적으로 매입, SK㈜의 경영권을 위협한 바 있다.

SK㈜는 SK텔레콤 등 SK그룹의 주요 계열사 지분을 갖고 있는 모기업이어서 만약 소버린이 경영권을 가져갔다면 수익률 극대화를 위해 SK㈜가 보유한 SK텔레콤 지분을 팔거나, SK㈜ 자체를 쪼개 팔 것이란 분석이 많았다.

이번에 규제 법률안을 제안한 이병석 의원은 "포스코가 아르셀로-미탈 등 외국기업에 넘어가면 실업 증가,지역경제 침체, 철강 혁신기술 유출 등의 위험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승철 전국경제인연합회 전무도 "외환위기 이후 외국인 투자 규제가 대폭 완화됨에 따라 상당수 국내 기업이 적대적 M&A 위협을 심각하게 느끼고 있다"며 "기업들이 이에 대처하기 위해 자사주를 과도하게 매입함에 따라 장기 성장동력이 훼손되고 있다"고 찬성했다.

왕상한 서강대 교수(법학)는 "자국 이익의 관점에서 핵심 산업을 보호하는 것은 세계적인 추세"라며 "미국과 유럽 등 대부분의 선진국이 투기자본을 견제하는 장치를 두고 있으며 아시아 국가 가운데서는 일본과 한국이 유일하게 적대적 M&A에 대한 법적 제한이 없었지만 일본은 최근 신(新)회사법 개정을 통해 경영권 방어장치를 도입했다"고 소개했다.

◆ WTO 규정 위반 … 외국인 투자 위축 우려

정치권 및 학계와 달리 정부에선 신중론을 펴고 있다.

재정경제부에선 우선 세계무역기구(WTO),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등 한국이 가입한 국제기구의 규약 위반에 해당할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WTO 등은 자본자유화 규정을 두고 있으며, 이는 자본의 유출입 때 내·외국인 간 차별을 둬서는 안 된다는 것이 핵심이라는 설명이다.

재경부는 또한 법률안이 보호해야 할 대상이라고 명시하고 있는 국가 주요 산업이 확대 해석될 위험도 크다고 보고 있다.

현재 전력 통신 방송 등 국가 기간산업은 외국인 지분 제한 등을 통해 외국인이 경영권을 가질 수 없도록 해 놓고 있는데, 법률안에서 제기하고 있는 철강 정유 반도체 등이 과연 전력 등과 같이 기간산업으로 해석될 수 있느냐는 데 의문을 달고 있다.

산업자원부는 외국인 투자 위축을 걱정하고 있다.

윤영선 산자부 외국인투자기획관은 "론스타의 외환은행 지분 매입 및 매각 등의 과정에서 크게 논란이 불거진 마당에 외국인의 한국기업 지분 매입을 심사하는 법률까지 만들면 한국이 외국인에 대해 비우호적이라는 이미지가 더욱 강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윤 기획관은 "미래 성장을 위해 외국인 투자를 적극 유치한다는 것이 정부의 기본 방침이기 때문에 외국인 투자를 규제하는 법률을 수용하기 힘들다"고 덧붙였다.

한충민 한양대 교수(경영학)도 "법안 자체로 긍정적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 경제의 성장잠재력 약화,구조조정 지연 등 부작용이 더 많은 것으로 판단된다"고 진단했다.

정부는 특히 미국에서 엑슨-플로리오법이 제정되긴 했지만 실제로 집행된 사례는 많지 않다는 점을 신중론의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박준동 한국경제신문 경제부 기자 jdpowe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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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엑슨-플로리오법이란?

미국은 1988년 엑슨-플로리오법(Exon-Florio Act)을 만들었다.

법안을 제안한 상원의원 엑슨(Exon)과 하원의원 플로리오(Florio)에서 법률 명칭을 따 왔다.

이 법은 안보에 위해가 된다고 판단되는 외국인 투자를 정부가 직접 조사하고 철회를 요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골자다.

당시 일본 기업의 미국 기업 인수·합병(M&A)이 늘면서 이를 견제하기 위한 차원에서 마련됐다.

이 법에 따라 미국 대통령은 기간산업에 대해 외국자본의 적대적 M&A 시도를 대통령이 금지할 수 있다.

미국은 이 법을 도입한 이후 25건의 자국 기간산업 M&A를 조사하고, 이 중 14건을 자진 무산시키거나 강제 철회시킨 바 있다.

홍콩의 허치슨왐포아가 광통신망 업체인 글로벌크로싱 인수 계획을 스스로 포기한 것 등이 대표적 사례다.

중국 한 국영기업이 미국 우주산업부품 전문업체 맴코를 인수하려던 것을 무산시킨 것도 이 법에 의거해서다.

엑슨-플로리오법은 세계 각국으로부터 세계무역기구(WTO)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등의 규정 위반이라는 지적을 끊임없이 받아왔다.

하지만 미국은 세계 최강대국이며 특히 자본시장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우월적 지위를 활용,법을 유지하고 있다.

반면 미국 정부는 다른 국가에는 자본자유화를 높이고 기간산업 보호정책을 그만두라고 요구하는 이중성을 보이고 있다.

한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때 한국 정부가 통신사업자에 적용하고 있는 외국인 지분제한(49%)을 완화하거나 아예 철폐하기를 요구한 그런 사례다.

유럽 국가들도 엑슨-플로리오법과 유사한 법률을 적용하고 있다.

영국과 프랑스는 철강 석유 교통 통신 등 기간산업 M&A에 대해 정부가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

스웨덴 핀란드 등은 엑슨-플로리오법은 아니지만 '차등의결권제(대주주 등에게 1주당 2주 이상의 의결권을 부여하는 것)'를 도입, 기업들의 경영권 방어를 용이하게 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