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재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한국경제신문 3월27일자 A39면

종말론 사교(邪敎) 집단은 최후의 날이 올 것이라고 예견되었던 바로 그 날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해서 곧바로 문을 닫지는 않는다.

그럴듯한 이유를 꾸며내고 더욱 극적인 휴거의 날을 예견하면서 미지의 어느 시점으로 종말을 유예할 뿐이다.

국내 좌파 경제학자들의 수십년간의 행적을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지난 주말 서울 도심을 어지럽혔던 종말론적 깃발들도 마찬가지다.

50여년 경제개발 과정을 오로지 외자 종속의 길로 규정하고 투쟁해왔던 주체파 경제학자들은 최근의 현안인 한·미 FTA 협상을 앞두고도 일제히 반대 성명을 발표했었다.

서울대의 변형윤 명예교수를 비롯한 100명이 넘는 경제학자들은 어김없이 이 긴 명단에 또 이름을 올렸고….

단 한번도 종말의 그날을 제대로 맞추지 못했던 그들이다.

그러나 빗나간 예언들에 대해 과오를 시인하는 발언은 들어 본 적이 없다.

후안(厚顔)으로 따지자면 미몽을 헤매는 사이비 교주와 다를 바가 없다.

인생은 문제의 연속이며 현실에 허다한 약점이 있다고 해서 인생과 현실 전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문제와 약점'이 아닌 '인생과 현실' 자체를 부정해왔던 그들이다.

아시아 최빈국에서 국민소득 2만달러에 육박하도록 오로지 그 반대의 방법론만을 줄기차게 고집해왔다면 경제학과 종말 신학(神學)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서울대 상과대에서 변형윤 교수나 조순 교수 등의 가르침과 지도 아래 고속도로 건설 반대,창원 중화학 공단 반대 운동을 많이 했다.

자동차 공장도 안 된다고 했다.

기술 종속, 시장 종속, 결국은 종속 국가로 떨어진다는 설명을 들으면 명쾌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그때 포철을 안 만들고 중화학 공단을 안 만들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렇게 말한 사람은 한때의 운동권, 김문수 경기 지사다.

물론 경부 고속도로를 부자들의 유람로라고 주장하고 포철 설립을 놓고 외자 종속을 걱정할 수는 있을 것이다.

(아마 그들이 하자는 대로 했다면 필시 그리되었을 것이고….) 그러나 한두 번도 아니고 줄곧 반대로만 일관했다면 지금쯤은 반성문 한 장쯤은 내야 하는 것이 학자의 양심이다.

경제학의 용어를 빌려쓰는 그들의 저주와 주술(呪術)은 이렇게 구성되어 있다.

"공장 자동화에 반대한다.

과잉인구를 갖고 있는 저개발국에는 심각한 고용문제를 야기시킬 가능성이 크다.

자동화는 장기적으로 잘못된 방향이다."

"수출 증대보다는 수입 억제가 옳다."

"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 등에 대한 단기적인 연구를 통해 이들의 경제개발이 성공적이라고 하는 것은 성급한 일반화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국제 분업은 결코 저개발국에 유리한 결과를 초래한다고 할 수 없다.

교역 결과 저개발국으로부터 선진국으로 막대한 이윤이 유출되고 있다."

"성장 정책의 논리를 자립적 발전으로 수정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자립도가 제고될 때 한국 경제의 주체적 확립은 진행될 것이다.

대외 의존을 탈피하고 대내적으로는 평등정책이 추구되어야 한다."

"농업은 고용 흡수 효과가 크기 때문에 육성해야 한다.

인구 유출을 막고 도시인구의 역류도 가능하게 해야 한다."

위의 언명들은 소위 분배론자의 좌장격인 변형윤 교수의 '냉철한 머리 따뜻한 마음''분배의 경제학' 등 몇 권의 저서에서 눈에 들어오는 대로 한두 문장 따온 것이다.

반박할 필요조차 없는 흰소리라는 것은 현실이 증명하는 그대로다.

경제학과 도덕철학을 구분하지 못하는 자들이 학계의 일각을 버젓이 차지하고 있다.

