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CEO 나의 청춘 나의 삶] (25) 최수부 광동제약 회장
최수부 광동제약 회장(71)은 제약업계의 수많은 창업자들 중에서도 특히 고생을 많이 한 전형적인 자수성가형 기업인이다. 최 회장은 일본에서 태어나 소학교 시절 같은 반 친구들로부터 '조센징'이라는 이유로 집단 따돌림을 받기도 했고,열두 살 때는 사실상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게 돼 도둑질 빼고는 안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고생을 했다. 또 군부독재 시절에는 탈세범으로 몰려 억울한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최 회장은 그러나 이 같은 고생들이 있었기에 그는 비즈니스에 대한 감각과 열정을 키울 수 있었고,이는 결국 광동제약을 국내 유수의 제약회사로 키우는 밑거름이 됐다고 회고한다.

최 회장의 고난은 일본에서부터 시작됐다.

"부모님 두 분 모두 일제시대 때 어린 나이에 돈벌러 일본으로 건너갔어요. 그 곳에서 만나 결혼 한 뒤 절 낳으셨죠. 태어났을 때는 아버지 사업이 번창해 제법 부유했어요. 그런데 학교에서는 부모님의 위세가 전혀 안 통했어요. 일본인 친구들에게 저는 '조센징'에 지나지 않았던 거죠. 학교에 다니는 동안 엄청나게 '이지메(집단 따돌림)'를 당했죠."

최 회장은 반 친구들의 괴롭힘을 묵묵히 견뎌냈다. 그러나 3학년에 올라가자 그동안 참아오던 분노가 폭발하고야 말았다. 반 친구들이 최 회장의 아버지까지 '조센징'이라고 놀려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당시 아버지께서 운영하던 공장 공터에서는 종업원들이 검도를 하곤 했는데 거기서 소가죽으로 만든 단단한 검도 호신도구를 주워 얇게 갈아 가방에 넣었어요. 결전의 순간은 금방 왔어요. 다음 날 학교로 가니 대여섯 명이 시비를 걸어왔으니깐. 미리 준비해간 '비장의' 무기를 꺼내 닥치는 대로 때렸어요. 불과 몇 분 사이에 아이들은 하나 둘 피투성이가 돼 쓰러졌죠."

이 사건 때문에 최 회장은 그날로 학교에서 퇴학을 당하고 말았다. 학교에 대해선 아무련 미련도 없었다. 최 회장은 8.15 해방 이듬해인 1946년 한국으로 건너온다.

"해방이 되고 한국으로 와 대구 달성 근처 화원소학교라는 곳에 3학년으로 편입했어요. 그런데 이게 또 웬일인가 하는 일이 생겼죠. 이번에는 아이들이 나더러 '쪽발이'라고 놀리며 괴롭히는 겁니다. 그 때 한국말을 제대로 할 줄 몰랐거든요. 봄 방학을 마치고 방학 중에 있었던 일을 발표하는 시간이었는데,내가 '지는 어무이 따라 친정에 가서 보리타작을 도왔심니더'라고 더듬거리며 얘기했더니 교실 안이 온통 웃음 바다가 돼 버렸어요. 담임선생님께서 웃으시며 '수부야,친정은 시집간 여자한테나 있는거지,너한테는 친정이 아니라 외갓집이야'라고 고쳐 주시더라구요."

최 회장은 그러나 한국에서는 일본에서와 같은 폭력 사태는 없었다고 한다. 최 회장이 열두 살 되던 해 결정적 고난이 닥치게 된다. 새 사업을 준비하던 아버지가 사기를 당해 가진 돈을 몽땅 날린 뒤 아무 일도 못하게 되자,최 회장이 가족들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그는 "당시 열두 살밖에 안됐지만 어떻게든 가족들을 먹여 살려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고 회고했다.

