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5월,세계적인 유통업체들의 눈이 한국에 집중됐다.

1998년 한국에 진출한 월마트코리아가 '백기투항'하고 이마트와 매각계약에 합의한 것.다윗(이마트)이 골리앗(월마트)을 쓰러뜨렸다는 평가를 받은 '사건'으로 중심엔 구학서 신세계 부회장(60)이 우뚝 서 있었다.

2000년 신세계의 '수장'이 된 이래 총 103개의 이마트를 오픈,한국 유통의 역사를 써 가고 있는 구 부회장.그를 성공한 CEO로 만든 비결은 무엇일까.
[한국의 CEO 나의 청춘 나의 삶] (20) 구학서 신세계 부회장
◆"난 월급쟁이가 꿈이었다"

구 부회장은 '조용한 카리스마'의 소유자로 잘 알려져 있다.

스스로 "난 심심한 사람"이라고 말할 정도다.

화려한 말솜씨나,술자리를 휘어잡을 만한 주량이나,하다못해 좌중의 주목을 이끌어낼 유머를 갖고 있지도 않다.

하지만 그가 내뱉는 한 마디 말 속엔 인생의 연륜과 성찰이 묻어난다.

소박함과 묵직함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뤘다고 보면 딱 맞을 것이다.

'청년 구학서'의 꿈은 참 소박하게도 그냥 '월급쟁이'였다.

누구나 품었을 법한 '야망'이 있긴 했지만 집안 사정이 가로막았다.

선친이 사업을 하는 바람에 수입이 늘 불규칙해 은행처럼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직장을 갖길 소원했던 것.상고에 진학했던 것도 이 같은 바람 때문이었다.

"은행이 삼성으로 바뀌긴 했지만 결국 월급쟁이가 되고 싶었던 소원을 이룬 셈이지요."

지금이야 삼성전자하면 최고의 직장으로 평가받지만 당시(1972년)만 해도 삼성 계열사 가운데 그다지 촉망받는 곳은 아니었다.

"회사가 수원에 있었는데 하루에 버스 몇 대 안 다닐 정도로 꽤 먼 곳이었습니다.

서울에서 줄곧 생활하다가 까마득한 지방으로 간 셈이니까 남들한테 부러움을 살 정도의 직장은 아니었던 셈이죠."
[한국의 CEO 나의 청춘 나의 삶] (20) 구학서 신세계 부회장
◆삼성그룹 오너가(家)와의 인연

경제학과(연세대)를 나온 덕분인지 구 부회장은 늘 재무담당 일을 했다.

삼성전자와 삼성비서실 재무팀 과장을 거쳐 삼성물산 도쿄지점 관리부장,삼성전자 관리담당 이사를 역임했다.

특히 삼성 비서실로 불려 들어왔던 1976년은 그의 인생에서 전환점과도 같았다.

당시 차장이었던 이수빈 전 삼성생명 회장이 구 부회장을 눈여겨보고 서울로 발령을 낸 것.이때부터 구 부회장과 삼성그룹 오너가(家)와의 오랜 인연이 시작됐다.

숫자에 밝은 덕분에 오너 가족과 관련된 일들을 도맡아 처리했다.

특히 이병철 선대(先代) 회장과 가까웠다.

"골프 내기로 돈을 따셨을 때 아이처럼 좋아하곤 하셨죠.당일에 못 받으면 나중에라도 꼭 받으실 정도로 승부욕이 대단하셨습니다.

어떨 땐 내기로 딴 돈을 제게 용돈으로 주기도 하셨습니다."

오너가의 일을 처리하면서 구 부회장은 돈에 대한 관념도 많이 바뀌었다고 회고했다.

"돈을 원없이 가진 분들을 모셔 보니까 알겠더라고요.

내가 관리할 수 없는 범위의 돈은 자기 돈이 아니란 걸 말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자기 돈이라는 것은 먹고 입고,이런 데 쓸 수 있는 것이어야 하잖아요. 나머지 돈은 필요로 하는 사람들한테 주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나는 자식한테 조그만 아파트라도 물려 줄 수 있는 복을 갖긴 했지만,자식에게 근로에 대한 희열을 느낄 수 있는 기회를 빼앗은 것일 수도 있죠. 그런 점에서 돈이 많다는 게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죠."


