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 김경준 딜로이트투쉬 파트너 >
->한국경제신문 8월31일자 A38면
지난 4월 산악인 엄홍길 대장의 권유로 히말라야 원정대에 무턱대고 동참했다.
평소 동경하던 히말라야의 바람과 잔설(殘雪)을 온 몸으로 느끼면서 대자연의 경건함과 위대함에 고개를 숙이게 됐다.
그러나 무엇보다 히말라야에 사는 사람들의 녹록하지 않은 삶을 접하고 우리의 과거를 돌이켜 보는 기회가 됐다.
히말라야 트레킹을 하려면 대개 포터를 고용한다.
30kg의 짐을 지는 포터의 하루 일당은 우리 돈 5000원가량이었다.
숙식비가 포함돼 있기 때문에 실제 수입은 하루 4000원 안팎에 불과했다.
그들은 300원 정도의 숙박비를 아끼기 위해 영하로 떨어지는 밤 기온에 노숙도 불사했다.
험한 산길을 걷는 포터들에게 신발이란 레저용품이 아니라 필수 자본재이지만,돈이 없어 슬리퍼를 신고 있는 사람이 절반이 넘었다.
그나마 고등학교 졸업생이 네팔에서 취직하면 4만원 정도의 월급을 받으니 보통사람에게 포터는 고소득 직업으로 간주됐다.
형편이 가장 낫다는 수도 카트만두의 생활도 1960년대 우리나라 수준이었다.
1960년대 초반 우리보다 잘 살았던 네팔의 현재 국민소득이 200달러 수준이니 인플레이션을 감안하면 변화가 없는 셈이다.
보통 사람의 사회적 기회는 농부,포터가 고작이고 해외에서 좋은 일자리를 얻는 것은 로또당첨이다.
네팔은 강대국 중국 인도에 둘러싸인 지정학적 특성에다 카스트 제도와 절대왕정이 결합된 국내 사정까지 겹쳐 폐쇄정책을 유지했고 경제적 관점에서 시간은 멈추었다.
네팔인들조차 '에베레스트의 눈이 녹기 전까지 미래는 없다'고 체념하는 지경이다.
같은 기간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은 1960년 79달러에서 2005년 1만6291달러로 223배 늘어났다.
세계 최빈국에 속하던 우리나라가 이처럼 발전한 것은 좁은 내수시장에 매달리지 않고 넓은 세계시장에 접근하는 개방정책을 국가 전략으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가발과 섬유에서 간신히 비교우위를 찾아내던 후진국이 자동차 반도체와 같은 첨단산업에서 세계 수준으로 올라섰다.
자유무역이란 강대국이 약소국을 착취하는 논리에 불과하다는 사이비(似而非) 경제이론가들의 시각에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
육지로 둘러싸인 네팔과 달리 우리나라는 다행히 바다가 있었기에 개방을 택하기도 쉬웠다.
우리가 바다를 통해 세계로 나가는 동안 같은 바다를 끼고 있는 북한은 폐쇄정책을 선택했다.
같은 민족 북한은 위정자의 잘못된 선택으로 식량 부족 때문에 사람이 굶어죽는 지상지옥을 만들었다.
지난 반 세기 동안 전개된 글로벌 경제체제는 국가 간의 양극화를 불러왔다.
개방을 통해 글로벌 경제라는 열차에 올라탄 나라와 폐쇄정책을 고집한 나라의 운명은 완전히 갈라졌다.
이는 열차가 출발할 때 동일선상에 있던 우리나라 북한 네팔의 오늘이 말해주고 있다.
최근 우리나라는 자유무역협정(FTA)을 통해 개방의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가고 있다.
지난 50년간 우리가 거둔 성공을 지속시키기 위해 FTA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FTA를 체결하기 위한 전술적인 세부사항은 별도로 하더라도 FTA 체결이라는 국제적 흐름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우리의 성공경험을 부정하고 시대변화를 외면하는 것이다.
철저히 국가 이익의 관점에서 경제적 논리로 접근해야 할 FTA가 정치적 관점의 이념투쟁으로 변질되고 있는 것은 본말의 전도(顚倒)다.
FTA 자체를 반대하는 일부 과격한 논리는 80년대 초반 '남북한을 합쳐 8000만명의 내수시장이면 충분히 독자생존과 발전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던 시대착오적인 민족경제론과 맥락이 맞닿아 있다.
