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샹하귀쳔이 다보게 홈이라 … 아모라도 이신문 보기가 쉽고 신문속에 잇는 난말을 자세이 알어 보게 홈이라."
독립신문 창간호 사설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1896년 4월7일 첫 호를 냈으니 지금으로부터 꼭 111년 전 글이다.
민간인이 발행한 최초의 근대 신문인 독립신문의 창간은 신문에서는 처음으로 한글 전용과 띄어쓰기를 도입하는 등 우리 말글 역사에서도 획기적인 분수령을 이루는 '사건'이었다.
독립신문은 창간호에서 창간사격인 1면 '론셜(지금의 사설)'을 통해 한글 전용과 띄어쓰기 방침을 자세히 적고 있는데,그 까닭을 위와 같이 밝혔다.
1899년 12월4일자까지 발행하고 폐간된 독립신문에는 모두 네 편의 국어 관련 기사가 1면에 사설 또는 사설 형식으로 실려 있다.
한 편은 1897년 8월5일자에 정식으로 '론셜'이란 문패를 달고 있고,다른 한 편은 1899년 5월20일자에 '타국 글 아니라'란 제목으로 실렸다.
나머지 두 편은 주시경 선생이 쓴 것이다.
한글학자 주시경은 독립신문에서 논설을 제외하곤 지면 구성을 전적으로 책임졌는데,당시 그의 직함은 '교보원'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편집기자 겸 교열기자였던 셈이다.
주시경이 쓴 두 편은 1897년 4월22일,24일자와 1897년 9월25일,28일자에 각각 이틀에 걸쳐 나눠 실렸다.
이 두 편은 '배재학당 학생 주상호가 기고한 국문론임'을 글머리에 밝히고 있는 걸로 봐서 정식 사설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주상호는 주시경의 원명) 당시 독립신문은 1면에 '론셜'이란 이름으로 사설을 실었는데,주시경의 국문론이 실린 나흘치에는 '론셜'이 따로 없는 걸로 보아 주시경의 글로써 이를 갈음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의 기사를 살펴보면 우리 말글이 불과 100여년의 세월을 지나면서 얼마나 극심한 변화 과정을 거쳤는지 알 수 있다.
"쌀갑시 벼량간에 만히 올나 간다니 까닭이 잇난거시거니와 이런 일은 뎡부에셔 급히 규졍하여 주어야 주려 죽게 된 가난한 백셩들을 보호할 뜻 하더라."(독립신문,건양 원년 7월28일자(49호),잡보,건양은 고종 때의 연호로 건양 원년은 1896년이다)
"윤치명씨가 녀학도 리혜눌과 샹관이잇다함은 이미 게재하엿거니와 다시 드르즉 윤씨가 샹쳐하엿다 칭탁하고 리혜눌을 졍실노 뎡하겟다고 자긔집으로 다려갓난대 그부형의 엄금함을 인하여 행랑에 두엇다더라."(대한매일,1910년 4월7일,잡보)
100여년 전의 이 기사들은 비록 한글 전용임에도 불구하고 철자를 비롯해 맞춤법,어휘,문체 등에서 지금의 독자 눈에는 매우 생소하게 보일 것이다.
당연히 해독하기도 쉽지 않다.
더구나 '까닭'의 쌍기역(ㄲ)은 실제 원문에선 된시옷(ㅺ)으로 쓰였다.
당시 된소리 표기는 'ㄲ'은 'ㅺ'으로,'ㄸ'은 'ㅼ' 식으로 썼다.
또 아래아( · )가 있었으며 문장을 끝맺는 마침표가 생기기 전이었다.
물론 맞춤법이 있지도 않은 때라 당연히 두음법칙이란 것도 없었다.
그러다 일제 강점기인 1930년 총독부 주도로 언문철자법이 만들어지면서 아래아와 된시옷 표기가 전면 폐지되고 지금과 같은 각자병서(ㄲ,ㄸ 등)를 채택했다.
우리가 제대로 된 맞춤법을 갖게 된 것은 1988년에 현행 '한글맞춤법'이 고시 시행되면서부터다.
맞춤법의 역사야 1933년 조선어학회의 '한글마춤법 통일안'에서 시작되지만 일제 때의 굴곡과 광복 뒤 수십 년간의 혼란상을 감안하면 언어,문자생활에서 비로소 안정된 모습을 찾아가는 것은 불과 30년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언어는 살아 움직이는 생물과 같다는 말이 있듯이 한글을 기반으로 하는 현재의 문자체계는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변화하는 모습을 보인다.
한자는 우리 문화에 이미 녹아 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로마자나 일본의 가나도 수시로 우리 한글과 함께 섞인다.
더구나 외계어로 통하는 통신언어 등에서도 언어실험은 계속 이뤄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 기표로서의 한글이 미래 시점에서 어떤 모습을 갖추고 있을지는 예측하기 힘들다.