처음에는 지게에다 땔감을 져다 팔았다. 밑천 한 푼 없는 상태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것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 후로 돈 되는 건 뭐든 만들어 팔았다. 엿을 만들어 팔기도 했고,담배를 말아서 팔기도 했고,찐빵을 만들어 팔기도 했다. 당시 최 회장이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일화가 있다.

"땔감을 지게로 팔던 시절이었죠. 그 전날 쌓인 피로 탓에 시체처럼 엎드려 자다가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는데 어쩐 일인지 뺨이 바닥에 붙어 꿈쩍도 않는 거예요. 마치 귀신에 홀린 것 같았는데. 알고보니 밤새 흘린 코피가 얼어붙으면서 제 오른쪽 뺨 전체가 방바닥 장판에 붙은 겁니다. 어머니께서 부랴부랴 물을 데워 20~30분간 녹인 후에야 일어날 수 있었죠. 그때 거울을 보니 사람 얼굴이 아니다 싶더라구요."

시장에서의 각종 장사일을 통해 생계를 꾸리던 최 회장이 제약회사와 인연을 맺게 된 건 다소 우연에 가깝다.

"1960년 봄 어느날 한 사람이 동생에게 취직자리를 구해주는 대가로 얼마간의 경비를 요구했어요. 취직하기가 하늘에 별따기인 시절이라 있는 없는 돈 다 끌어다 마련해 줬죠. 며칠 뒤 그 사람은 제약회사 외판원 자리를 들고 나타났어요. 그런데 선천적으로 수줍음이 많은 동생은 고민 끝에 거절해 결국 내가 그 회사에 불쑥 취직하겠다고 했지요."

취직 알선비로 이미 돈이 나간 게 아깝기도 했지만,본인만 부지런히 약을 팔면 수당을 많이 받을 수 있다는 말에 귀가 솔깃했다는 게 최 회장의 설명이다.

비록 초등학교 중퇴 학력밖에 없었지만 최 회장은 제약회사 외판원이 된 뒤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열두 살 때부터 장사를 해온 터라 물건을 파는 데는 누구보다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최 회장은 입사 후 3년간 '판매왕' 자리를 한번도 놓치지 않았다. 때문에 그는 회사 내 다른 모든 사원들의 수당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수당을 받았다. 외판원 시절에는 온갖 일화도 많았다. 당시 우리나라 관료 중 가장 막강한 권력을 가졌다는 평가를 받는 재무부 이재국장 사무실로 쳐들어가 약을 팔기도 하고,상임위원회가 열리고 있는 국회 회의실을 찾아가 잠깐 휴식시간을 틈타 국회의원들을 대상으로 약을 팔았다.

제약회사 외판원으로 이름을 날리던 최 회장은 1963년 광동제약을 설립했다. 동기는 아주 간단했다. 남이 만든 약을 팔기만 하는 것보다 직접 만들어 파는 게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최 회장은 광동제약 설립 후 '한방의 과학화'를 기치로 내걸고 '경옥고''편자환' 등을 제조해 판매하면서 꾸준히 회사를 키워나갔다. 그러나 광동제약을 운영하는 것 역시 순탄치만은 않았다. 1965년에는 회사 총무부장이 약사 명의 변경에 써야 할 돈을 자신이 사귀던 술집 아가씨의 낙태 수술비로 써버리는 바람에 회사 허가가 취소된 어처구니 없는 사태가 벌어졌다. 또 1977년에는 광동제약에 앙심을 품은 국회의원 보좌관 출신 인사의 음해로 탈세범으로 몰려 억울한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광동제약은 라이벌 기업인 조선무약과의 과당 경쟁의 여파로 1998년 부도의 아픔을 겪게 된다. 그러나 임직원들의 단합된 힘으로 부도를 극복했고,2001년 출시한 마시는 비타민 음료 '비타500'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새로운 성장의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최 회장은 "앞으로 광동제약은 신약 개발 등을 통해 전문 치료제 쪽을 보완하는 한편,한방 과학화에 걸맞은 신제품을 꾸준히 내놓을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김동윤 한국경제신문 과학벤처중기부 기자 oasis93@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