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신문 1월 30일자 A39면
석유 식량 광물 등 자원이 머지않아 완전 고갈될 것이라는 끊임 없는 주장에 분통을 터뜨린 사람은 미국의 경제학자 줄리언 사이먼이었다.
그는 "1년 후에 천연자원 가격이 올라가 있다면 누구에게든 1만달러를 주겠다. 품목은 마음대로 정해도 좋다"며 도발적인 내기를 걸었는데 그때가 1980년이었다. 저명한 환경주의자였던 스탠퍼드 대학의 존 하르트,존 홀랜드 교수 등은 "이 좋은 기회를 놓칠세랴"며 도전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크롬 니켈 주석 텅스텐을 선택해 10년 기간으로 진짜 내기를 걸었고….
10년이 지난 1990년이 되었을 때 이들 품목의 물가 수정 가격은 놀랍게도 큰 폭으로 떨어져 있었다. 소위 자원 한계론자들의 참담한 패배였다.
석유에 대해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유가는 역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던 작년 8월의 가격조차 물가를 감안하면 무려 25년 전인 1982년 가격을 아직 밑돌고 있다. 그것 또한 달러 약세의 반사물일 뿐 고갈의 결과는 결코 아니다. 그러니 지구 종말을 애써 과장할 필요는 없다. 인간은 언젠가는 죽지만 그 때문에 당장 호들갑을 떨지 않는 것과 같다.
물론 석유도 언젠가는 고갈될 것이다. 그러나 그 때문에 석유시대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지구상에 돌멩이가 고갈되었기 때문에 석기 시대가 막을 내린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과 다를 게 없다. 언젠가 더욱 싸고 좋은 에너지가 일상화되면서 석유시대는 끝날 것이다.
이미 태양과 바람과 수소가 순서를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자원 고갈론으로 막을 올린 소위 환경 이데올로기가 과학을 벗어나 교조화되기 시작한 것은 1968년의 '로마클럽 보고서'부터였다. 이때 일군의 좌파 학자들은 환경 재앙과 자원 고갈로 지구 종말이 임박했다고 설교하기 시작했다. 환경문제를 앞세운 문명에 대한 저주였던 셈이다.
처음에는 성장의 한계라는 말이 쓰였으나 점차 지구 종말로 단어가 교체됐고 갈수록 급진화하고 있다. 종말론은 공산주의가 기독교에서 어설피 도용한 괴이쩍은 단어의 하나지만 환경론자들의 고유어가 된 지도 오래다. 너무도 뻔한 휴거론이 유령처럼 배회하고 있다. "표토는 침식되고 하천은 말라가며 자연의 균형은 피괴되고 인간은 지구를 더럽히고 있다"는 것이 사이비 종말 신학의 신앙고백이다. 한마디로 인간은 죄를 짓고 있고 지구는 죽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일체의 개발은 시급히 중단돼야 마땅하고 인간은 하루빨리 생태주의로 돌아가야 하며,아니면 최후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게 환경급진론의 골자다.
도룡뇽 한 마리에 고속철도가 중단되고,새만금이 무기한 표류하며,해방구를 연상하는 전투적 환경운동가들의 투쟁에 막혀 원자력발전소 폐기물처리장조차 거부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강조하건대 가난한 나라의 강물이 깨끗한 것을 우리는 결코 본 적이 없다. 저개발이야말로 질병과 환경재앙의 동의어가 아니던가 말이다. 크롬 망간 비소 수은 아연 등 19개 금속류의 사용을 원천봉쇄해 놓은 '수질환경보전법' 시행령 19조도 그런 원리주의가 만들어 놓은 결과물이다.
"그러면 우리더러 중금속에 오염된 물을 마시라는 것이냐?"는 참여정부식 반어법의 하나면 그 어떤 개발도 좌초시킬 수 있는 것이 한국의 환경법이다.
바로 그 조항에 하이닉스가 걸려든 것이다.
음용수의 구리 허용치는 1ppm이다.
하이닉스는 허용치의 125분의 1인 0.008ppm까지 맞출 수 있다.
우리가 먹는 보통의 식품에도 1~3ppm은 들어있다는 것이 구리다.