민족경제론은 선명하고 달콤했지만 허구에 불과했고 우리의 오늘날은 자본주의 경제체제와 세계 수출시장을 겨냥한 개방전략이 가져왔다.
변화에서 대개 손실을 볼 사람은 분명하지만 이익을 볼 사람은 그렇지 않다.
따라서 손실을 볼 사람은 격렬한 반대에 나서지만 불분명한 이익이 기대되는 사람은 미지근한 찬성에 그친다.
오늘날 FTA를 둘러싼 논란을 보면 직접 손해를 보지 않는 사람조차 지적 허영과 낡은 이념에 파묻혀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는 경우가 많다는 게 문제다.
< 문 닫은 나라치고 잘사는 나라 없다 >
히말라야 산맥 자락에 걸쳐 있는 네팔은 우리 국민들에게 친숙한 나라다.
1960년대 초만 해도 네팔의 소득 수준은 한국보다 높았다.
네팔이 잘 살았다기보다는 그 만큼 한국이 세계적으로 못사는 나라였다.
하지만 40여년이 지난 현재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팔자 고친 나라로 꼽힌다.
반면 네팔은 아직도 1인당 국민소득 200달러라는 빈곤의 굴레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분명 출발선은 비슷했는데 두 나라 경제의 발전 수준은 비행기와 거북이 속도 만큼이나 차이가 난 것이다.
이처럼 격차가 벌어진 데 대해 김경준 파트너(컨설팅회사의 임원급 컨설턴트)는 개방경제와 폐쇄경제의 두 갈래 길에서 어느 쪽을 택했느냐가 좌우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남한과 북한의 경제가 수십배 차이가 나는 것도 지난 반세기 동안 전개된 글로벌 개방경제체제에 편승하느냐,문을 닫고 사느냐의 선택이 결정적으로 운명을 갈랐음을 누구도 부인하기 어렵다.
실제로 1970~1980년대 개발도상국 중 개방경제를 선택한 나라의 연평균 성장률은 4.5%에 육박하는 반면,폐쇄경제 국가들은 평균 0.7% 성장에 그쳤다.
경제 규모가 두 배가 되는데 연평균 성장률이 4.5%이면 16년이 걸리지만,0.7%인 경우엔 무려 102년이나 걸린다.
이는 경제가 멈춰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여년 전 아담 스미스가 갈파했던 것처럼, 개방과 시장경제가 국민들을 잘 살게 만든 실례는 한국 싱가포르 대만 홍콩이나 선진국들에서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김경준 파트너는 세계 경제의 큰 조류인 FTA를 반대하는 것은 지극히 시대착오적이라고 비판한다.
자유무역을 강대국이 약소국을 착취하는 논리로 몰아가는 종속이론이나 허울 좋은 민족경제론적 시각으론 오늘날 한국 경제의 성공을 설명할 길이 없다.
만약 종속이론이 맞았다면 한국이 세계시장 점유율 1,2위를 다투는 산업을 여러 개 거느리는 게 애초에 불가능했어야 옳다.
결론은 자명하다.
지금이라도 네팔이나 북한처럼 꽁꽁 닫아걸고 다 함께 못 사는 나라를 만들 것인가,아니면 세계 경제 흐름에 맞춰 문을 열고 지속적인 경제발전을 꾀할 것인가.
오형규 한국경제신문 경제교육연구소 연구위원 ohk@hankyung.com
->한국경제신문 8월31일자 A38면
지난 4월 산악인 엄홍길 대장의 권유로 히말라야 원정대에 무턱대고 동참했다.
평소 동경하던 히말라야의 바람과 잔설(殘雪)을 온 몸으로 느끼면서 대자연의 경건함과 위대함에 고개를 숙이게 됐다.
그러나 무엇보다 히말라야에 사는 사람들의 녹록하지 않은 삶을 접하고 우리의 과거를 돌이켜 보는 기회가 됐다.
히말라야 트레킹을 하려면 대개 포터를 고용한다.
30kg의 짐을 지는 포터의 하루 일당은 우리 돈 5000원가량이었다.
숙식비가 포함돼 있기 때문에 실제 수입은 하루 4000원 안팎에 불과했다.
그들은 300원 정도의 숙박비를 아끼기 위해 영하로 떨어지는 밤 기온에 노숙도 불사했다.
험한 산길을 걷는 포터들에게 신발이란 레저용품이 아니라 필수 자본재이지만,돈이 없어 슬리퍼를 신고 있는 사람이 절반이 넘었다.
