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5월,㈜코오롱 뉴욕지사의 배영호 과장은 뉴욕 빈민가의 한 아파트를 나와 택시를 탔다.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열리는 섬유전시회에 참석하기 위해 공항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택시기사는 뒷자리에 탄 손님을 룸미러로 힐끗 쳐다봤다.

손님의 분위기가 조금 이상했다.

그의 눈에는 이슬이 맺혀 있었다.

배 과장은 "회사 일이 아무리 중요해도 날 이렇게 내버려두고 가야만 하느냐"고 하소연하던 아내의 눈물 젖은 얼굴이 떠올라 가슴이 미어졌다고 한다.

안면근육이 마비되는 '아사풍'을 앓고 있던 아내는 바깥 출입도 못하는 상태였다.

하지만 출장은 가야 했다.

지사라고 해봐야 영업담당 부장과 자신 단 둘뿐이었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코오롱의 대표이사가 된 배영호 사장(62)에게 일생을 통해 가장 가슴 아팠던 순간이다.

2000년 그는 끝내 아내와 사별했다.

본적이 김천인 배 사장은 부산에서 자랐다.

어렸을 때부터 공부를 잘했다.

하지만 부친의 사업 실패로 일가족 모두 김천으로 낙향했다.

가세가 기울면서 당시 이화여대 약대를 다니던 누이는 중도에 학업을 포기했다.

김천중학교를 1등으로 졸업한 그는 경북고(43회)에 진학했다.

철도고와 체신고에서 장학금을 주겠다며 데려가려 했지만 왠지 내키지 않았다.

당시 대구의 큰아버지 댁에 들어가 3년 동안 학교를 다녔다.

경북고 시절 성적은 상위권을 꾸준히 유지했다.

김헌출 전 삼성물산 사장,박주은 전 한화종금 사장,박주환 전 법제처장 등과 가깝게 지냈다.

그러나 1962년 말 서울대에 원서를 냈다가 떨어지고 말았다.

당시 군사혁명으로 집권했던 박정희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이 "학생들 체력이 너무 약하니 체력테스트를 강화하라"고 지시한 것이 '화근'이었다.

몸이 약했던 배 사장은 턱걸이와 던지기 같은 체육실기 테스트에서 형편없는 점수를 받았다.

재수를 하면서까지 큰아버지댁에 머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대구 침산동의 어느 집에 입주 가정교사로 들어갔다.

학원은 엄두도 못냈다.

당시 제일모직 공장장이었던 조필제 세양주택 회장(81)의 집이었다.

조 회장은 고(故)이병철 삼성 회장의 조카 사위로,부지런하고 총명한 배 사장을 무척이나 귀여워했다.

이듬해 서울대 섬유공학과에 합격한 배 사장은 서울 북아현동의 고모댁에서 4년 동안 학교를 다녔다.

그는 여전히 가난한 고학생이었다.

이화여중 학생들을 모아 그룹 과외를 하기도 했다.

공릉동에 있던 서울 공대 수업을 마치고 오면 중·고생들 공부 지도하는 것으로 하루 해가 저물었다.

1970년 대학을 마치고 한국나이론(현 코오롱)에 입사했다.

첫 근무지는 섬유에서 실을 뽑는 제사과.대구 수성동에 공장이 있었고 그는 제사과장을 보조하는 '기술 담당'이었다.

회사 앞에 셋방을 얻어놓고 살았다.

1973년엔 본사 기획부로 인사발령이 났다.

당시 코오롱은 30만평의 구미공장에 폴리에스터와 나일론공장을 신축한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

이공계 출신의 기획부 근무는 이례적이었다.

하지만 대규모 공장 건설을 위한 업무는 회사의 전반적인 흐름을 파악하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됐다.

1974년 구미공장이 착공에 들어가자 이번엔 공장의 중합(섬유를 만들기 위해 원료를 합성하는 것)과장 자리가 떨어졌다.

직급은 대리였지만 회사는 그를 과장대행으로 앉혔다.

본사 근무도 경험을 해봤으니 이제 현장(구미)에 뿌리를 내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일에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고 업무처리 속도에 탄력도 붙었다.

하지만 1975년 11월 갑자기 공장장이 불러 뉴욕지사 주재원 자리를 통보했다.

예고 없는 인사였다.

"당시에는 전혀 인사배경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한번도 영업을 해보지 않은 사람을 해외지사에 내보낸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거든요."

배경은 나중에 밝혀졌다.

당시 코오롱의 영업담당 상무는 이상득 국회 부의장이었다.

코오롱은 뉴욕에 해외지사 1호를 설립키로 하고 당초 영업출신 2명을 내보내려고 했다.

하지만 이 상무가 "뉴욕지사를 처음 만드는 데 엔지니어도 한 사람 내보내야 현장의 사기가 올라간다"고 건의해 뉴욕으로 가게 된 것이다.

물론 그때까지 이 부의장과 배 사장은 일면식도 없었다.

그의 전성시대는 1981년 귀국한 뒤 타이어코드 담당 부장이라는 자리를 맡은 뒤 시작됐다.

당시 타이어코드는 만년 적자사업으로 가동률도 형편없었다.

전체 물량의 70%를 금호타이어에 팔고 있었기 때문에 금호가 거래를 줄이면 즉각적인 타격을 받는 구조였다.

매출구조를 다변화하기 위해 굿이어 브리지스톤 등의 해외메이커와 본격적으로 접촉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전화를 걸었던지 "Y.H.Bae"라는 영문 이니셜만 대면 다 알았다.

영업의 절정은 코오롱과 경쟁관계에 있던 효성의 형제회사 한국타이어에 납품을 성사시킨 일이었다.

배 사장이 한국타이어를 거래선으로 뚫을 줄은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다.

배 사장은 "우리 물건을 10%만 갖다 써달라.품질은 내가 보증하겠다"며 끈질기게 찾아갔다.

거래는 1년 만에 성사됐다.

타이어코드 사업은 1년 만에 흑자전환됐고 매출은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그 후론 거칠 것이 없었다. 가는 곳마다 성과를 냈다. 1998년 11월엔 코오롱유화와 코오롱제약 두 개 회사의 대표이사를 한꺼번에 맡았다.

적자기업이었던 제약은 단번에 흑자로 돌려놓았고 유화는 성장기반을 탄탄하게 다져놓았다. 그룹의 핵심인 ㈜코오롱이 잦은 노사분규와 과당경쟁으로 흔들릴 때 이웅열 회장은 서슴없이 배 사장을 사령탑으로 투입했다.

㈜코오롱에서 잔뼈가 굵어 수많은 성공스토리를 엮어냈던 배 사장 외에는 대안을 찾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배 사장은 과거 뉴욕지사 근무시절 사귀었던 다른 한국 기업체 직원들 중 서울로 돌아온 사람은 자신이 유일하다고 말했다.

모두 뉴욕에 눌러앉기 위해 회사에 사표를 내고 개인사업체를 꾸렸다는 것.

"영주권을 받으려고 하면 받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개인으로서 성장가능성을 생각해봤을 때 고생이 되더라도 첫 직장을 떠나지 않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렵게 공부해서 좋은 기업에 취직했는데 미국에서 식당이나 이발소를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조일훈 한국경제신문 산업부 기자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