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쌍수 LG전자 부회장(61)은 입사 34년 만에 본사 근무를 시작한 인물이다.
2003년 1월 부회장이 되고 나서였다.
부산 창원을 거치며 지방의 생산 현장을 완벽하게 장악했던 그의 서울 입성에 여의도 LG 트윈타워(LG그룹 사옥)는 술렁댔다.
예상대로 그의 첫마디는 "내 앞에서 스트레스 얘기하지 마라.일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스트레스 받는다"는 것이었다.
김 부회장은 무슨 일이든 숫제 뿌리를 뽑는 스타일이다.
스스로 독하게 일했고 아랫사람들에게도 '독한 열정'을 강조한다.
'불량률 제로'를 추구하는 생산 라인의 6시그마 공정을 관리 조직에도 적용하겠다고 나서자 본사 직원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김 부회장은 경상북도 김천의 중농(中農) 집안에서 자랐다.
김천 성의고등학교 시절 수업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지게에 소풀을 짊어지고 집안일을 도왔던 전형적인 시골 학생이었다.
공부에는 크게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가끔씩 자신의 장래를 생각할 때면 "차라리 서울 가서 장사나 해 볼까" 하는 공상에 잠길 때가 많았다.
"추석 같은 명절이 되면 서울에서 돈 벌어 미끈한 차림으로 내려온 고향 형님들의 얘기 보따리에 온통 정신을 빼앗기곤 했습니다."
이 때문에 김천시 봉천동의 한 야산에 올라 서울로 향하는 기차들의 행렬을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다.
허리를 앓으며 꾸물꾸물 북쪽으로 향하는 기차에 소년 김쌍수의 마음도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새 고교 졸업반이 된 그는 대학 진학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같이 지내던 친구들이 이른바 '대처(도시)'로 뿔뿔이 흩어져 나가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목표 없는 생활에 종지부를 찍기로 마음 먹고 대구로 나와 입시 학원을 다니게 됐다.
공대를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그 해 5·16 군사혁명으로 들어선 박정희 정권이 공업 진흥책을 본격 표방하면서 그곳에 자신의 미래가 있을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뒤늦게 시작한 공부는 이듬해 결실을 맺어 당시 인기를 모았던 한양대 기계공학과에 합격했다.
고대했던 서울행에 성공한 그는 대학시절 공부만 했다.
"아무런 연고도, 직장도 없이 무작정 서울로 올라오는 사람들에 비해서는 제 처지가 훨씬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동안 철도 좀 들었고요.
참 열심히 공부했어요."
3학년을 마치고 육군에 입대,부산 군기지 사령부와 김해공군학교에서 기계공작병으로 복무를 마친 그는 1968년 복학한 뒤 금성사(현 LG전자)로부터 예비 합격증을 받아 들었다.
한창 사세를 확장해 나가던 금성사는 성적 좋은 졸업반 학생들을 끌어모으고 있었다.
1969년 1월 사무기술직으로 정식 입사한 후 첫 근무지는 부산 공장의 냉장고 생산 라인이었다.
마침 냉동 공학에 매력을 느끼던 차였다.
제조 담당 엔지니어로 1년가량 일하다가 설계 담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입사 동기들은 서울 본사 근무를 선호했지만 그는 땀냄새 나는 현장을 더 좋아했다.
일단 과제가 주어지면 해결될 때까지 파고들었다.
하지만 일하는 것에 비해 승진 운은 없었다.
요즘이야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현장 직원은 본사 직원에 비해 확실하게 홀대받는 경향이 강했다.
게다가 김 부회장은 체질적으로 윗사람들에게 굽신거리지를 못했다.
무뚝뚝한 성격에 말투도 직선적이었다.
승진이 늦어져도 그는 묵묵하게 일했다. 우직하게 앞만 보고 가는 생활이 계속됐다.
1976년 기정보(과장급)로 승진하면서 불도저 같은 그의 스타일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당시 국내 기업들의 냉장고 제조 기술은 대단히 취약해 해외에서 중요한 부품들을 많이 갖고 왔다.
김 부회장은 설 연휴 때도 고향에 가지 않은 채 신형 냉장고 위에 올라앉아 밤을 새웠다.
부품을 뜯고 조립하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는지 모른다.
금성사가 1970년대 중반 일본 기업으로부터 도입한 우레탄 발포어 최신 설비를 한국형으로 개조한 것은 전적으로 그의 공로였다.
"지금 생각해도 제가 가장 잘한 일은 우리나라의 냉장고 기반 기술을 만드는 데 일조했다는 겁니다.
윗사람들이 뭘 시키면 절대로 '못한다'는 얘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겁없이 일했고 겁없이 도전했습니다." 1976년 부산 공장의 냉장고 설비가 창원으로 이주하면서 김 부회장이 제2의 고향이라고 일컫는 창원 생활이 시작됐다.
