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상에 떠도는 우스갯 소리 하나. 때는 따사로운 햇볕이 쏟아지는 어느 봄날. 월요일 점심시간이 갓 지난 오후,수도 상공에 지름 100m짜리 초대형 UFO(미확인 비행물체)가 출현했다고 가정하자.

먼저 영국의 경우. 대다수 런던 시민들은 가뜩이나 흐린 날씨에 햇볕까지 가리는 비행 물체를 달가워하지 않으면서도 침착하게 자신들의 일상을 영위한다. 대신 이튼스쿨 졸업생 등 명문가 자제들은 행여 늦게 나왔다는 소리를 들을까봐 조바심내며 손에 무기가 될 만한 것이 잡히는 대로 뛰쳐 나와 조국의 안위를 위협하는 이 괴물체와 맞서 싸운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떨까. 서울 시민들은 일제히 휴대폰을 꺼내들고 공항에 출국 비행편을 알아보느라 정신이 없다. 하지만 좌석은 이미 매진됐다. UFO 출현 정보를 일반 국민보다 먼저 '접수한'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이미 예약을 끝냈기 때문이다.

사회지도층이 '특권'만 누리고 사회적 '책임'은 지지 않는다는 비판이 이 우스갯소리에 들어있다. 물론 이런 유머는 과장되어 있고 또 지나치게 자기비하적이어서 그 자체로 문제가 많다. 선진국은 모두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준수하고 한국은 모조리 부패했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 자체가 벌써 균형을 잃은 시각이다. 다만 엄격한 자기비판이라는 점을 감안하고 다음의 경우들을 생각해보자.

◆우리 역사에서 배우는 교훈

한국사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실종된 경우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몽골이 고려를 40년간 유린할 때 나라를 지키겠다고 목숨 바쳐 싸운 사람들은 힘없는 평민들과 천대받던 천민 노비였다. 당시 집권층이었던 최씨 무신정권은 강화도로 피신해 자신들의 안위를 지켰다.

지도층이 강화도로 떠나버리자 백성들이 몽골 침략군을 환영하는 일까지 벌어졌다고 한다. 민심을 잃은 최씨 정권은 무너졌고,고려의 40년 항쟁은 아무 소득없이 굴욕적인 항복으로 끝을 맺었다.

임진왜란 때도 마찬가지였다. 왜군이 수도 한양을 향해 몰려오자 선조는 신하들과 함께 궁궐을 버리고 도망길에 올랐다. 이 행렬을 본 백성들은 왕에게 돌을 던지며 분노를 표출했고,텅빈 궁궐에 불을 지르기까지 했다. 상황이 이러니 왜적에 맞서 싸울 관군을 모집해도 모이는 사람이 적었고,국토의 대부분이 유린당하는 치욕을 겪었다.

이는 전쟁이 끝난 뒤 조선의 왕권을 크게 위축시키는 결과를 낳았고,붕당정치가 시작되는 계기도 됐다. 물론 임진왜란 당시 전국에서 일어난 지방 선비들의 의병운동 등은 당당히 노블레스 오블리주라고 말할 수 있다.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우리의 이 같은 아픈 역사는 국난의 위기에 지도층이 솔선수범하는 자세로 앞장서 싸우지 않으면 국가의 존립이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는 교훈도 동시에 주고있다.

서양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로 표현되는 것처럼 사회 지도층이 먼저 국가와 사회를 위해 누린 만큼 높은 수준의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현재 높은 지위를 가지고 다소간의 특권을 누리고 있다 할지라도 그 기반이 되는 국가가 무너진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국민 82% "사회 지도층 신뢰 못해"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가 지난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일반 국민의 82.1%가 사회지도층을 믿지 않는다고 답했다. 한국 사회의 먼 미래를 생각할 때 이건 예삿일이 아니다. 사회 구성원들이 지도층을 신뢰하지 못한다면 이는 대부분 국가와 사회 전반에 대한 냉소로 이어진다. 구성원들의 소속감도 크게 흔들려 국가의 존립 기반 자체가 무너지게 된다.

