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도영 < 서울시립대 교수·도시사회학 >

⇒ 한국경제신문 4월19일자 A38면

지난 16일 오전 미국 캠퍼스 총기난사 사건 중 최악의 사건이 발생했다.

세계가 경악했고, 이 사건으로 미국 사회 전역은 충격에 휩싸였다.

한국에서는 주요한 국제뉴스 정도로만 이 소식을 다뤘다.

한국 외교부는 한국 교민(僑民) 중 피해자 존재 여부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나마 다행히' 한인 학생 한 명이 팔에 총알이 스치는 정도로 '비교적 가벼운 상처'를 입었다고 보도됐다.

17일 오후 일부 언론 만평에서는 사건을 희화화하기까지 하고 있었다.

알고 보니 미국은 집안 단속도 제대로 못하는 부실 투성이 나라라는 어조였다.

그런데 18일 아침 한국 언론은 사실상 발칵 뒤집혔다.

일부의 기사제목은 '한반도 충격, 교민사회 패닉, 정부 비상회의' 등의 문구로 채워졌다.

심야 비상회의에 이어 한국 대통령은 이례적으로 조의(弔意)와 함께 유감 성명을 내보냈다.

이유는 총기사건의 범인이 바로 '한국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기의식의 알맹이는 범행을 저지른 한국인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자성하고 속죄하는 의식(意識)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한국인이 범인이라는 것이 알려짐으로 인해 한국인들이 미국에서, 더 넓게는 전 세계로부터 부정적인 인식을 얻게 될 것을 염려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미국인들의 보복성 폭력이 우려되기 시작했다.

미국 유학생들은 이제 전부 보따리를 싸고 귀국해야 하는가.

코리아 타운 상가들은 이제 문을 닫는 것이 아닌가.

LA 폭동 때와 같은 보복성 대형 사태 가능성은? 정부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전(全) 미국 공관 및 한인 사회와 긴밀히 대책을 마련 중임을 발표했다.

범인이 밝혀지기 전까지 이 사건은 '강 건너 불'이고 '냉소적인 미국 비판'의 재료였을 뿐이다.

범인이 알려진 후 이 사건은 '국가적' 혹은 '민족적' 단위의 사건이 되었다.

문제는 외국인들의 보복으로부터 어떻게 '방어'하느냐는 것이었다.

그에 근거해 패닉 상태에 빠졌다.

필자는 한인들이 미국에서 받을지도 모르는 피해와 부정적 시선이 크게 두렵지 않다.

물론 실제로 그런 일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다종족(多種族) 사회 미국은 지금 자신들의 시스템을 자성한다.

아니나 다를까 인터넷판을 통해 지금 이 시각에도 속속 올라오는 기사들은 '이 사건을 기화로 한국인 전체를 비난하지는 않을 것'이란 제목을 달고 있다.

문제를 갖고 있는 우울하고 폭발적인 개인들은 어느 사회에나 있다.

그들이 총기를 쉽게 구입하고 사용할 수 있는 환경을 만나면 엄청난 사단(事端)이 벌어진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사단을 벌인 범인이 우연히도 한국계였다.

이 사건의 본질은 한국인의 민족성도, 미국인의 특수성도 아니다.

범인은 한국인 국적자이면서 미국 영주권자로서 양쪽 사회 모두의 일원이었다.

이번 사건과 관련해 한국인 전체가 혹시 있을지 모르는 보복에 대한 피해의식을 갖는 것은 과잉 반응이다.

진짜 문제는 오히려 한 개인이 저지른 범행과 그 범행을 가능하게 만든 미국 사회의 총기 관리 시스템 차원에서 이 사건을 보며 차분하게 대응하기보다 단순히 범인을 '한국인'으로만 보는 우리의 의식에 있다.

자숙하고 숙연한 자세를 표하지 말자는 것이 아니다.

그런 숙연한 자세와 조의와 표명을 왜 범인이 한국인으로 드러나기 전부터 갖지 않았느냐는 것이 문제다.

그리고 범인이 한국인으로 드러난 다음에는 한국인 전체가 범죄집단처럼 인식될지 모른다는 것을 당연한 듯이 받아들이는 사고(思考)가 문제다.

