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시문사이의 연결고리를 먼저 찾아내야지!

논술 문제에 제시된 글들은 서로 무관하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글과의 상호 관련성 속에서 제시된다.

그렇기 때문에 논의의 쟁점을 파악하고 자신의 글을 논술하기 위해서는 각각의 글을 독립적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상호 관련성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

이때 관련성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소재적인 면,주제적인 면,관점 등에서 어떻게 관련이 있는지 연결 고리를 찾아야 한다.

막연히 관련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논의의 출발점을 삼게 되면 논술의 내용 자체가 막연한 수준에 머무를 수 있고 창의성이 부족한 논술로 평가되기 쉽기 때문에 연결 고리를 명확히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 문제 >


네 개의 제시문은 모두 하나의 공통된 주제와 관련된 글이다.제시문 간의 연관 관계를 밝히고, 공통 주제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논술하시오. (2004학년도 고려대 정시)



(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으며 괴테가 원래 의도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우리는 괴테라는 천재적인 작가의 정신의 행로를 따라가며 그의 삶과 문학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실제 괴테가 처했던 상황에서 그의 글을 읽는다.

이렇게 독자의 주관성을 배제하고 저자의 의도를 발견하는 것이야말로 예술 작품을 대하는 옳은 태도다.

그렇지 않다면 각자의 입장에 따른 주관적 왜곡을 피할 길이 없을 것이다.

다른 시각에서 보면,우리의 삶과 무관한 저자의 의도가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 물을 수 있다.

우리는 현대인으로서 나름의 관점과 기준을 가지고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는다.

모든 고전은 시대마다 고유의 관점에서 재해석되며,거기에 새로운 의미가 더해진다.

해석은 자유로운 창조다.

지금 우리의 삶에 아무런 의미를 보태지 못하는 저자의 원래 의도는 죽은 사실에 불과하다.

(나) 랑케는 오로지 실재했던 사실만을 기술하고자 했다.

사료(史料)에 대한 비판적 검증을 통해 그는 문헌 안에서 역사적 사실만을 가려내려고 했던 것이다.

랑케의 모든 저작에는 역사적 객관성을 향한 강한 의지와 동력이 엿보인다.

그는 언제나 무한히 풍부한 사건들로부터 객관적·역사적 연관을 찾되 형이상학적인 역사 구성의 우를 범하지 않는,실증적인 탐구 방법을 추구했다.

즉 사실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랑케는 자신의 현재에서 눈을 떼고,불편부당하고 객관적인 과학으로서의 역사학을 정립하려고 노력했다.

(다) 일군의 과학철학자에 의하면,과학지식은 객관적이고 보편타당한 진리가 아니라 특정의 '과학하는 방식'을 공유하는 과학자들이 만들어낸 지식일 뿐이다.

여기서 과학하는 방식은 동일한 신념 가치관 연구방법 검증방식 등의 집합을 말한다.

이 방식에 부합하는 가설만이 과학적 탐구의 대상 세계에 대한 정당한 설명으로 공인을 받는다.

즉 과학지식은 과학자 공동체가 공유하는 패러다임 위에서 이루어진 일련의 합의 내용들이다.

(라) (피고 갑(甲)은 피해자 을(乙)을 폭행하여 식물인간으로 만들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검사와 변호사는 현재까지 확인된 증거만으로 갑을 유죄로 인정할 수 있는지에 관하여 판사와 배심원 앞에서 대립되는 주장을 펴고 있다.)

검사:범죄행위에 대한 증거는 실체적 진실을 밝히기 위한 것입니다.

이미 배심원 여러분이 알고 있는,그리고 피고와 변호인도 인정하고 있는 증거만으로도 피고가 가해자라는 사실을 입증하기에 충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변호사: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이라는 것은 매우 상대적인 것입니다.

예컨대 같은 사건을 목격한 증인들의 증언이 엇갈리는 경우도 드물지 않습니다.

이 사건에서 피고에게 불리한 증거들이 일부 제시되고 있지만,그 증거들에 대한 최종적 평가는 배심원 여러분의 현명한 판단에 맡겨져 있는 것입니다.

검사:법정은 진실을 확인하기 위한 장소입니다.