품질과 고객 만족의 모든 열쇠는 현장에 있다고 생각한 그는 더 이상 서울 본사행을 바라지 않았다.
1977년 기정, 1981년 기감(부장급)이 되면서 철저한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한 식견과 판단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게 됐다.
1982년 회사는 그에게 냉장고 사업부의 초대 연구소장을 맡겼다.
석사 학위도, 박사 학위도 없었지만 어느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았다.
1984년엔 냉장고 공장장을 맡아 품질력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올려 놓았다.
냉장고 사업이 본궤도에 오르자 1986년 세탁기 공장장으로 발령이 났다.
무려 18년을 보낸 냉장고 사업부를 떠나는 것이 못내 섭섭했지만 당시 세탁기 사업은 만성적인 적자로 인해 사업 존폐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
이는 개인 김쌍수에게 또 하나의 시험대였다.
냉장고 사업부의 원숙한 엔지니어로 남을 것이냐, 아니면 회사 전반의 전자 사업을 총괄할 수 있는 관리자로서의 역량을 갖게 되느냐의 기로였다.
그는 2년도 지나지 않아 세탁기 사업부를 흑자로 전환시켰고 1980년대 말에는 회사의 주력 사업부로 키우는 데 성공했다. 그 시절 김 부회장은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얘기는 틀린 것이다.
진짜 힘은 실행하는 것이고 끊임없이 혁신하는 것"이라는 얘기를 자주 했다.
이 때부터 '혁신'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됐다.
마음에 드는 결과가 나올 때까지,목표에 도달할 때까지 공정을 바꾸고 또 바꿨다.
1996년 7월 백색 가전을 총괄하는 리빙시스템 사업본부장(전무)으로 올라섰다.
그는 여전히 지방(창원)에 머물고 있었지만 이미 현장에선 그가 CEO였다.
김 부회장의 이력서에는 그 흔한 'OO대학원 최고위 과정 수료'가 단 한 줄도 없다.
학벌이 특출난 것도 아니고 해외근무 경력도 전무하다.
그런 데도 국내 최고의 전자회사 CEO 자리를 4년째 지켜 오고 있다.
결국 주어진 목표에 도달하고자 하는 유별난 집념과 실행력이 오늘날의 김 부회장을 만든 셈이다.
"도저히 중간에 빠져나올 수 없는 곳만 다녔기 때문에 딴 곳에 눈돌릴 겨를이 없었어요.
과분한 업무를 맡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매달렸던 것밖에 없습니다."
조일훈 한국경제신문 산업부 기자 jih@hankyung.com
2003년 1월 부회장이 되고 나서였다.
부산 창원을 거치며 지방의 생산 현장을 완벽하게 장악했던 그의 서울 입성에 여의도 LG 트윈타워(LG그룹 사옥)는 술렁댔다.
예상대로 그의 첫마디는 "내 앞에서 스트레스 얘기하지 마라.일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스트레스 받는다"는 것이었다.
김 부회장은 무슨 일이든 숫제 뿌리를 뽑는 스타일이다.
스스로 독하게 일했고 아랫사람들에게도 '독한 열정'을 강조한다.
'불량률 제로'를 추구하는 생산 라인의 6시그마 공정을 관리 조직에도 적용하겠다고 나서자 본사 직원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김 부회장은 경상북도 김천의 중농(中農) 집안에서 자랐다.
김천 성의고등학교 시절 수업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지게에 소풀을 짊어지고 집안일을 도왔던 전형적인 시골 학생이었다.
공부에는 크게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가끔씩 자신의 장래를 생각할 때면 "차라리 서울 가서 장사나 해 볼까" 하는 공상에 잠길 때가 많았다.
"추석 같은 명절이 되면 서울에서 돈 벌어 미끈한 차림으로 내려온 고향 형님들의 얘기 보따리에 온통 정신을 빼앗기곤 했습니다."
이 때문에 김천시 봉천동의 한 야산에 올라 서울로 향하는 기차들의 행렬을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다.
허리를 앓으며 꾸물꾸물 북쪽으로 향하는 기차에 소년 김쌍수의 마음도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새 고교 졸업반이 된 그는 대학 진학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같이 지내던 친구들이 이른바 '대처(도시)'로 뿔뿔이 흩어져 나가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목표 없는 생활에 종지부를 찍기로 마음 먹고 대구로 나와 입시 학원을 다니게 됐다.
공대를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그 해 5·16 군사혁명으로 들어선 박정희 정권이 공업 진흥책을 본격 표방하면서 그곳에 자신의 미래가 있을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뒤늦게 시작한 공부는 이듬해 결실을 맺어 당시 인기를 모았던 한양대 기계공학과에 합격했다.
고대했던 서울행에 성공한 그는 대학시절 공부만 했다.
"아무런 연고도, 직장도 없이 무작정 서울로 올라오는 사람들에 비해서는 제 처지가 훨씬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동안 철도 좀 들었고요.
