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동독 공산정권이 무너지기 전 서독에서 활동한 동독의 비밀 정보원 수는 2만명이 넘었다. 1950년대 초 미국의 매카시 상원의원이 간첩으로 지목한 인물들은 대부분 실제 소련의 간첩이었다. 1967년 월남 대통령 선거에서 2위로 낙선한 야당 지도자는 공산화된 뒤 월맹의 고정간첩으로 드러났다.

냉전시대에 공산국가들이 자유 진영에 대규모로 간첩을 보내왔음을 입증하는 놀라운 실례들이다. 최근 국내에서도 386운동권 출신들이 연루된 간첩사건이 터져 뒤숭숭하다. 현대사에 기록된 간첩에 대해 살펴보자.

◆세계 최대 간첩단을 운용한 동독 슈타지

"비밀 정보원 수 2만~3만명. 첩자로 포섭된 서독 연방의원의 숫자는 원내 교섭단체를 구성할 정도. 총리 보좌관,여당 원내총무,통일부 장관도 간첩으로 포섭. 미남 공작원을 통해 서독 거물인사들의 여비서를 유혹해 정보 수집. 정계 재계 학계 종교계 언론계 학생운동권 등 사회 전반에 침투."

이처럼 동독 비밀 정보기관 슈타지(Stasi)는 서독을 상대로 미국 CIA나 소련 KGB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대대적인 공작을 벌였다. 후베르투스 크나베가 쓴 '슈타지 문서의 비밀'에 낱낱이 드러나 있다. 크나베는 수만건에 달하는 슈타지 공작문서들을 정리·분석하는 과정에서 슈타지의 서독 침투·파괴 활동이 상상을 초월할 만큼 광범위하고 깊숙이 진행됐음을 알게 됐다.

심지어 서독의 학생운동도 슈타지의 손아귀에 있었다. 서독 학생운동 조직 간부였던 볼프강 크라우스하르는 1998년 '공산주의자들에게 놀아난 우리들의 학창시절'이란 글을 발표해 큰 파장을 불러왔다. 동독이 서독 학생조직에 간첩을 침투시켜 반미시위와 반전운동을 조장했다는 것이다.

◆매카시가 지목한 대부분이 실제 간첩

미국 위스콘신주 출신 조지프 매카시 상원의원(공화당)은 1950년 2월 "국무성 안에 205명의 공산주의자가 있다"는 폭탄발언을 했다. 이후 4년간 미국 조야를 떨게했던 매카시즘 선풍의 시작이었다. 매카시즘은 6·25전쟁 등 공산세력의 급팽창에 위협을 느낀 미국민들로부터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미국 좌파들의 집요한 반격으로 매카시즘은 극우 반공주의의 광기를 드러낸 것처럼 인식되어 왔다.

그런데 매카시가 지목한 사람들이 실제로 간첩이었음이 뒤늦게 드러났다. 1995년 '베노나 프로젝트'라는 미국의 극비문서가 공개되면서다. 이 문서를 연구한 학자들에 의해 얄타회담에 참가한 국무부 고위 관료 엘저 히스,원자탄 기술을 소련에 넘긴 로젠버그 부부,브레튼우즈 협정을 탄생시킨 재무부 고위 관료 해리 화이트 등이 소련 간첩이었음이 밝혀졌다. 모두 매카시가 간첩이라고 지목한 사람들이었다.

로젠버그 부부 등은 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됐음에도 미국 좌파는 매카시즘의 희생양이 됐다고 선전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매카시즘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간첩은 스스로 간첩이라 하지 않는다

1967년 전쟁 와중에 치러진 월남 대통령 선거에서 11명의 후보 중 차점으로 낙선한 야당지도자 쭝딘쥬의 사례를 보자. 그는 민주 투사를 자처하며 유세 중 선동적인 연설로 반전 여론을 일으키고 월맹에 대한 유화정책을 주장했다. 월남이 공산화된 뒤에야 그가 월맹의 고정간첩이었음이 알려졌다.

공산국가 간첩들의 공통점은 건전한 민주화 운동가나 민족주의자,환경주의자들과 흡사한 주장을 펴면서 철저히 신분을 감춘다는 점이다. 슈타지의 경우 서독 양심세력들의 학생운동 평화운동 반전운동 등을 자신들에게 새로운 간첩을 공급하는 인력 창고로 여겼다. 북한 김정일 정권이 반전·반미·자주·통일을 외치며 남한의 평화운동과 궤를 같이 하는 듯하지만 뒤로는 비밀리에 핵을 개발해 온 것과 마찬가지다.

크나베는 동독 공산당이 40여년간 장기 독재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상당부분 서독의 소위 '진보적' 지식인에게 책임이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서독에서 활약한 간첩의 숫자나 범죄행위보다 사회주의 체제를 옹호했던 당시 서독 사회의 정치적·지적 분위기가 더 문제였다"고 밝혔다.

오형규 한국경제신문 경제교육연구소 연구위원 ohk@hankyung.com


삼국시대 도림에서 김수임ㆍ이수근 등

우리 역사속의 첩자

우리나라 역사에서 삼국시대는 고구려 백제 신라 3국이 700년간 서로 275회의 전쟁을 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전쟁은 첩자가 암약할 수 있는 온상이란 점에서 삼국시대는 첩보전의 시대기도 했다. 대표적인 첩자가 고구려 승려 도림과 백제의 좌평 임자였다.

도림은 백제로 들어가 뛰어난 바둑 솜씨로 개로왕의 신임을 얻었다. 백제의 내정을 살피는 동시에 개로왕을 부추겨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벌여 국고를 탕진하고 백성들을 곤궁하게 만드는 데 성공한다. 이후 고구려 장수왕은 475년 백제를 쳐서 한성을 함락하고 개로왕을 죽게 했다.

임자는 백제의 최고위급 실력자(좌평)였지만 나라 정보를 적국 신라의 장군 김유신에게 넘겨 결국 백제 멸망의 한 원인을 제공한 첩자였다. 임자가 자신의 안위를 위해 내부 정보를 유출함으로써 신라군은 마음놓고 백제를 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김유신은 실제 전투뿐 아니라 첩보전의 대가라는 평가도 받았다.

또한 낙랑군을 멸망시킨 고구려 호동왕자와 낙랑공주는 우리 역사 최초의 부부 간첩단인 셈이다.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일본도 첩보전에 능했다는 기록이 있다. 선조 29년(1596년) 사헌부에서 군사기밀이 새나가는 것은 간첩 때문이라며 비변사(비상 내각)와 승정원(왕 비서실)의 책임을 묻자 선조가 도승지를 파직하고 비변사의 관료를 구속 수사했다.

근래에 들어선 해방 직후 미 군정기에 간첩으로 활동한 김수임과 1960년대 위장 귀순 간첩 이수근 사건이 유명하다. 김수임은 미모의 인텔리로 영어회화에 뛰어나 미군 통역으로 활동하며 사교계의 여왕이 됐다.

그는 공산주의자 이강국(북한 초대 외무부장)의 연인으로 월북한 이강국의 대남 공작을 도와 자기 집을 남조선노동당의 거점으로 제공하고 각종 기밀을 넘기다 체포돼 6·25 직전 처형됐다.

북한 중앙통신 부사장이던 이수근은 1967년 판문점을 통해 위장 귀순했다. 그는 북한 실정을 폭로하는 강연 등으로 자신을 위장하며 남한의 기밀을 북한으로 보내다 발각돼 사형에 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