다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세계에 자랑하는 한글을 훗날에도 계속 유지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 소중히 여기고 끊임없이 가꿔나가는 길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한국경제신문 오피니언부 기자 hymt4@hankyung.com
독립신문 창간호 사설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1896년 4월7일 첫 호를 냈으니 지금으로부터 꼭 111년 전 글이다.
민간인이 발행한 최초의 근대 신문인 독립신문의 창간은 신문에서는 처음으로 한글 전용과 띄어쓰기를 도입하는 등 우리 말글 역사에서도 획기적인 분수령을 이루는 '사건'이었다.
독립신문은 창간호에서 창간사격인 1면 '론셜(지금의 사설)'을 통해 한글 전용과 띄어쓰기 방침을 자세히 적고 있는데,그 까닭을 위와 같이 밝혔다.
1899년 12월4일자까지 발행하고 폐간된 독립신문에는 모두 네 편의 국어 관련 기사가 1면에 사설 또는 사설 형식으로 실려 있다.
한 편은 1897년 8월5일자에 정식으로 '론셜'이란 문패를 달고 있고,다른 한 편은 1899년 5월20일자에 '타국 글 아니라'란 제목으로 실렸다.
나머지 두 편은 주시경 선생이 쓴 것이다.
한글학자 주시경은 독립신문에서 논설을 제외하곤 지면 구성을 전적으로 책임졌는데,당시 그의 직함은 '교보원'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편집기자 겸 교열기자였던 셈이다.
주시경이 쓴 두 편은 1897년 4월22일,24일자와 1897년 9월25일,28일자에 각각 이틀에 걸쳐 나눠 실렸다.
이 두 편은 '배재학당 학생 주상호가 기고한 국문론임'을 글머리에 밝히고 있는 걸로 봐서 정식 사설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주상호는 주시경의 원명) 당시 독립신문은 1면에 '론셜'이란 이름으로 사설을 실었는데,주시경의 국문론이 실린 나흘치에는 '론셜'이 따로 없는 걸로 보아 주시경의 글로써 이를 갈음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의 기사를 살펴보면 우리 말글이 불과 100여년의 세월을 지나면서 얼마나 극심한 변화 과정을 거쳤는지 알 수 있다.
"쌀갑시 벼량간에 만히 올나 간다니 까닭이 잇난거시거니와 이런 일은 뎡부에셔 급히 규졍하여 주어야 주려 죽게 된 가난한 백셩들을 보호할 뜻 하더라."(독립신문,건양 원년 7월28일자(49호),잡보,건양은 고종 때의 연호로 건양 원년은 1896년이다)
"윤치명씨가 녀학도 리혜눌과 샹관이잇다함은 이미 게재하엿거니와 다시 드르즉 윤씨가 샹쳐하엿다 칭탁하고 리혜눌을 졍실노 뎡하겟다고 자긔집으로 다려갓난대 그부형의 엄금함을 인하여 행랑에 두엇다더라."(대한매일,1910년 4월7일,잡보)
100여년 전의 이 기사들은 비록 한글 전용임에도 불구하고 철자를 비롯해 맞춤법,어휘,문체 등에서 지금의 독자 눈에는 매우 생소하게 보일 것이다.
당연히 해독하기도 쉽지 않다.
더구나 '까닭'의 쌍기역(ㄲ)은 실제 원문에선 된시옷(ㅺ)으로 쓰였다.
당시 된소리 표기는 'ㄲ'은 'ㅺ'으로,'ㄸ'은 'ㅼ' 식으로 썼다.
또 아래아( · )가 있었으며 문장을 끝맺는 마침표가 생기기 전이었다.
물론 맞춤법이 있지도 않은 때라 당연히 두음법칙이란 것도 없었다.
그러다 일제 강점기인 1930년 총독부 주도로 언문철자법이 만들어지면서 아래아와 된시옷 표기가 전면 폐지되고 지금과 같은 각자병서(ㄲ,ㄸ 등)를 채택했다.
우리가 제대로 된 맞춤법을 갖게 된 것은 1988년에 현행 '한글맞춤법'이 고시 시행되면서부터다.
맞춤법의 역사야 1933년 조선어학회의 '한글마춤법 통일안'에서 시작되지만 일제 때의 굴곡과 광복 뒤 수십 년간의 혼란상을 감안하면 언어,문자생활에서 비로소 안정된 모습을 찾아가는 것은 불과 30년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언어는 살아 움직이는 생물과 같다는 말이 있듯이 한글을 기반으로 하는 현재의 문자체계는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변화하는 모습을 보인다.
한자는 우리 문화에 이미 녹아 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로마자나 일본의 가나도 수시로 우리 한글과 함께 섞인다.
더구나 외계어로 통하는 통신언어 등에서도 언어실험은 계속 이뤄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 기표로서의 한글이 미래 시점에서 어떤 모습을 갖추고 있을지는 예측하기 힘들다.
다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세계에 자랑하는 한글을 훗날에도 계속 유지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 소중히 여기고 끊임없이 가꿔나가는 길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한국경제신문 오피니언부 기자 hymt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