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CEO 나의 청춘 나의 삶] (23) 남상태 대우조선해양 사장
"내가 키울수 있는 중소기업에 가자"


1976년 2학기가 막 시작된 9월께.연세대학교 경제학과 졸업반의 한 대학생이 직장 선택을 놓고 고민하고 있었다.

그의 친구들은 거의 월급도 많고 남들로부터 부러움도 사는 대기업 취업을 희망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학생의 생각은 달랐다.

'언젠가 내 사업,그것도 제조업을 해 봐야겠다.

그러려면 직장 생활 초창기에 일을 빨리 많이 배워야 하는데,조직이 잘 갖춰진 대기업은 한계가 있을 것 같다.

차라리 유망한 중소기업에 가야겠다.'이 학생은 고민 끝에 당시까지만 해도 중소기업이었던 두산기계를 첫 직장으로 택해 그해 11월 입사했다.

남상태 대우조선해양 사장이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있던 시절의 얘기다.

그는 지금 대기업의 최고경영자(CEO)가 돼 있지만,사회생활은 이렇게 중소기업부터 시작했다.

학교에 다닐 때부터 그는 잘 짜여진 곳보다는 새로 확장하고 있는 기업이라야 발전 가능성이 높고,그곳에서라야 기회가 더 많이 주어질 것이라는 소신을 갖고 있었다.

그가 첫 직장 두산기계를 1년 만에 그만둔 것도 같은 이유다.

두산기계가 외자 도입 후 갑자기 커지자 그의 업무가 너무 좁은 분야에 국한됐기 때문이다.

남 사장은 두 번째로 대중공업이란 가스실린더를 제조하는 중소기업에 입사했다.

하지만 그곳의 오너 사장이 동생의 고등학교 동기동창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고 회사를 나왔다.

세 번째는 우정해운이라는 해운회사에 입사했다.

하지만 "해운회사 역시 '제조업 체질'인 나와 맞지 않아 매일 땡땡이만 치다 그만뒀다."

중소기업을 선호했던 그가 결국 대기업인 대우그룹에 입사한 데는 그의 큰 딸이 결정적 기여를 했다.

실직자가 된 바로 그날,첫 애가 한 달 정도 조산으로 태어났다고 한다.

"애를 낳아놓고 실직을 하니 마음이 조급해지더라고요.

때마침 대우와 삼성이 신입사원을 뽑고 있어 원서를 냈죠."

하지만 삼성보다 대우를 선택한 것은 '발전 가능성이 있는 중소기업에 가고 싶다'는 그의 잠재의식이 마지막으로 영향을 미친 결과다.

"당시만 해도 삼성보다는 대우가 신생기업이라 발전 가능성이 클 것으로 예상했죠.대우의 여러 계열사 중 대우조선에 온 것도 마찬가지예요.

당시 대우에서 가장 별 볼일 없는 데가 대우조선이었거든요.

그래서 선택했어요."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대기업인 대우조선해양에서 그가 맡은 업무는 자금.그는 작년 대우조선해양의 사장으로 진급하기까지 거의 30년 가까이 자금업무를 했다.

남 사장은 항상 돈 구하러 다니느라 바빴던 기억밖에 없다고 그의 회사 생활을 회고했다.

"옛날 대우조선은 자금사정이 좋은 날이 별로 없었어요.

하루에 단자회사(예전 투자금융회사)에서 몇 천억원씩 돈을 구한 적도 있어요.

1980년대까지는 하도 바빠 밤 10시까지 저녁 먹을 생각도 못했고요.

민주화 운동이 한창이던 1987년에는 돈 가방 들고 다니다 시위대로 오인돼 경찰서에 붙잡혀 간 적도 많아요.

서울 명동에 갔다가 전경들이 못 나오게 해 100억원짜리 어음을 보여 주고 빠져 나온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죠."

남 사장은 대우 입사 후 10년간 휴가를 못 가다가 11년 만인 1990년 가족들이랑 양평으로 첫 여름휴가를 다녀왔다고 한다.

