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자녀를 둔 어머니,듀크대 경영학석사(MBA) 출신,세계적 자선재단의 공동회장…. 누구를 얘기하려는 것인지 모르는 게 정상이다.

힌트 하나 더. 세계 최고 부자이자 정보기술(IT) 업계의 거목,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회장의 부인이라면 어떨까.

시사상식에 관심 많은 학생들이라면 금방 멜린다 게이츠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빌 게이츠 회장이 2008년 은퇴하고 자선구호활동 등에 전념하겠다고 밝히면서 세간의 이목은 288억달러란 엄청난 기금의 '빌&멜린다 게이츠 재단'에 쏠렸다.

동시에 이 재단 공동 운영자인 멜린다 게이츠의 조용한 내조와 활발한 자선구호활동이 화제가 됐었다.

최근 멜린다는 연말에 다시 한번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화려하게 받았다. 월스트리트저널이 최근 선정한 앞으로 '주목할 여성 50인'에서 1위에 오른 것. 50인에 뽑힌 여성들이 거의 대부분 미국계 대기업의 최고 임원급이나 최고경영자(CEO)들인 것과 비교해도 눈에 확 띈다. 정확히 말하면 '(비즈니스계) 주목할 여성 50인'인데 1위를 자선활동가로 뽑았으니 말이다. 그가 빌 게이츠 회장과 아프리카의 말라깽이 어린이들을 보듬고 쓰다듬어주는 모습은 서구 언론들엔 천사 이상의 모습으로 비쳤나 보다.

2위에는 지난달 펩시코 회장 겸 CEO가 된 인도계 인드라 누이(51)가 차지했다. 코카콜라라는 거인과의 싸움을 계속해야 하는 펩시코의 수장 자리에 여성이 앉았으니 이목이 집중되지 않을리 없다. 이어 아이린 로젠펠드(53) 크라프트식품 CEO가 3위에 올랐다. 또 셰브론에서 일하다 종합식품그룹 아처 대니얼스 미들랜드의 CEO로 지난 5월 자리를 옮긴 패트리샤 워츠(53)가 4위로 뒤를 이었다. 아시아계인 안드레아 정 에이본프로덕츠 회장(5위)과 유럽연합(EU)의 닐리 크로스 반독점 담당 집행위원(6위)도 이름을 올렸다.

다음으로 패트리샤 루소 루슨트테크놀로지 회장,클라라 퍼스 런던증권거래소 CEO,앤 멀케이 제록스 회장,맥 휘트먼 e베이 회장 등 조금은 이름이 나 있는 여걸들이 50인에 선정됐다. 이 신문은 아시아에서 특히 주목할 10명의 여성도 선정했는데 이 중에 중국 영화배우 장쯔이(27)가 들어 있어 눈길을 끌기도 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50인을 선정하는 동시에 남성에 비해 열악한 여성 비즈니스인들의 근무 환경과 직장 내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이 존재함을 지적했다. 여성이 기업 최고위직에 기용되는 사례가 최근 늘고 있지만 여성의 고위직 승진을 가로막는 보이지 않는 장벽을 뜻하는 '유리 천장'(glass ceiling)은 여전히 존재한다는 얘기다.

예를 들어 미국 경제잡지 포천이 선정하는 '500대 기업'의 부사장급 이상 가운데 여성은 지난해 16.4%에 불과했다고 소개했다. 이는 2002년과 비교하면 0.7%포인트 증가하는 데 그친 수치다. 고액 연봉자도 남성에 비해 훨씬 적다. 대기업 상위 5명의 고액 연봉자 가운데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은 6.4%에 불과하다고 월스트리트저널은 보도했다.

AFP통신도 최근 리콜 라스테예리 앤드 어소시에이츠,크리스천 앤드 팀버스 등 회사의 조사 결과를 인용해 세계 증시에 상장돼 있는 북미와 유럽,아시아지역의 300대 기업 이사회에서 여성 이사 비율은 9.3%에 불과했다고 보도했다.

지역별로는 북미 회사의 여성 이사 비율이 15.6%로 가장 높았다. 이는 아시아 기업의 8배,유럽 기업(7.6%)의 두 배에 달하는 수치다. 국가별로 보면 스웨덴 회사들의 여성 이사 비율이 27%로 가장 높게 나타났다. 캐나다는 20%,핀란드 17.6%,미국에선 14.8%를 점했다. 반면 일본 기업들은 1.4%로 최하위권에 머물렀다.

크리스천 앤드 팀버스는 그러나 '포천 500대 기업'의 여성 CEO 수는 2001년 5명에서 최근 11명으로 늘어난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여성 CEO에 대한 인식이 그나마 개선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 중 6명은 식품이나 유통업체처럼 '핑크 칼라'(생계를 꾸려가기 위해 일터로 뛰어든 저임금 미숙련 여성 노동자를 일컫는 말)들이 많은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 3명은 IT 컴퓨터 업종에서 일하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CEO를 포함한 여성 기업 리더들로 범위를 좀 더 넓히면 여성의 재계 진출이 유통 등 여성적인 분야에서 벗어나 영업과 기획 등 재계의 거의 전분야로 확대되는 추세라고 강조했다. 여성이 EU 집행위나 미 증권거래위원회(SEC) 등 규제 당국에서 리더십을 발휘하는 경우가 늘고 있으며 게이츠 여사처럼 자선 활동에서도 두각을 나타내는 등 갈수록 활동이 다양해지고 있다고 전했다.

장규호 한국경제신문 국제부 기자 danielc@hankyung.com


[ 유럽 여성정치인 파워 커진다 ]

미국 중간선거에서 낸시 펠로시 민주당 하원 원내대표가 상당한 리더십을 발휘,민주당 승리의 주역이 되고 차기 하원의장에 지명되면서 세계 정치무대에서 여성의 파워가 커지고 있다. 정계의 '우먼 파워'가 약한 프랑스에서도 첫 여성 대통령 후보가 나와 이런 바람을 실감케 하고 있다. 평등을 외치면서도 상대적으로 여성들에게 보수적이었던 유럽 정계에서 여성들이 잇달아 권력의 정상에 오르거나 최고의 권좌를 넘보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 제1야당인 사회당은 지난 16일 열린 대선후보 경선에서 1년 전만 해도 중앙정치 무대에서 무명에 가까웠던 여성 정치인 세골렌 루아얄(53)을 당내 후보로 선출했다. 루아얄은 내년 4월 치러질 대선에서 집권 대중운동연합(UMP)의 니콜라 사르코지 내무장관과 일전을 치를 가능성이 크다. 전문가들은 루아얄이 지명도가 상대적으로 높은 사르코지를 꺾을지는 불투명하지만 루아얄의 부상으로 프랑스 내에서 여성 정치인의 위상과 이들을 바라보는 국민의 시선이 크게 달라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독일에선 지난해 11월 앙겔라 메르켈이 남성들이 득세하던 기민-사민당 연합에서 에드문트 슈토이퍼 기사당 당수를 누르고 2차 대전 이후 첫 여성 총리에 올랐다. 지난 5월에는 노동당의 마거릿 베케트가 영국 최초의 여성 외무장관직을 차지했다.

정치권의 여성바람은 상대적으로 북유럽에서 더 강하다. 노르웨이에서는 내과의사 출신인 그로 할렘 브룬트란트가 1981년 역대 최연소 여성 총리에 오른 뒤 3차례나 연임하면서 노르웨이 정계에서 여성 파워를 크게 강화시켰다. 보수적 가톨릭 국가인 아일랜드에서도 1990년 인권변호사 출신인 메리 로빈슨이 46세의 나이로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