구리 때문이라면 차라리 모든 먹거리를 거부해야 마땅하다.
반도체 회로 선폭을 80나노에서 50나노 이하로 줄이려면 알루미늄 아닌 구리를 써야 한다는 따위는 구차한 설명이다.
문제는 원천봉쇄냐 전면 허용이냐가 아니다.
농약이 대표적인 경우다.
농약을 전면금지하면 국민들의 건강은 오히려 크게 나빠질 것이 분명하다.
생산성 하락으로 턱없이 비싸진 채소를 보통의 국민들은 결코 먹을 수 없게 된다.
환경문제의 본질은 '예스, 노'의 양자택일이 아닌 적정 수치를 관리해가는 문제라는 말이다.
하이닉스 이천공장에서 세계적 기술의 반도체가 생산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정규재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ㆍ경제교육연구소장 jkj@hankyung.com
---------------------------------------------
환경문제는 " Yes or No" 이분법 아닌 '성장' '보호' 사이의 적절한 길 찾아야
종말론은 언제나 그럴싸하게 들린다. 대표적인 것이 성서를 제멋대로 해석한 일부 교회의 휴거론이었다.
실제로 1992년 10월 28일 휴거가 일어날 것을 주장했던 교회에는 수천명의 신도들이 모여 밤새 기도하는 장면이 TV에 생중계되기까지 했다.
하지만 아무 일 없었다. 한마디로 혹세무민이고, 종교의 이름을 빈 사기였던 것이다. 극단적인 환경보호주의 역시 과학의 이름을 빈 ‘사이비 종말론’이란 비판이 심도있게 제기되고 있다.
인간의 환경파괴로 인해 지구가 머지 않아 멸망할 것이라는 환경 종말론이 기본적인 환경상식처럼 주입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비외른 롬보르는 저서 『회의적 환경주의자』(생글생글 64호 커버스토리 참조)에서 입증하고 있다.인구가 늘어나고 국토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환경문제는 분명히 존재한다.
아무 것도 개발하지 않는데 비해선 공기도 나빠지고 하천도 오염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환경보호를 위해 개발을 중단해야 한다는 식의 대안 없는 주장에는 심각한 헛점도 있다.인간이 채집생활을 했던 석기시대로 돌아갈수는 없는 노릇이다.정규재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생글생글 발행인)은 이 문제를 보다 알기 쉽게 설명한다.
인간은 언젠가 죽지만 당장 죽을 것처럼 호들갑 떨지 않는 것처럼, 환경문제도 ‘신중하고 균형있게’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즉,사람이 건강에 신경쓰고, 음식을 가려 먹으며, 주변 환경을 청결히 하듯이 자연의 건강(환경) 문제도 종말론적 시각이 아니라 지속 가능하고,발전 가능한 방향으로 다뤄져야 한다는 이야기이다.인간사회는 인구 증가로 인해 필연적으로 식량,연료,주거,개발 등의 문제에 직면하게 마련이다.
들판을 뒤엎어 논·밭을 만들고,지하에서 석유를 캐내며,집을 짓기 위해 산을 밀어버리고,공장을 돌리느라 공해를 유발한다.자연 파괴를 막기 위해 이런 일들을 그냥 멈춘다면 어떤 결과가 벌어질 것인가.
그렇다면 어떻게 이 문제를 풀까? 정 위원은 하이닉스 이천공장 증설문제 같은 환경 논란에 접할 때 ‘Yes(전면 허용)냐,No(원천 봉쇄)냐’는 식의 이분법으론 문제가 풀릴 수 없음을 강조한다.
불가피한 경제성장과 환경보호 사이에서 적절하게 관리할 방법을 찾는 것이 정도(正道)라는 이야기다.
우리가 먹는 음식에도 중금속이 있지만, 이를 무조건 못먹게 막는다면 과연 무엇을 먹고 살 것인가.
현대문명사회에 살면서 환경을 위해 무조건 석유를 써선 안된다는 식의 무책임한 주장이 아니라 쓰긴 쓰되 어떻게 덜 쓸지,친환경 대체에너지를 늘려갈지 머리를 맞대는 게 ‘대안 있는 환경운동’의 길이 아닐까?
