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82''7942''1010235'…. 이들 숫자에 담긴 비밀은?

'빨리빨리''친구사이''열렬히사모' 이런 것들이다.

숫자는 이처럼 요술을 부려 새롭게 쓰이곤 했다.

한때 이런 문자들의 사용을 유행처럼 번지게 한 기기가 있었다.

바로 '삐삐'다.

1982년 무선호출 서비스가 시작되면서 세상에 나온 삐삐는 초기에는 제법 고가였기 때문에 '끗발 있는' 사람들의 상징이었다.

그러다 1990년대 들어 대중화하더니 1997년에는 가입자가 1500만 명을 넘어서 전성기를 구가했다.

물론 이후 휴대폰에 밀려 지금은 소수의 사람들 사이에서만 이용되고 있지만 마니아층은 오히려 늘고 있다고 한다.

1990년대 삐삐의 보급이 증가하자 당연히 그 말도 연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러자 일각에서 '삐삐'란 말의 정체를 두고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요지는 '삐삐'가 임의로 만들어 쓰는 속어이며 이를 가리키는 정확한 말은 '비퍼(beeper)'나 '페이저(pager)'라는 지적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당시에도 삐삐를 뜻하는 공식적인 용어는 '무선호출기'였다.

삐삐는 무선호출기를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부르던 말이다.

페이저나 비퍼를 제시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어차피 새로 도입되는 말인 만큼 정확한 말을 써야 한다는 게 요지였다.

'삐삐'는 본래 의성어로서 부사로 쓰이던 말이 무선호출기의 신호음과 비슷해 명사로 전성된 경우다.

삐삐란 말 자체의 간결함과 그 말 속에 담긴 독특한 어감으로 인해 '무선호출기'란 말을 제치고 언중의 사랑을 받았다.

상품으로서의 위력은 사라졌어도 그 말은 여전히 살아 있는 셈이다.

북한에선 이를 '주머니종'이라고 부른다.

시인이자 우리말 연구가인 우재욱 선생은 몇 년 전 '삐삐'란 말을 당시 만들어진 순우리말 중 가장 돋보이는 것으로 꼽은 적이 있다.

그는 이 말이 딱히 누구랄 것도 없이 대중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이라고 설명한다.

관계 기관이나 학술 단체 등에서 의미 중심으로 만들어 쓰기를 강요(?)하는 말보다는 대중에 의해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말이 훨씬 친근하고 피부에 와 닿는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는 삐삐와 함께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또 다른 말로 깜빡이를 들었다.

깜빡이는 자동차의 '방향지시등'을 달리 이르는 말이다.

이 말은 '깜빡+이'의 결합으로 이뤄졌는데, 어근인 '깜빡'의 작은 말로 '깜박'이란 게 있지만 파생어로는 '깜빡이'만 허용했다.

'깜박이'는 인정하지 않는다.

'-이'는 재떨이, 옷걸이, 목걸이, 딸랑이, 짝짝이 등처럼 일부 어근이나 의성어·의태어 뒤에 붙어 '도구' 따위를 나타내는 말을 만드는 접미사다.

'삐삐'나 '깜빡이'에는 말의 속성이 잘 담겨 있다.

그것은 말이란 위로부터 인위적으로 만들어져 제시되는 모범답안(무선호출기, 방향지시등)보다는 언중 사이에서 태어나 자연스럽게 익숙해지는 게 가장 좋은 것이라는 평범한 이치를 보여준다.

한국경제신문 오피니언부 기자 hymt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