상황을 뒤집어보자. 한국 안에서 동남아국가 출신의 근로자가 어떤 범죄를 저질렀을 경우 우리는 그것을 범죄자 개인의 문제로 인식하지 않은 채 그가 속한 종족집단 전체를 정죄하고 보복할 준비가 돼 있는 것은 아닐까? 필자는 이 사건으로 인해 한국 내에 들어와 거주하는 외국인들에 대한 의심과 위험의 눈초리가 전보다 더해지지 않을까 염려스럽다.

개인과 집단을 구분하지 않는 종족집단적 사고의 틀, 모든 나라 사람들이 다른 모든 나라로 흩어져 살고 있는 글로벌 이민시대에 관리해야 할 한국의 진정한 위기는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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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배타적 집단주의론 세계인 될 수 없다

미국 버지니아공대의 총기난사 사건으로 한 주가 떠들썩했다.

게다가 범인이 미국 영주권을 가진 한국인 이민 1.5세대라니…. 이 사건은 그 자체로 엽기적이지만, 한국인들이 이를 받아들이는 자세를 보면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만든다.

송도영 교수가 이 칼럼에서 지적했듯이, 우리는 한 개인의 문제를 지나치게 종족 또는 집단화해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한국인'이 연관됐다면 쉽게 비분강개하거나 열광하기 일쑤다.

안톤 오노의 할리우드 액션을 단순한 더티 플레이(dirty play) 정도로 보지 않고 미국 전체를 적대시한다든지, 갓난 아기 때 해외로 입양됐다가 미국 유럽 등 선진국에서 작가 연예인 스포츠스타 등으로 이름을 날린 사람에 대해 너나 없이 열광하는 태도가 그렇다.

미국 정부는 한국 정부가 조문사절단을 파견하겠다고 타진하자 한사코 사절했다.

한마디로 미국민의 문제이자, 개인의 문제를 왜 외국 정부가 나서서 국가 대 국가의 문제로 삼느냐는 것이다.

'한국계 미국 영주권자'인 데 대해 우리는 '한국계'에, 미국은 '영주권자'에 초점을 맞춰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한국과 미국의 문화코드 차이는 사실 동·서양의 차이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지만 유달리 단일민족을 강조해 온 우리 역사와 무관치 않다.

우리 주위의 학교나 군대에서 단체기합을 종종 볼 수 있다.

한두 명의 잘못으로 모두가 기합을 받는 것을, 기합을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대개는 당연하게 여긴다.

물론 최근 들어 대학 신입생 환영회나 체육학과 신입생 군기잡기 등에서는 선후배 간에 충돌도 나타나고 있다.

이는 이기주의와 개인주의가 서서히 분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만 아는 이기주의와, 자신의 자유를 보장받으려면 남의 자유도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행동하는 개인주의는 엄연히 구분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선 그동안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거의 동의어로 사용되어 왔다.

아직까지 집단의 결속이 강조되는 한국 사회에서 신세대들의 개인주의적 사고는 이기주의로 종종 비쳐지지만 실상은 이기주의와는 다른 차원의 모습을 띤다.

자녀 교육을 할 때 일본의 부모는 대개 '남에게 폐 끼치지 말라'고 가르치는 반면, 한국의 부모는 '밖에 나가 기죽지 말라'고 강조한다.

일본 부모가 개인주의를 가르친다면, 한국 부모는 이기주의를 가르치는 것은 아닐지 싶다.

언어생활에서 영어의 'my home'은 우리말에선 '우리 집'으로 표현되지만 실제적으론 '우리' 바깥의 타인에 대해 더욱 배타적이진 않은가?

한국인의 이기적·종족집단적 사고는 북한 주민을 대하는 데서도 드러난다.

탈북자에겐 다소 비하하는 듯한 시선을 보내면서 미모의 북한 여성 응원단이나 남북한 축구경기를 볼 때는 마치 곧 통일이라도 될 듯 흥분한다.

이제는 문제를 보는 시각을 인류의 보편적 가치에 초점을 맞춰야 할 때다.

아무리 싫은 나라라도 무고한 사람들이 죽었다면 함께 애도하고, 재난을 당한 나라는 함께 돕고, 분쟁이 있는 곳에는 화해를 유도해야 한다.

그래야 세계 11위권 경제대국이면서 아직도 개도국 수준에서 칭얼댄다는 비판을 듣지 않을 것이다.

오형규 한국경제신문 경제교육연구소 연구위원 o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