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 안철수연구소 이사회 의장(44)은 인덕이 많은 사람이다.

안정적인 의사의 길을 버리고 험난한 벤처기업인(안철수연구소 설립)의 길을 택한 것으로 세인의 주목을 끌어왔다.

특히 황무지나 다름없던 국내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시장을 일군 능력 하나로도 천재 소리를 들을 만하지만 항상 겸손한 모습으로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자리하고 있다.

안철수연구소의 대표직을 떠난 지 2년이 가까워져 오는데도 여전히 존경하는 CEO,영입하고 싶은 CEO 등을 묻는 설문조사에서 항상 1위로 꼽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청소년들이 가장 존경하는 기업인으로도 늘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

1962년 부산에서 태어난 소년 안철수는 매사에 호기심이 많아 뭔가를 만지면 꼭 분해를 해봐야 직성이 풀렸다.

탱크 비행기 등 플라스틱 모형 만들기를 좋아했고 과학잡지 등에 응모해 최우수상도 여러번 탔다.

친척집에 가면 분해할 수 있는 것은 뭐든지 찾아 산산이 분해해 놓는 바람에 친척들은 그가 올 때면 그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물건들을 올려놓느라 비상이 걸리기도 했다.

안 의장은 대대로 의사 집안이었던 내력과 타고난 머리로 서울대 의대에 진학했다.

그가 컴퓨터와 처음 만난 것은 1982년 의대 본과 1학년 시절이었다.

"같이 하숙하던 친구가 갖고 있던 애플 컴퓨터가 그렇게 멋있어 보일 수 없었어요.

바로 컴퓨터를 사서 방학 때마다 틈틈이 컴퓨터를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워낙 의대 공부가 바빠 전념할 수는 없었지만요,"

1986년 의대 졸업 후 처음으로 컴퓨터 바이러스란 용어를 접하면서 안 의장은 이것이 생물학적 바이러스과 유사할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했다.

마침 1988년 초 '브레인 바이러스'가 한국에 상륙했고,그의 컴퓨터도 이 바이러스에 감염됐던 터였다.

어린 시절부터 유별났던 안 의장의 호기심이 다시 발동하기 시작했다.

컴퓨터 관련 기계어를 공부하고 있던 안 의장은 이를 자신의 손으로 치료해 보고자 마음먹었고,치료방법을 개발해 낸 후 의학용어를 따 '백신'(치료제)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리고 백신을 모든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플로피 디스크에 저장해 무료로 공개했다.

우리나라 컴퓨터 사용자들은 바로 안철수로 인해 컴퓨터 바이러스가 뭔지,백신이 뭔지 알게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후 7년간 새로운 바이러스에 대항하는 백신을 만들고,이를 다시 무료로 배포하는 일을 반복했습니다.

하지만 새벽 3시에 일어나 시간을 쪼개 바이러스 연구와 프로그래밍을 하고 다시 학교로 가서 의학에 몰두하는 고된 하루하루였습니다."

안 의장은 이 기간에 서울대·단국대 의대 조교,일본 규슈대학 의학부 방문연구원 등을 거친다.

안 의장은 이 시기에 평생을 간직할 좌우명을 얻는다.

'어떤 문제에 부딪히면 나는 미리 남보다 시간을 두세 배 더 쓸 각오를 한다.

평범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수학의 노벨상이라는 필드상을 수상한 일본 수학자 히로나카 헤이스케의 말이다.

"제가 7년 동안 의대와 군의관을 거치면서 백신 프로그램을 개발할 수 있었던 것은 히로나카의 정신을 실천하고자 애써왔기 때문입니다.

후에 기업 경영자가 된 후에도 조직경영에 전혀 문외한이던 저를 10년 동안 버티게 한 원동력이기도 하지요."

1991년 박사학위를 받은 후 3년간 해군 군의관으로 군복무를 마친 1994년 서울대 의대 조교수 자리를 눈앞에 두고 결단의 시간을 맞는다.

안 의장은 더 이상 새벽에 '딴짓'을 하면서 의학연구를 계속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자칫 컴퓨터 전문가도,일류 의학자도 아닌 어설픈 인생이 되지 않을까 걱정도 됐다.

하지만 박사학위를 받기까지 의학도로서 이뤄 놓은 수많은 것들을 포기하는 건 쉽지 않았다.

그동안 닦아 놓았고,앞으로 펼쳐질 순탄한 날들을 마다하고 '불확실성'을 택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컴퓨터를 하면서 느끼던 자부심과 성취감 등은 의학을 공부하면서는 느낄 수 없었습니다.

의학은 나보다 훨씬 재능 있는 많은 사람들이 더 잘해낼 수 있을 것이라 느껴지는 순간 14년간 쌓아왔던 모든 것들을 깨끗이 포기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좋아하고 제가 잘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며 살아가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1995년 2월 안철수연구소를 설립하고 CEO로서 헤쳐나간 10년간의 세월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초창기에는 자금과 인력이 부족해 많은 고생을 해야만 했고,때때로 의대를 뛰쳐나온 것이 후회가 들기도 했다.

절대 흔들리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내린 인생의 결정이었건만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혹의 순간도 많았다.

한 외국 보안회사가 최소 1000만달러를 제시하며 안철수연구소를 인수하겠다고 타진한 적도 있었다.

닷컴과 벤처 열풍이 불었던 때에 '묻지마 투자'를 권하는 이들은 셀 수도 없었다.

어려운 선택의 기로에서 항상 그를 떠받쳤던 신념은 항상 '장기적인 관점에서 옳은 결정인가'란 물음이었다.

안철수연구소는 안 의장의 이런 신념을 토대로 기술연구에 몰두하며 매년 차근차근 성장해 나갔다.

그리고 10년째 되던 2005년 초,안 의장은 급작스레 대표이사직을 부사장에게 넘기고 홀연히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향후에는 전문가가 모든 결정권을 행사하는 사회가 됩니다.

미국의 벤처캐피털 회사들은 투자를 결정할 때 관련 분야의 전문가가 벤처회사를 평가하고 얼마를 투자할지 최종 결정을 내립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아직도 전문 심사역이 심사를 해도 결정권은 다른 사람에게 있는 경우들을 볼 수 있습니다.

삼성전자가 오늘의 자리에 있는 것은 이공계 CEO 등 전문성 높은 사람이 결정권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우리나라도 앞으로 이공계 출신들이 전문성을 바탕으로 보다 많은 역할을 할 시기가 오게 될 겁니다."

그는 가장 행복한 사람은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이 같은 사람'이라고 덧붙인다.

단지 사회의 인식이나 돈,단기적인 시야로 직업을 택하지 말고 정말 좋아하는 일인지 고민하고 결단을 내린 후에는 밀어붙이라는 얘기다.

지금은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하고 있지만 국내에선 수시로 그를 향해 손짓을 하고 있다.

한국의 보안업계를 위해 다시 돌아올 생각이 없느냐는 질문에 안 의장은 이런 답변으로 갈음했다.

"늦은 나이에 객지에서 공부를 하는 만큼 많이 알아가겠습니다.

혹시라도 저를 필요로 하는 순간이 된다면 그때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말입니다."

이해성 한국경제신문 IT부 기자 i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