현명하신 배심원 여러분이 합리적 이성으로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가려내고,그에 기초하여 공정한 법적 책임을 묻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정의의 실현이 아니겠습니까?

변호사:저 역시 실체적 진실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신(神) 앞에서 어느 정도까지 실체적 진실을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배심원 여러분은 오로지 자신의 현명한 판단을 통해 증거의 의미를 평가하고,그에 기초해서 합의로써 사실을 올바르게 확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재판장이 배심원들의 평의를 위해 휴정을 선언한다)


각각의 제시문은 나름의 문제 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 문제 의식은 서로 독립적인 것이 아니고 다른 지문과 연결지어 생각해 보면 나름의 연결 고리가 있다.

제시문 (가)는 문학 작품을 대하는 두 가지 태도에 대한 글이다.

첫 번째 태도는 타인의 문학적 표현을 대하며 각자의 주관적 입장에서가 아니라,저자의 삶의 맥락에서 원래 저자가 표현하고자 했던 의도를 파악하려는 태도다.

이것을 우리는 객관적 해석이라 부를 수 있다.

이러한 해석은 주관적인 곡해를 방지할 수 있다는 점에 뜻이 있지만,그러나 어떤 문학 작품이 나에 대해 갖는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다는 데 한계가 있다.

그런 점에서 제시문에 드러난 두 번째 태도는 문학 작품을 나의 현재에 적용하는 창조적 해석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즉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보다는 나에 대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때의 적용도 나 개인만의 전적으로 자의적인 해석이라기보다는 내가 속한 시대의 문화와 관점에 입각한 해석이라는 점이다.

즉 나의 창조적 해석은 동시대인들의 합의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이다.

학자들은 이런 해석을 객관적·주관적 해석과 구분하여 상호주관적 합의에 입각한 해석이라 부른다.

이 두 가지 태도의 전형적인 예를 제시문 (나)와 (다)가 보여주고 있다.

(나)는 순수한 사실 확정을 위해 노력하는 한 실증주의 역사학자의 엄격한 학문적 태도를 보여주는데,만일 수험생이 이 태도에서 단순한 사실 맹신주의를 넘어 부단히 사실을 추구하며,사실에 다가가려는 역사학자의 성실한 태도를 발견한다면 출제 의도를 정확히 파악한 것이다.

한편 (다)는 흔히 외부 세계에 대한 보편타당하고 객관적인 진술의 체계로 알려진 과학적 지식조차도 과학자 공동체 내부의 상호주관적 합의에 기초한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과학철학적 입장이 허무주의적 상대주의라기보다는 여전히 상호주관적 합의를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네 번째 제시문은 이 두 가지 가능성이 충돌하는 법정의 사례다.

검사와 변호사는 각각 사실 자체를 말하게 하려는 입장과 사실은 상호주관적 합의의 산물이라는 대립된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점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물론 제시문은 두 입장 중 어느 하나를 옹호하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이 두 입장의 배후에 숨은 철학적 함축인데,'인간의 근원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사실에 대한 추구를 포기하지 말라는 요청'이 그 하나이고,'우리는 결코 순수한 사실 자체에는 도달할 수 없고,다만 상호주관적 합의를 통해 사실에 부단히 접근해 가고 있다는 지적 겸손'이 다른 하나다.

이 두 가지는 주관적 상대주의의 허무성과 사실 맹신주의의 허구성을 동시에 경계해야 하는 인간적 존재자에게는 모두 중요한 철학적 교훈이다.

왜냐하면 유한한 존재자로서 사실을 추구하는 인간은 사실의 마지막 소유자도 아니지만,또한 사실을 포기해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사실과 해석'의 관계는 단순히 객관적 사실과 주관적 해석의 갈등의 문제는 아니다.

우리 인간은 요청으로서의 사실과 현실로서의 해석의 사이를 오가며 부단히 사실에 접근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 논술 문제를 객관적 사실과 주관적 해석의 갈등으로 보고 둘 간의 통속적인 절충을 꾀한 답안이 있다면 결코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없다.

인간은 그 두 극단의 중간에 놓인 존재자이고,이 가능성에 대한 유연한 사고야말로 출제진이 수험생에게 요구한 것이기 때문이다.

stonelee@megastudy.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