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1980년대 대학시절을 보낸 이른바 386세대(30대,80년대 학번,1960년대생)라면 누구나 목청껏 불렀던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이 노래 가사처럼 386세대는 자신의 미래보다 부조리한 세상에 대해 뜨겁게 고민하고,투쟁하던 세대였다.

386세대의 순수한 열정은 민주화를 쟁취하는데 큰 원동력이 됐다. 지금은 청와대,국회 등에서 국정을 주도하는 세력이 됐다. 하지만 386운동권의 상당수는 반독재.반미를 지나쳐 스스로 친북 주사파라는 극단으로 치달았다. 북한 핵실험 사태에 이어 최근 '386 간첩사건'으로 따가운 의혹의 시선까지 받게 됐다.

우리 사회에서 386세대는 이제 미래지향적 변혁의 선봉이 될 것인가,80년대 사고의 틀에 갇힌 시대착오적 혁명론자로 남을 것인가? 스스로 답해야 할 시점이 된 것이다. 386세대의 의미와 80년대 학생운동의 전개과정에 대해 알아보자.

◆자생적으로 탄생한 386

1980년은 한국 현대사에 큰 획을 긋는다. 1979년 10.26 사태로 전두환 신군부가 집권하자 곧 이어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 계엄군의 진압과정에서 약 200명이 사망한 이 사건은 막 대학생활을 시작한 386세대엔 지울 수 없는 악몽이 됐다. 이는 두고두고 갚지 못할 '빚'으로 여겨졌고 곧바로 80년대 치열한 학생운동의 뇌관이 됐다.

'80년 광주'의 기억은 그 이전 낭만적인 학생운동에 머물던 대학생들에게 머리는 '좌파 이념'으로,두 손은 돌과 화염병으로 무장하게 만들었다. 철저히 자생적인 386운동권이 탄생한 것이다. 학생운동은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과 합쳐져 1987년 6월 항쟁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했다.

386세대는 대학을 졸업한 뒤 대부분 사회인이 됐지만 상당수는 공장,농촌,빈민가로 달려갔고 1990년대 초부터는 정치권과 시민단체로 뛰어들었다.

◆극단으로 치달은 일부 386

386세대는 이전 세대에서 찾아보기 힘든 응집력을 가졌다. "사랑도,명예도 버리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 노력했다"는 자부심과 헌신성으로 특징 지워진다. '80년 광주'에 대한 채무의식은 크고 작은 시위현장에서 동지의식으로 뭉쳐졌다.

군사독재 정권과 이를 방조한 미국에 대한 반발로 출발한 학생운동은 이념화 학습과정을 거치며 엇나가기 시작했다. 80년대 중반 운동권은 핵분열을 일으킨다. 반미.반제국주의를 투쟁과제로 민족문제를 우선시하는 민족해방(NL)파와 마르크스.레닌주의 노선에 따라 노동자.빈민 등 계급문제에 치중한 민중민주(PD)파로 나뉘어 치열한 노선투쟁을 벌였다. 이후 계급보다는 민족문제가 더 공감대를 얻으며 NL파가 득세한다. 쉽게 말해 자주파(NL)와 평등파(PD) 간의 논쟁에서 자주파가 우위를 차지한 것이다.

민족해방은 결국 민족통일과 떼놓고 생각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NL파의 일부는 주사파(김일성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그룹)라는 친북좌익 학생조직을 형성하게 된다. 북한 인공기와 김일성 초상화를 걸어놓고 묵념한 뒤 주체사상을 학습하고 북한방송을 청취하는 등 북한의 남조선혁명론을 답습했다. 그 일단이 이번 간첩사건으로 불거진 셈이다.