오형규 한국경제신문 경제교육연구소 연구위원 ohk@hankyung.com
석유 식량 광물 등 자원이 머지않아 완전 고갈될 것이라는 끊임 없는 주장에 분통을 터뜨린 사람은 미국의 경제학자 줄리언 사이먼이었다.
그는 "1년 후에 천연자원 가격이 올라가 있다면 누구에게든 1만달러를 주겠다. 품목은 마음대로 정해도 좋다"며 도발적인 내기를 걸었는데 그때가 1980년이었다. 저명한 환경주의자였던 스탠퍼드 대학의 존 하르트,존 홀랜드 교수 등은 "이 좋은 기회를 놓칠세랴"며 도전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크롬 니켈 주석 텅스텐을 선택해 10년 기간으로 진짜 내기를 걸었고….
10년이 지난 1990년이 되었을 때 이들 품목의 물가 수정 가격은 놀랍게도 큰 폭으로 떨어져 있었다. 소위 자원 한계론자들의 참담한 패배였다.
석유에 대해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유가는 역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던 작년 8월의 가격조차 물가를 감안하면 무려 25년 전인 1982년 가격을 아직 밑돌고 있다. 그것 또한 달러 약세의 반사물일 뿐 고갈의 결과는 결코 아니다. 그러니 지구 종말을 애써 과장할 필요는 없다. 인간은 언젠가는 죽지만 그 때문에 당장 호들갑을 떨지 않는 것과 같다.
물론 석유도 언젠가는 고갈될 것이다. 그러나 그 때문에 석유시대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지구상에 돌멩이가 고갈되었기 때문에 석기 시대가 막을 내린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과 다를 게 없다. 언젠가 더욱 싸고 좋은 에너지가 일상화되면서 석유시대는 끝날 것이다.
이미 태양과 바람과 수소가 순서를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자원 고갈론으로 막을 올린 소위 환경 이데올로기가 과학을 벗어나 교조화되기 시작한 것은 1968년의 '로마클럽 보고서'부터였다. 이때 일군의 좌파 학자들은 환경 재앙과 자원 고갈로 지구 종말이 임박했다고 설교하기 시작했다. 환경문제를 앞세운 문명에 대한 저주였던 셈이다.
처음에는 성장의 한계라는 말이 쓰였으나 점차 지구 종말로 단어가 교체됐고 갈수록 급진화하고 있다. 종말론은 공산주의가 기독교에서 어설피 도용한 괴이쩍은 단어의 하나지만 환경론자들의 고유어가 된 지도 오래다. 너무도 뻔한 휴거론이 유령처럼 배회하고 있다. "표토는 침식되고 하천은 말라가며 자연의 균형은 피괴되고 인간은 지구를 더럽히고 있다"는 것이 사이비 종말 신학의 신앙고백이다. 한마디로 인간은 죄를 짓고 있고 지구는 죽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일체의 개발은 시급히 중단돼야 마땅하고 인간은 하루빨리 생태주의로 돌아가야 하며,아니면 최후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게 환경급진론의 골자다.
도룡뇽 한 마리에 고속철도가 중단되고,새만금이 무기한 표류하며,해방구를 연상하는 전투적 환경운동가들의 투쟁에 막혀 원자력발전소 폐기물처리장조차 거부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강조하건대 가난한 나라의 강물이 깨끗한 것을 우리는 결코 본 적이 없다. 저개발이야말로 질병과 환경재앙의 동의어가 아니던가 말이다. 크롬 망간 비소 수은 아연 등 19개 금속류의 사용을 원천봉쇄해 놓은 '수질환경보전법' 시행령 19조도 그런 원리주의가 만들어 놓은 결과물이다.
"그러면 우리더러 중금속에 오염된 물을 마시라는 것이냐?"는 참여정부식 반어법의 하나면 그 어떤 개발도 좌초시킬 수 있는 것이 한국의 환경법이다.
바로 그 조항에 하이닉스가 걸려든 것이다.
음용수의 구리 허용치는 1ppm이다.
하이닉스는 허용치의 125분의 1인 0.008ppm까지 맞출 수 있다.
우리가 먹는 보통의 식품에도 1~3ppm은 들어있다는 것이 구리다.
구리 때문이라면 차라리 모든 먹거리를 거부해야 마땅하다.