참 열심히 공부했어요."
3학년을 마치고 육군에 입대,부산 군기지 사령부와 김해공군학교에서 기계공작병으로 복무를 마친 그는 1968년 복학한 뒤 금성사(현 LG전자)로부터 예비 합격증을 받아 들었다.
한창 사세를 확장해 나가던 금성사는 성적 좋은 졸업반 학생들을 끌어모으고 있었다.
1969년 1월 사무기술직으로 정식 입사한 후 첫 근무지는 부산 공장의 냉장고 생산 라인이었다.
마침 냉동 공학에 매력을 느끼던 차였다.
제조 담당 엔지니어로 1년가량 일하다가 설계 담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입사 동기들은 서울 본사 근무를 선호했지만 그는 땀냄새 나는 현장을 더 좋아했다.
일단 과제가 주어지면 해결될 때까지 파고들었다.
하지만 일하는 것에 비해 승진 운은 없었다.
요즘이야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현장 직원은 본사 직원에 비해 확실하게 홀대받는 경향이 강했다.
게다가 김 부회장은 체질적으로 윗사람들에게 굽신거리지를 못했다.
무뚝뚝한 성격에 말투도 직선적이었다.
승진이 늦어져도 그는 묵묵하게 일했다. 우직하게 앞만 보고 가는 생활이 계속됐다.
1976년 기정보(과장급)로 승진하면서 불도저 같은 그의 스타일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당시 국내 기업들의 냉장고 제조 기술은 대단히 취약해 해외에서 중요한 부품들을 많이 갖고 왔다.
김 부회장은 설 연휴 때도 고향에 가지 않은 채 신형 냉장고 위에 올라앉아 밤을 새웠다.
부품을 뜯고 조립하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는지 모른다.
금성사가 1970년대 중반 일본 기업으로부터 도입한 우레탄 발포어 최신 설비를 한국형으로 개조한 것은 전적으로 그의 공로였다.
"지금 생각해도 제가 가장 잘한 일은 우리나라의 냉장고 기반 기술을 만드는 데 일조했다는 겁니다.
윗사람들이 뭘 시키면 절대로 '못한다'는 얘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겁없이 일했고 겁없이 도전했습니다." 1976년 부산 공장의 냉장고 설비가 창원으로 이주하면서 김 부회장이 제2의 고향이라고 일컫는 창원 생활이 시작됐다.
품질과 고객 만족의 모든 열쇠는 현장에 있다고 생각한 그는 더 이상 서울 본사행을 바라지 않았다.
1977년 기정, 1981년 기감(부장급)이 되면서 철저한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한 식견과 판단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게 됐다.
1982년 회사는 그에게 냉장고 사업부의 초대 연구소장을 맡겼다.
석사 학위도, 박사 학위도 없었지만 어느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았다.
1984년엔 냉장고 공장장을 맡아 품질력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올려 놓았다.
냉장고 사업이 본궤도에 오르자 1986년 세탁기 공장장으로 발령이 났다.
무려 18년을 보낸 냉장고 사업부를 떠나는 것이 못내 섭섭했지만 당시 세탁기 사업은 만성적인 적자로 인해 사업 존폐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
이는 개인 김쌍수에게 또 하나의 시험대였다.
냉장고 사업부의 원숙한 엔지니어로 남을 것이냐, 아니면 회사 전반의 전자 사업을 총괄할 수 있는 관리자로서의 역량을 갖게 되느냐의 기로였다.
그는 2년도 지나지 않아 세탁기 사업부를 흑자로 전환시켰고 1980년대 말에는 회사의 주력 사업부로 키우는 데 성공했다. 그 시절 김 부회장은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얘기는 틀린 것이다.
진짜 힘은 실행하는 것이고 끊임없이 혁신하는 것"이라는 얘기를 자주 했다.
이 때부터 '혁신'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됐다.
마음에 드는 결과가 나올 때까지,목표에 도달할 때까지 공정을 바꾸고 또 바꿨다.
1996년 7월 백색 가전을 총괄하는 리빙시스템 사업본부장(전무)으로 올라섰다.
그는 여전히 지방(창원)에 머물고 있었지만 이미 현장에선 그가 CEO였다.
김 부회장의 이력서에는 그 흔한 'OO대학원 최고위 과정 수료'가 단 한 줄도 없다.
학벌이 특출난 것도 아니고 해외근무 경력도 전무하다.
그런 데도 국내 최고의 전자회사 CEO 자리를 4년째 지켜 오고 있다.
결국 주어진 목표에 도달하고자 하는 유별난 집념과 실행력이 오늘날의 김 부회장을 만든 셈이다.
"도저히 중간에 빠져나올 수 없는 곳만 다녔기 때문에 딴 곳에 눈돌릴 겨를이 없었어요.
과분한 업무를 맡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매달렸던 것밖에 없습니다."
조일훈 한국경제신문 산업부 기자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