◆386세대가 풀어야 할 숙제

우리나라의 민주화와 경제발전을 계기로 386세대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80년대 가졌던 생각을 바꿨다. 하지만 아직도 상당수의 386운동권은 80년대식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는 기본적으로 한국을 '모순 사회'로 규정한 데서 출발한다. 남한의 모순은 기본모순(미국 지주 매판자본가 대 민중간의 계급모순)과 주요모순(미 제국주의 대 민중간의 민족모순)이 있으며,혁명을 위해서는 먼저 주요모순을 해결해야 하므로 '주한미군 철수' 등 반미구호로 귀결되는 것이다.

또한 386운동권은 한국 현대사를 '반칙이 난무한 역사'로 파악하고 있다. 불과 한세대 만에 세계 최빈국에서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으로 우뚝 섰고 민주주의를 확고히 정착시킨 남한의 눈부신 성취를 부정한다. 이는 북한 정권에 정통성이 있다고 보고 나아가 주체사상과 북한식 통일론을 신봉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남한의 빈부격차,주한미군에는 주목해도 북한 인민들의 굶주림 등 '인권지옥'이란 현실과 북한 핵실험에 대해선 애써 외면하는 이중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386세대는 이제 37~46세이고 초.중.고교에 다니는 다녀를 둔 기성세대가 됐다. 국회를 비롯해 청와대,기업,시민단체,언론 등 각계에서 중간허리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앞으로 3년 뒤면 모두 40대가 되어 386이란 용어자체가 적합지 않게 된다. 컴퓨터에서 386은 486,586(펜티엄)으로 업그레이드됐다. 386세대도 이제는 80년대의 미망에서 벗어나 젊은 시절 가졌던 그 열의와 책임감을 미래 선진한국을 위해 써야 할 때가 됐다.

오형규 한국경제신문 경제교육연구소 연구위원 ohk@hankyung.com

* 알아야 할 용어들

◈386세대=386은 본래 미국 인텔사의 컴퓨터 CPU 성능을 표시하는 숫자(80386)다. 여기에 빗대 1990년대 중반부터 언론에선 나이는 30대이면서 80년대 대학 학번을 가진 1960년대 출생한 이들을 386세대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특히 전두환 정권시절 대학생활을 하면서 사회적 관심이나 책임감이 높아 치열한 학생운동을 펼친 세대이기도 하다.

◈NLPDR(National Liberation People's Democratic Revolution)=1985년 말께 대두된 사회변혁운동이론으로 우리말로는 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혁명. 북한의 남한 혁명노선과 일치하기도 한다. 이를 신봉하는 운동권이 1986년 이후 투쟁노선을 놓고 치열한 논쟁 끝에 둘로 나뉘게 된다. 이 가운데 민족해방에 비중을 둔 세력이 NL파(민족해방파)이고,민중민주주의를 우선하는 그룹이 PD파(민중민주파)이다. NL파는 반미자주화,조국통일을 주된 투쟁노선으로 삼고 있으며 현재 운동권 세력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PD파는 민족보다는 사회체제의 근본적 변혁을 위한 계급해방을 목표로 삼으며 노동운동 쪽에 비중을 두고 있다.

◈주사파(주체사상파)=1980년대 중반부터 세력을 떨친 국내 운동권 학생들의 일파. 김일성의 이른바 주체사상을 지도이념과 행동지침으로 내세웠다. NLPDR를 추종해 민족해방을 강조하면서 NL파의 골간을 이룬다. 통일을 지향하면서 군사정권인 제5공화국 타도에 앞장서 많은 학생들의 호응을 얻었으나 지나치게 북한노선에 치중해 이후 세력이 위축됐다.

◈매판자본(買辦資本.comprador capital)=식민지나 후진국 등에서 외국자본과 결탁해 자국민의 이익을 억압하는 토착자본. 예속자본이라고도 하며 쉽게 말해 '나라 팔아먹는 자본'이란 뉘앙스가 있다. 사회주의 이론에선 개도국에서 정치.경제적 지배력을 장악한 매판적 엘리트들이 선진 자본주의 국가와 수직적으로 야합해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면서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착취를 조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민중들은 이중 착취를 당한다는 주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