◆시련과 좌절,그리고 성공

너무 자신했던 탓일까.

구 부회장은 첫 임원 승진 인사에서 누락되고 만다.

입사 동기 중에서 가장 '잘 나간다'고 여겼던 그에겐 충격이 상당했다.

"알아봤더니 이병철 회장께서 '아는 사람이 구학서밖에 없구먼.근데 구학서는 아직 너무 어려'라고 말하며 임원 승진대상에서 뺐다고 하더군요.

당시엔 서운했지만 나중에야 겸손함을 배우게 하려는 깊은 뜻임을 알았습니다." 결국 구 부회장이 입사 동기들 중에 가장 오래 CEO(1999년 첫 CEO로 선임)로 남아 있게 된 것도 이때의 일이 자양분이 됐다.

임원 승진에서 누락된 이후 구 부회장은 삼천리로 자리를 옮겼다.

하지만 1996년 곧바로 신세계로 영입돼 경영지원실장(상무)을 맡는다.

오랫동안 '숫자 계산'에 익숙했던 그가 유통 분야에 처음으로 뛰어든 순간이다.

그러다 1999년 드디어 신세계를 이끌 대표직에 올랐다.

신세계 CEO로서 구 부회장은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1993년 첫선을 보인 한국형 할인점의 '효시'인 이마트의 중흥을 이끌었다.

1998년 IMF 위기 여파로 저마다 대형 투자를 주저하고 있는 사이 구 부회장은 1999년을 전후해 이마트의 숫자를 늘리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2000년 이후 국내에서도 본격적인 할인점 경쟁이 개막되면서 구 부회장의 혜안은 '대박'으로 입증됐다.

주요 상권을 미리 선점한 덕분에 이마트는 다른 경쟁업체와의 싸움에서 저만치 앞서 갈 수 있었다.

"부산 해운대 근처에 원래 백화점을 내려고 했는데 할인점으로 바꿔버렸습니다.

계산이 딱 나오더라고요.

100원을 투자해서 본전 뽑고 이익을 내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이 할인점이 백화점보다 훨씬 적게 걸렸으니까요."

특히 이마트의 선점 효과는 까르푸,월마트 등 외국계 초대형 할인점들이 한국에서 세력을 확장하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이 됐다.

점포를 내려고 해도 주변엔 늘 이마트가 포진하고 있어 경쟁 자체가 어려웠던 것.

이 같은 성과를 인정받아 '기업인 구학서'는 지난해 부회장이란 직함을 달았다.

그 스스로는 "발음도 어렵고 아직 환갑도 안 된 사람이 부회장이라 불리기 어색하다"고 말했지만 '월급쟁이'로선 최고의 지위에 오른 셈이다.


◆독특한 그의 '직장인론'

34년에 걸친 직장 생활을 거치면서 그가 말하는 비결은 의외로 소박하다.

'부부(父父) 자자(子子) 군군(君君) 신신(臣臣)'.그가 늘 입에 달고 다니는 경구(警句)에 해답이 있단다.

적자생존의 법칙만이 존재하는 기업의 세계에서 단순히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아들은 아들답고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한다'니….하지만 그와 직접 만나 얘기를 나누다 보면 소박한 듯 보이는 그 말은 '묵직함'에 더 가깝다는 것을 곧 알게 된다.

"어느 회사나 막내로 들어가면 잡일을 도맡아 하게 되잖아요.

그럼 속으로 '난 CEO가 되는 게 꿈인데 이런 일이나 하면서 언제 크고 언제 자기계발도 하냐'라는 생각에 금방 때려치우고 나가요.

'MBA를 받아오면 달라지겠지'하며 유학도 가고,고시로 빠지기도 하고.하지만 대부분 CEO로 성장한 사람들을 보면 사원일 때 사원답게 뭐든 배우겠다는 자세로 주어진 일에 충실한 사람이 결국 CEO까지 성장하는 법입니다."

박동휘 한국경제신문 생활경제부 기자 donghui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