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CEO 나의 청춘 나의 삶] (22) 김승호 보령제약 회장
전국에 있는 수많은 약국 중 한국을 대표하는 약국 한 곳을 꼽으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울 종로5가에 있는 보령약국을 선택할 것이다.

1957년 문을 연 보령약국은 개업 5년 만에 국내 최대 규모의 약국으로 성장했다.

김승호 보령제약 회장(75)은 26살의 나이로 보령약국을 개업,보령제약으로까지 발전시킨 제약업계의 입지전적 인물로 통한다.

김 회장의 얘기를 들어보면 그가 약과 인연을 맺은 것이 숙명처럼 들린다.

충남 보령(보령약국이란 상호도 고향 지명에서 딴 것)에서 태어난 김 회장은 아버지가 양조장을 운영한 덕분에 어린 시절을 유복하게 보냈다.

그러나 양조장 사업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이에 김 회장의 큰 형은 동네에 대창약국이라는 조그마한 약국을 개업했다.

"그때는 학교가 끝나면 매일 약국에 가서 살다시피 했어요.

진열대에 놓인 각양각색의 약이 어찌나 신기하던지."

한 번 맺어진 인연은 계속 이어졌다.

김 회장은 초등학교 졸업 후 서울 숭문학교에 입학,상경하게 됐는데 그때 거처로 정한 곳도 친척 형이 운영하던 약국 2층의 다다미 방이었다.

나중에 백제약국으로 유명해진 종로5가의 홍성약국이 바로 그곳이다.

김 회장은 "대창약국이 약에 대한 호기심을 일깨워줬다면 홍성약국은 약의 의미를 접하게 해준 곳이었다"고 회상했다.

어린 시절부터 약과 친해졌기 때문일까,김 회장은 1957년 봄 군대에서 제대한 뒤 약국 개업을 결심했다.

"일단 약국을 열기로 마음을 먹긴 했지만 변변한 경험도 자본금도 없는 상태였어요.

가진 것이라곤 군대에서 모은 돈으로 근근이 마련한 서울 돈암동 집 한 채가 전부였어요.

결혼한 지 채 1년이 안된 아내를 설득해 돈암동 신혼집을 팔아 300만환을 마련했죠."

김 회장은 300만환을 손에 쥐고 서울 시내 목좋은 곳을 찾아 다녔다.

그러다 우연히 종로5가의 허름한 문방구에 시선이 멈췄다.

낡고 볼품없는 건물이었지만 약국 자리로는 그만한 곳이 없다 싶었다.

김 회장의 예상은 적중했다.

보령약국은 개업한 지 5년 만에 국내 최대 규모 약국으로 성장했다.

한때는 '종로5가를 지나는 행인 다섯 중 한 명은 보령약국 손님'이란 얘기가 나올 정도였다.

보령약국이 이처럼 대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김 회장 특유의 부지런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엔 도매상들이 약 유통시장을 독점하고 있었어요.

소매약국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철저한 서비스 정신으로 무장해야겠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었어요.

제약회사에 현금을 주고 들여오는 방식으로 가격을 낮추고,혹 손님이 찾는 약이 우리 약국에 없으면 자전거를 타고 온 시내를 뒤져서라도 반드시 구해줬지요.

이런 자세로 고집스럽게 몇 달 하자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김 회장은 그러나 보령약국의 성공에 만족하지 않았다.

전국 대부분 약국이 사정이 어려웠던 1962년,김 회장은 "남이 만든 약을 파는 것에 그칠 것이 아니라 직접 만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고,즉각 보령제약 창업에 나섰다.

당시 김 회장의 나이 서른한 살이었다.

보령제약의 경영 역시 출발부터 쉽지 않았다.

회사 사무실은 보령약국 가까이에 마련했는데 문제는 공장이었다.

변변한 제품도 갖지 못한 상태에서 무리하게 시설투자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고민 끝에 연지동에 있는 집에 생산시설을 마련했다.

가정집에 공장을 차리다니.요즘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김 회장은 "비록 좁은 집에 보잘것 없는 설비를 갖춘 것에 불과했지만 그해 겨울 난 누구보다 행복했다"고 회고했다.

보령제약을 오늘날과 같은 중견 제약사로 도약시킨 것은 용각산이다.

창업 10년 만인 1967년 내놓은 용각산은 '이소리가 아닙니다'로 시작하는 광고가 대히트를 하면서 불티나게 팔렸다.

용각산 광고는 지금까지도 한국 광고사에 길이 남을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김 회장은 이 광고를 만들기 위해 무려 서른 개 정도의 후보작을 올려놓고 보름가량을 고민했다고 한다.

보령제약은 올해로 창업 50주년(1957년 보령약국 창업을 기준으로 삼음)을 맞았다.

역사가 길다 보니 크고 작은 어려움도 많았다.

김 회장은 보령제약을 경영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순간으로 1977년 안양공장 수해 사건을 꼽는다.

"당시 안양공장은 신축한 지 3년밖에 안됐는데 30년 만에 처음이라는 기록적인 폭우로 큰 피해를 입었어요.

값 비싼 생산시설과 제품들은 천장까지 휩쓸고 간 흙탕물로 진흙범벅이었고,전 생산라인이 윗부분만 겨우 보일 정도로 침수됐죠."

김 회장은 그러나 낙담하지 않았다.

당연히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고 복구에 나섰다.

"그냥 주저앉을 수는 없었죠.200여명의 사원들 앞에서 '우리는 반드시 재기한다'고 강조했어요.

다행히 직원들뿐 아니라 정부 협력업체 등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재기에 성공했어요.

당시 일부 도매상들은 선금을 주고 약품을 매입하는 방식으로 도움을 줬죠.실로 목이 메이는 감동을 느꼈어요."

보령제약은 용각산뿐 아니라 겔포스 등 많은 히트 약품을 보유하고 있다.

회사 제품들에 대한 김 회장의 마음은 흡사 자식에 대한 사랑을 방불케 한다.

때문에 "가장 애착이 가는 제품이 뭐냐"는 질문을 받으면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있나요"로 대답을 대신한다.

50년간 기업을 이끌어온 김 회장의 기업관은 어떨까.

그에게 기업은 곧 사람이다.

"사람을 가장 우선으로 생각하는 정신이 없으면 그 기업은 이미 생명을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기업의 생명력은 인간을 존중하고 귀하게 여기는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바로 이런 인간 존중 정신이 보령제약의 창업 철학이자 존재 이유입니다."

김 회장은 이 같은 인간 존중 정신은 사람의 병을 치유하고 생명을 살리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제약회사에는 더욱 중요하다고 늘 강조한다.

때문에 그는 틈만 나면 직원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한다.

"우리 회사에서 만드는 약을 널리 알리는 것을 단순히 제품을 판매하기 위한 것으로만 생각하지 마세요.

아픈 사람들이 우리 회사의 약을 몰라서 복용하지 못하는 것은 제약회사에 다니는 사람들이 마땅히 져야 할 의무를 소홀히 하기 때문에 생기는 일입니다.

생명을 사랑하고 위한다는 마음으로 약을 개발하고 팔아야 합니다."

김 회장은 올해로 일흔다섯에 접어들었지만 여전히 젊은 사람 못지 않은 건강을 과시하고 있다.

그는 "50주년을 맞이한 보령제약이 다가올 50년간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또 어떤 시스템을 갖춰야 보다 발전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게 지금 나에게 주어진 숙제"라고 말했다.

김동윤 한국경제신문 과학벤처중기부 기자 oasis93@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