하지만 휴가 첫날 그는 콘도에서 회사로 출근을 했다.

회사의 자금 사정이 너무 걱정돼서다.

1999년 남 사장과 그의 회사는 큰 위기에 빠졌다.

대우그룹 전체가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에 들어간 것.워크아웃 돌입 이후 남 사장은 자금과 구조조정 담당 임원을 겸직하게 됐다.

당시 그를 가장 많이 괴롭혔던 것은 소액주주들.채권단은 구조조정을 위해 옛 대우중공업을 나눠 지금의 대우조선해양과 대우종합기계(현 두산인프라코어)로 분할키로 했는데,소액주주들이 여기에 강력히 반발하면서 소송을 낸 것.

남 사장은 이렇게 회고했다.

"정말 절박했던 순간이었죠.소액주주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회사가 문을 닫아야 할 판이었어요.

그래서 소액주주 대표자들 집에 쌀 한 가마니,라면 한 박스 사들고 일일이 찾아다녔죠. 그렇게 간신히 해결했습니다."

이 같은 어려움과 위기를 극복하고 남 사장이 오늘날의 자리까지 올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일까.

그는 "아무리 어려워도 걱정을 안하고 어려울수록 힘이 난다.

어려움이 닥치면 회피하지 않고 정면돌파하겠다는 의지가 생긴다"며 "이런 나의 삶의 자세가 오늘날의 나를 만든 경쟁력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내가 이런 삶의 자세를 갖게 된 것은 자식들을 어려서부터 독립심을 갖도록 엄하게 키우셨던 아버지 때문인 것 같다"고 설명했다.

그의 부친은 고등고시 출신으로 서울시 부시장,수협 회장 등을 역임했던 고(故) 남문희씨다.

초등학교 4학년 때 그가 개집에서 잠을 잔 얘기는 그의 부친이 자식 교육을 얼마나 엄하게 했는지를 보여주는 유명한 일화다.

군수인 아버지를 쫓아 어린시절 이곳저곳 전학을 했던 남 사장은 초등학교 고학년이 시작되는 4학년 때 대구에서 혼자 하숙을 하게 된다.

"1959년인데 뇌염이 심하게 돌아 학교가 휴교를 했죠.휴교를 하니 어린 나이에 집이 너무 가고 싶더라고요.

당시 무작정 기차를 타고 경북 의성 집에 갔어요.

어머니는 무척 반가워하셨는데,아버지는 '옛날 같으면 가정을 책임질 나이에 부모 보고 싶다고 왔느냐'고 나무라시며 돌아가라는 거예요.

나중에 어머니 말로는 나는 결국 집에서 못자고 집에서 기르던 개집 속에 들어가 잤다고 하데요."

이런 엄한 아버지 밑에 있던 그의 학창시절은 어땠을까.

남 사장은 스스로 모범생은 아니었다고 평가한다.

그는 "고등학교 때 트럼펫을 불고 싶어 학교 밴드부 남자 선배들에게 '나 이쁜 누나 있다.

나중에 소개시켜주겠다'고 거짓말을 해 선배들의 트럼펫을 빌려 연습하다가 아버지께 걸려 신나게 두들겨 맞은 적도 있다"고 귀띔했다.

남 사장의 고등학교 시절에는 우열반이 있었다.

그는 공부를 못하는 학생들이 가는 열반에 속했다고 한다.

남 사장은 "열반을 우리 때는 '돌반'이라고 불렀다"며 "나도 돌반 출신"이라고 말했다.

그는 대학 입시에서 떨어져 재수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학교 성적과 사회에서의 성공은 정비례하지 않는다는 게 그의 소신이다.

학교 때 성적이 아니라 사회에 나와서 자기가 어떻게 노력하느냐에 따라 사회에서 우반이 되거나 열반이 되는 거죠."

이상열 한국경제신문 산업부 기자 mustaf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