자동화에 반대하는 것은 19세기 기계파괴 운동을 방불하고, 아시아 네마리 용을 비판하는 것은 아예 세계에 눈을 감자는 것이며, 자신이 두발을 딛고 있는 한국은 차치하더라도 오늘의 중국을 보고도 국제분업을 반대할 것인지 궁금하다.

농업 인구를 늘리자는 식의 주장에 이르면 차라리 쓴웃음이 절로 난다.

얼치기 좌파 50년의 뿌리는 의외로 넓고 또 깊다.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것은 언제나 지상에 천국을 만들자는 종교적 신념이 과도한 탓일 테다.

신학과 경제학을 더 이상 야바위하지 않기를….

생글생글 편집인 jkj@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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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의 철학'과 '긍정의 철학'

인간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바로 진보주의와 보수주의이다.

쉽게 말해 진보주의는 '고치고 살자'는 가치개념이다.

즉, 과거는 혁파해 나가야 할 대상이며, 과거를 뜯어고친 토대 위에 현재가 있고, 다시 현재를 부단히 개혁해야 미래가 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진보주의자들은 부단히 과거사 청산, 기득권 청산을 주장한다.

이같은 진보 개념에 대한 댓구로, 보수주의는 '살면서 고치자'로 요약된다.

과거에서도 배울 게 많고, 현재는 과거의 거울이며, 미래의 좌표는 현재를 개선해 나가는 데서 찾을 수 있다는 관점이다.

과거사보다는 현실의 문제를 직시하고, 과거 부정이 아니라 미래로 이어지도록 개선해 나가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런 시각차를 사자성어로 표현하면 진보는 환골탈태(換骨奪胎)요, 보수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이다. 철학적 배경에서 보면 진보는 '부정의 철학', 보수는 '긍정의 철학'이라 할 수 있다.

정규재 논설위원(생글생글 편집인)은 이 다산칼럼에서 우리나라 진보 경제학계의 좌장 격인 변형윤 서울대 명예교수를 실명을 들어 신랄하게 비판한다.

변 교수가 평생 쏟아낸 한국 경제에 대한 빗나간 진단과 독설들이, 실제 현실에선 얼마나 다른 결과로 나타났는지를 조목조목 비교한 것이다.

변 교수의 저서에서 인용된 제언들은 공장자동화를 반대하고, 수출지향 등 개방경제보다 농업을 위시한 자립경제를 강조하며, 국제 분업(무역)이 가져다줄 호혜적인 이익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분명히 사용하는 언어는 경제학 용어인데, 담고 있는 내용은 한결같이 현실 경제와 동떨어진 것이라는 이야기다.

변 교수를 위시한 일군의 진보 경제학자들은 일제 식민지, 분단, 개발독재로 이어진 한국의 근현대사를 외세, 재벌, 군사정권 등에 의해 좌지우지되어온 신식민지 독점 자본주의로 규정한다.

박정희 정권을 인정할 수 없기에, 그 시절 경부고속도로와 포항제철이 가져온 엄청난 경제적 파급효과도 인정하지 않는다.

이는 1970년대 남미를 풍미했던 종속이론적 관점과 맥을 같이 한다.

한국과 같은 저개발국은 경제가 발전할수록 선진국에 종속되는 구조라는 주장이다.

그러니 오늘의 한미 FTA도 그들에게는 미국에 대한 종속의 길로만 보이는 모양이다.

과연 그럴까? 만약 그들이 맞다면 경부고속도로가 가져온 물류혁명, 포철과 중화학단지 건립에 따른 산업화, 자동차·반도체·IT(정보기술)로 이어지는 산업고도화는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아직도 농업 중심의 자립경제를 지향해야 한다고 보는지….

보릿고개를 근근히 넘겨야 했던, 세계에서 가장 가난했던 나라가 수출로 일어서 40여년만에 기적에 가까운 경제성장을 이뤄냈다.

세계가 이를 인정하고 배우려는데, 그들은 애써 눈감고 그늘진 곳만 보려 한다.

자신의 가설과 이론이 틀렸다면 이를 인정하고 수정하는 것이 학자의 기본 양심이다.

학자라면 단 한 장의 반성문을 썼어야 하지 않느냐고 이 칼럼은 추궁하고 있다.

오형규 한국경제신문 경제교육연구소 연구위원 o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