반도체 회로 선폭을 80나노에서 50나노 이하로 줄이려면 알루미늄 아닌 구리를 써야 한다는 따위는 구차한 설명이다.
문제는 원천봉쇄냐 전면 허용이냐가 아니다.
농약이 대표적인 경우다.
농약을 전면금지하면 국민들의 건강은 오히려 크게 나빠질 것이 분명하다.
생산성 하락으로 턱없이 비싸진 채소를 보통의 국민들은 결코 먹을 수 없게 된다.
환경문제의 본질은 '예스, 노'의 양자택일이 아닌 적정 수치를 관리해가는 문제라는 말이다.
하이닉스 이천공장에서 세계적 기술의 반도체가 생산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정규재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ㆍ경제교육연구소장 jkj@hankyung.com
---------------------------------------------
환경문제는 " Yes or No" 이분법 아닌 '성장' '보호' 사이의 적절한 길 찾아야
종말론은 언제나 그럴싸하게 들린다. 대표적인 것이 성서를 제멋대로 해석한 일부 교회의 휴거론이었다.
실제로 1992년 10월 28일 휴거가 일어날 것을 주장했던 교회에는 수천명의 신도들이 모여 밤새 기도하는 장면이 TV에 생중계되기까지 했다.
하지만 아무 일 없었다. 한마디로 혹세무민이고, 종교의 이름을 빈 사기였던 것이다. 극단적인 환경보호주의 역시 과학의 이름을 빈 ‘사이비 종말론’이란 비판이 심도있게 제기되고 있다.
인간의 환경파괴로 인해 지구가 머지 않아 멸망할 것이라는 환경 종말론이 기본적인 환경상식처럼 주입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비외른 롬보르는 저서 『회의적 환경주의자』(생글생글 64호 커버스토리 참조)에서 입증하고 있다.인구가 늘어나고 국토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환경문제는 분명히 존재한다.
아무 것도 개발하지 않는데 비해선 공기도 나빠지고 하천도 오염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환경보호를 위해 개발을 중단해야 한다는 식의 대안 없는 주장에는 심각한 헛점도 있다.인간이 채집생활을 했던 석기시대로 돌아갈수는 없는 노릇이다.정규재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생글생글 발행인)은 이 문제를 보다 알기 쉽게 설명한다.
인간은 언젠가 죽지만 당장 죽을 것처럼 호들갑 떨지 않는 것처럼, 환경문제도 ‘신중하고 균형있게’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즉,사람이 건강에 신경쓰고, 음식을 가려 먹으며, 주변 환경을 청결히 하듯이 자연의 건강(환경) 문제도 종말론적 시각이 아니라 지속 가능하고,발전 가능한 방향으로 다뤄져야 한다는 이야기이다.인간사회는 인구 증가로 인해 필연적으로 식량,연료,주거,개발 등의 문제에 직면하게 마련이다.
들판을 뒤엎어 논·밭을 만들고,지하에서 석유를 캐내며,집을 짓기 위해 산을 밀어버리고,공장을 돌리느라 공해를 유발한다.자연 파괴를 막기 위해 이런 일들을 그냥 멈춘다면 어떤 결과가 벌어질 것인가.
그렇다면 어떻게 이 문제를 풀까? 정 위원은 하이닉스 이천공장 증설문제 같은 환경 논란에 접할 때 ‘Yes(전면 허용)냐,No(원천 봉쇄)냐’는 식의 이분법으론 문제가 풀릴 수 없음을 강조한다.
불가피한 경제성장과 환경보호 사이에서 적절하게 관리할 방법을 찾는 것이 정도(正道)라는 이야기다.
우리가 먹는 음식에도 중금속이 있지만, 이를 무조건 못먹게 막는다면 과연 무엇을 먹고 살 것인가.
현대문명사회에 살면서 환경을 위해 무조건 석유를 써선 안된다는 식의 무책임한 주장이 아니라 쓰긴 쓰되 어떻게 덜 쓸지,친환경 대체에너지를 늘려갈지 머리를 맞대는 게 ‘대안 있는 환경운동’의 길이 아닐까?
오형규 한국경제신문 경제교육연구소 연구위원 o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