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광 현 <한국경제신문 IT부장>
'철수는 바보 똥개'.국민학생(초등학생) 시절 학교 담벼락엔 이런 류의 낙서가 많았다.
아마 괴롭힘을 당한 꼬마가 이렇게라도 대항하고 싶어서 몰래 썼을 것이다.
화장실 문 안쪽엔 '철수는 영희를 좋아한다네' 식의 낙서도 참 많았다.
중학교 화장실엔 'WXY 낙서'(여자 나체를 그린 음란 낙서')가 왜 그렇게 많았는지….
인터넷에서 '악플'(악의적 댓글)을 보면 어린 시절 화장실 낙서가 떠오른다.
요즘 기준으로 보면 '똥개'라고 낙서한 꼬마나 'WXY'를 그린 사춘기 학생은 순진한 편이다.
'기자양반 맞춤법이 틀렸잖아', '이것도 기사라고 썼냐'는 식의 댓글도 애교로 봐줄 만하다.
그러나 특정인을 죽음으로 내모는 악플을 보면 화가 치민다.
실제로 가수 유니와 탤런트 정다빈은 자살 직전 악플에 시달렸다고 한다.
마침내 7월부터 '제한적 본인확인제', 이른바 인터넷 실명제가 시행된다.
정보통신부는 제도 도입을 위해 정보통신망법을 고치고 시행령과 시행규칙 개정안을 마련했다.
적용 대상은 하루 방문자 30만명 이상인 인터넷 포털과 20만명 이상인 언론 사이트다.
작년 말 법령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할 때 대상을 '10만명 이상'으로 잡았던 데 비하면 약해지긴 했지만 악플에 대응할 법적 근거는 마련됐다.
2년 전 정통부 장관이 인터넷실명제 도입을 거론했다가 네티즌들의 강한 반발에 부딪친 적이 있다.
당시엔 실명제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여론이 강했다.
이 바람에 '인터넷실명제'란 용어를 '본인확인제'로 바꾸기도 했다.
그 후 '연예인 X파일', '개똥녀 사건' 등이 터지면서 실명제에 대한 거부감이 많이 누그러졌다.
이어 악플에 시달린 연예인이 자살하는 사건까지 터지자 공감대는 더욱 커졌다.
인터넷에서 비방이 난무할 소지가 있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인터넷 실명제를 도입한 것은 반길 일이다.
제한적이긴 하지만 실명제가 도입되면 악플이 눈에 띄게 줄 것이다.
하지만 제도 도입은 첫걸음에 불과하다.
제도 도입 후에도 악플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인터넷실명제는 완벽한 대안이 아니다.
허점도 눈에 띈다.
가령 악플러(악플 다는 네티즌)가 작심하면 추적을 피할 수 있다.
해킹으로 알아낸 타인 계정(아이디, 패스워드)으로 PC방에서 접속하면 범인을 찾아내기 어렵다.
게다가 인터넷 포털에 가명이나 차명으로 가입한 회원이 적지 않다.
'악플 풍선효과'도 예상된다.
대형 사이트를 단속하면 중소 사이트에서 악플이 늘 수 있다.
인터넷의 순기능을 중시하는 이들은 댓글을 '개인의 경험이 합쳐진 집단지성'이라고 말한다.
각 분야 전문가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하게 하는 것이 국가적으로 이롭다는 얘기다.
인터넷은 여론을 실시간으로 수렴하는 '아고라'(고대 그리스의 광장)이기도 하다.
인터넷 게시판을 아예 없애는 게 낫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교통사고가 많다는 이유로 고속도로를 폐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댓글의 순기능을 살리고 역기능을 줄이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인터넷 실명제 도입으로 끝날 일이 아니다.
전문가들은 유치원 때부터 인터넷 문화를 가르쳐야 한다고 지적한다.
악플이 사람을 죽일 수 있고 악플러는 살인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자신도 언젠가 악플 공격을 당할 수 있다는 점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인터넷 실명제 도입을 계기로 자살하는 연예인이 더이상 생겨나지 않길 기대한다.
⇒ 한국경제신문 2월 26일자 A3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