이러한 불신은 사회지도층의 일부가 병역.납세 등 헌법상의 기본 의무조차 다하지 않고 있다는 평가로부터 출발한다. 고위 공직자 신상정보 공개 자료에 따르면 현역 국회의원이 100명 중 24명꼴로,의원들의 2세는 100명 중 12명꼴로 병역을 면제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10년간 일반 국민의 평균 병역 면제율(4.08%)보다 각각 5배,2배 이상 높다.

정치인 가운데는 여야를 막론하고 평생 세금 한 푼 안 낸 사람들조차 있다. 국민건강보험 부정수급자 명단이 공개되면 거기엔 변호사,의사 등 고소득은 물론 사회적 존경을 받을 법한 직종의 사람들도 일부이지만 끼어 있다. 국가의 부름에 따라 자식들을 기꺼이 군대에 보내고,법에 따라 빠듯한 살림을 쪼개 꼬박꼬박 세금과 부담금을 내 온 국민에게 이른바 '사회지도층'이라는 인사들의 '열외 근성'이 어떻게 비칠까.

◆한국적 '노블레스 오블리주' 절실

최근 고위 공직자들의 부동산 투기 의혹이 불거질 때마다 당사자는 '법적인 문제는 없었다'는 식으로 대응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이 같은 행위는 기실 모두 일반 국민에게 요구되는 도덕적 잣대로 따져 봐도 문제가 있는 게 대부분이다. 지도층 인사가 앞장서서 법의 경계를 넘는 짓을 저지르는 경우도 많다. 이래서야 어떻게 이들에게 국가 사회를 믿고 맡길 것인가. '노블레스'(지위,특권)를 말하면서 '오블리주'(의무)는 팽개치는 이들이 넘쳐날 때 국가와 사회는 늘 위기에 빠졌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물론 사회 지도층을 하나의 잣대로 매도할 수는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 또 실제로 우리사회 곳곳에 소리 없이 희생하고 헌신하는 지도적 인사들이 더욱 많다. 때문에 일부의 잘못을 일부러 부풀려 선전할 까닭도 없다. 그러나 그들이 고귀한 의무를 다하고,그래서 존경하고 그들에게 특권을 기꺼이 내어줄 수 있을 때 비로소 대한민국이 성숙한 국가로 도약할 수 있다.

경제발전이 본격화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진정한 근대화가 아직 걸음마 단계라는 점을 생각하면 조급하게 생각할 까닭은 없다. 중산층들이 품위를 지키고 사회에 헌신하는 그런 전통을 우리도 충분히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차기현 한국경제신문 생활경제부 기자 khcha@hankyung.com

[ 강남구 주민들 작년 수해 복구 앞장 '화제' ]

지난해 여름 강원도 평창에 내린 집중 호우로 주민들이 막대한 재산과 인명 피해를 입었다. 이 때 서울 강남구 주민들이 피해지역을 위해 약 1억원을 기탁하고,복구 지원에 가장 먼저 발벗고 나서는 등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고 나서 화제가 됐다.

당시 강남구청은 평창군이 피해를 입은 다음 날 즉시 구민들의 자발적인 성금과 기부품을 모았고,이튿날 이를 차량에 싣고 평창군청으로 향하는 기민함을 보여줬다. 이날 쌀.라면.고추장 등 식품류와 가스레인지.부탄가스 등의 긴급 구호물품을 실은 5t 트럭 4대가 평창으로 향했고,이어 며칠 뒤 피해복구를 위한 양수기 30대,복구용 특수차량 2대,방역차량 2대 등도 잇따라 지원 행렬을 이었다.

강남구청 관계자는 그 때 상황에 대해 "국가와 사회로부터 좋은 생활환경이라는 혜택을 입은 우리 구민들에게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자고 호소한 결과 뜨거운 호응을 얻어 신속하게 지원물품을 전달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수해민 돕기 금품은 강남구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구청이나 동사무소에 기탁한 것으로 단 하루 만에 1억원이 모였다.

강남구는 앞으로도 자연재해로 피해를 입은 지역이 나오면 구민의 정성을 모아 신속히 수해지역에 전달하는 일을 지속적으로 펼친다는 방침이다. 대한민국 부자 동네의 이 같은 조용한 변화가 한국적 의미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로 정착되는 계기가 되기를 국민 모두가 바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