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맞는 새로운 복지모델은 무엇일까.

참여정부 들어 복지예산을 둘러싸고 좌·우 진영 간 치열한 사상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성장과 복지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려면 복지예산을 더 늘려야 한다"는 쪽과 "나라살림은 갈수록 빡빡해지는데 대책도 없이 복지예산만 늘린다"는 쪽의 의견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이런 와중에 최근 2007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방글라데시 그라민(Grameem)은행의 무하마드 유누스 총재가 선출되면서 새로운 복지모델로 '그라민은행'이 부각되고 있다.

'나라님도 못 구한다'는 가난을 은행이 나서서 구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해 예산의 절반가량을 복지예산으로 쏟아붓고도 빈부격차가 커지고 있다고 걱정하는 우리로서는 당연히 관심이 쏠릴 만하다.

마을(Grameem)이란 뜻을 가진 이 은행은 1976년 처음 문을 연 이래 30년 동안 총 660만명의 저소득층에 57억달러를 빌려준 것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대출받은 사람의 58%가 빈곤에서 탈출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자선사업을 한 것일까.

아니다.

돈도 적잖게 벌었다.

이 은행은 설립 직후 3년 동안 적자를 낸 것을 빼고는 계속 흑자를 기록하고 있다.

지난해 흑자규모는 700만달러였다.

이런 성과로 지난 6월 말 현재 방글라데시 전역에 2185개 지점과 1만8151명의 직원을 거느린 거대 은행으로 발전했다.

영업방식은 담보능력이 없는 극빈층에 무담보 대출을 해 주는 방식이다.

이자도 싸다.

일반대출금은 연 20%의 이자를 받지만 주택대출은 8%,학비대출은 5%의 이자만 받는다.

현지 시중은행 평균 대출금리가 15%에 달하는 데 비해 훨씬 싸다.

학비는 공부하는 동안엔 갚을 필요도 없다.

졸업한 뒤 벌어서 갚으면 된다.

거지에겐 이자도 받지 않고 대출해준다.

그런데도 상환율이 99%에 달한다.

비결은 신용과 연대책임에 있다.

대출자들은 제때 돈을 갚지 않거나 은행이 실시하는 재활 훈련 프로그램에 참여하지 않으면 더 이상 돈을 꿀 수 없게 된다.

개인적인 노력과 신용에 따라 대출을 늘릴 수도,줄일 수도 있는 구조다.

또 대출할 때는 반드시 다섯 명을 한 조로 짜서 대출해준다.

조원 중 한 명이 대출을 받으려면 조원 모두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대출금을 상환할 때도 모두 연대책임을 지운다.

대출이 개인의 일이 아니라 공동체 몫이라는 것을 일깨우고 단합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 은행의 운영방식은 복지측면보다 자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런 모델을 만든 것은 경제학자이자 현 총재인 무하마드 유누스에 의해서다.

금 세공업을 하는 아버지 밑에서 유복하게 자란 유누스 총재는 미국 벤더빌트대에서 계량경제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후 1972년 조국이 파키스탄에서 독립하자 귀국해 국가계획위원회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치타공대 경제학과 교수로 옮겼으나 이듬해 대학 옆 자나타 국립은행 지점에 들렀다가 평생의 봉사활동이자 직업을 갖게 됐다.

대학 인근 마을 어민 42명이 낡은 어망을 고치는 27달러짜리 기계를 사기 위해 대출을 신청했다가 담보도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하는 것을 지켜본 것.그는 그 자리에서 자신이 보증을 서 대출을 받도록 한 후 그 돈을 돌려받았다.

1976년 그는 아예 교수직을 버리고 그라민은행을 설립,무담보 소액대출(Micro-Credit)운동이라는 획기적인 대출방법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성공적인 빈곤층 자활프로그램으로 자리매김한 이 은행의 영업방식은 이제 전세계의 벤치마킹 대상이 되고 있다.

그라민은행 모델이 어느 나라에나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빈곤층의 자활을 수익사업을 통해 돕는다는 측면에서 참고할 부분이 많다는 것이다.

1979년 방글라데시 중앙은행이 무담보 소액대출 운동에 참여했으며 현재는 아프가니스탄 카메룬 등 저개발국은 물론 미국 캐나다 프랑스 등 37개국 9200만명이 이 제도를 본뜬 소액대출 운동을 벌이고 있다.

한국에도 그라민은행 한국지부로 '신나는 조합'이 설립돼 운영되고 있다.

100여명의 조합원들이 100만∼500만원씩 대출받아 99%가 대출금을 착실히 갚아나가고 있다.

박수진 한국경제신문 경제부 기자 notwoman@hankyung.com


"이 계명 지킬수 있니?"

■그라민 은행의 16계명

1. 그라민의 4개 모토인 '훈련·단합·용기·근면'을 잘 지킨다.
2. 가족을 부유하게 한다.
3. 망가진 집에서 살지 않고,집을 수리하거나 새집을 짓는다.
4. 1년 내내 야채를 재배해 최대한 많이 먹고 남는 것을 판다.
5. 경작 시기에는 되도록 씨를 많이 심는다.
6. 아이를 많이 낳지 않고 비용을 최대한 줄이며,건강을 잘 돌본다.
7. 아이들에게 교육하고 배우기 위해 돈을 벌 수 있다고 가르친다.
8. 아이들과 집 주변을 언제나 깨끗하게 한다.
9. 화장실을 지어 사용한다.
10. 펌프로 물을 마시며,아니면 물을 끓여 먹는다.
11. 지참금을 받거나 주지 않는다.
12. 부당한 일을 하거나 당하지 않는다.
13. 언제나 수입을 늘리기 위해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14. 언제나 남을 돕는다.
15. 만약 다른 모임에 어려움이 있을 때 회복을 돕는다.
16. 운동을 하고 사회활동에 참여한다.


'신나는 조합' '희망가게' '사회연대은행'

한국의 그라민은행들

한국에도 그라민은행과 같은 빈민은행 운동이 2000년대 들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부스러기사랑나눔회는 '신나는조합'이라는 그라민은행 한국지부를 운영하고 있다.

삼성그룹이 지원한 '사회연대은행'이란 빈민은행이 있고 고(故) 서성환 아모레퍼시픽 회장의 유지에 따라 아름다운재단은 '희망가게'를 운영 중이다.

밥상공동체의 '신나는은행'도 작년에 발족했다.

'신나는조합'(www.joyfulunion.or.kr)은 씨티은행이 종잣돈 5만달러(당시 환율로 약 6000만원)를 지원해 2000년 설립됐다.

대출 및 운영방식은 그라민은행 방글라데시본부와 같아 대출받는데 아무런 담보가 필요 없고 '가난한 사람'임을 입증하면 그만이다.

'사회연대은행'(www.bss.or.kr)은 2002년 삼성그룹에서 여성가장 창업 지원자금 10억원을 지원받아 마이크로 크레딧(무담보·무보증 소액대출) 사업을 펴고 있다.

신용불량자,여성·청년가장,성매매 피해여성 등의 극빈층에 돈을 빌려주고 창업을 지원한다불황 속에서도 대출금 상환율이 94%에 달해 일반 은행보다 월등히 높다.

'희망가게'는 서성환 회장이 출연한 50억원의 기금이 모태가 돼 아름다운재단(www.beautifulfund.org)이 저소득 모자가정에 자립을 위한 무담보 대출을 해주고 있는 것.2004년 1호점 이후 현재 11개 희망가게가 운영 중이고 가게 수익금으로 대출금을 나눠 갚는데 이자 1%는 다시 기부금이 된다.

또 빈곤층에 연탄 무료지원 운동을 펴온 밥상공동체(www.babsang.or.kr)가 지난해 10월 설립한 '신나는은행'도 희망가게처럼 무담보 무보증 무이자로 자활자금을 빌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