그나마 고등학교 졸업생이 네팔에서 취직하면 4만원 정도의 월급을 받으니 보통사람에게 포터는 고소득 직업으로 간주됐다.
형편이 가장 낫다는 수도 카트만두의 생활도 1960년대 우리나라 수준이었다.
1960년대 초반 우리보다 잘 살았던 네팔의 현재 국민소득이 200달러 수준이니 인플레이션을 감안하면 변화가 없는 셈이다.
보통 사람의 사회적 기회는 농부,포터가 고작이고 해외에서 좋은 일자리를 얻는 것은 로또당첨이다.
네팔은 강대국 중국 인도에 둘러싸인 지정학적 특성에다 카스트 제도와 절대왕정이 결합된 국내 사정까지 겹쳐 폐쇄정책을 유지했고 경제적 관점에서 시간은 멈추었다.
네팔인들조차 '에베레스트의 눈이 녹기 전까지 미래는 없다'고 체념하는 지경이다.
같은 기간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은 1960년 79달러에서 2005년 1만6291달러로 223배 늘어났다.
세계 최빈국에 속하던 우리나라가 이처럼 발전한 것은 좁은 내수시장에 매달리지 않고 넓은 세계시장에 접근하는 개방정책을 국가 전략으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가발과 섬유에서 간신히 비교우위를 찾아내던 후진국이 자동차 반도체와 같은 첨단산업에서 세계 수준으로 올라섰다.
자유무역이란 강대국이 약소국을 착취하는 논리에 불과하다는 사이비(似而非) 경제이론가들의 시각에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
육지로 둘러싸인 네팔과 달리 우리나라는 다행히 바다가 있었기에 개방을 택하기도 쉬웠다.
우리가 바다를 통해 세계로 나가는 동안 같은 바다를 끼고 있는 북한은 폐쇄정책을 선택했다.
같은 민족 북한은 위정자의 잘못된 선택으로 식량 부족 때문에 사람이 굶어죽는 지상지옥을 만들었다.
지난 반 세기 동안 전개된 글로벌 경제체제는 국가 간의 양극화를 불러왔다.
개방을 통해 글로벌 경제라는 열차에 올라탄 나라와 폐쇄정책을 고집한 나라의 운명은 완전히 갈라졌다.
이는 열차가 출발할 때 동일선상에 있던 우리나라 북한 네팔의 오늘이 말해주고 있다.
최근 우리나라는 자유무역협정(FTA)을 통해 개방의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가고 있다.
지난 50년간 우리가 거둔 성공을 지속시키기 위해 FTA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FTA를 체결하기 위한 전술적인 세부사항은 별도로 하더라도 FTA 체결이라는 국제적 흐름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우리의 성공경험을 부정하고 시대변화를 외면하는 것이다.
철저히 국가 이익의 관점에서 경제적 논리로 접근해야 할 FTA가 정치적 관점의 이념투쟁으로 변질되고 있는 것은 본말의 전도(顚倒)다.
FTA 자체를 반대하는 일부 과격한 논리는 80년대 초반 '남북한을 합쳐 8000만명의 내수시장이면 충분히 독자생존과 발전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던 시대착오적인 민족경제론과 맥락이 맞닿아 있다.
민족경제론은 선명하고 달콤했지만 허구에 불과했고 우리의 오늘날은 자본주의 경제체제와 세계 수출시장을 겨냥한 개방전략이 가져왔다.
변화에서 대개 손실을 볼 사람은 분명하지만 이익을 볼 사람은 그렇지 않다.
따라서 손실을 볼 사람은 격렬한 반대에 나서지만 불분명한 이익이 기대되는 사람은 미지근한 찬성에 그친다.
오늘날 FTA를 둘러싼 논란을 보면 직접 손해를 보지 않는 사람조차 지적 허영과 낡은 이념에 파묻혀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는 경우가 많다는 게 문제다.
< 문 닫은 나라치고 잘사는 나라 없다 >
히말라야 산맥 자락에 걸쳐 있는 네팔은 우리 국민들에게 친숙한 나라다.
1960년대 초만 해도 네팔의 소득 수준은 한국보다 높았다.
네팔이 잘 살았다기보다는 그 만큼 한국이 세계적으로 못사는 나라였다.
하지만 40여년이 지난 현재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팔자 고친 나라로 꼽힌다.
반면 네팔은 아직도 1인당 국민소득 200달러라는 빈곤의 굴레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분명 출발선은 비슷했는데 두 나라 경제의 발전 수준은 비행기와 거북이 속도 만큼이나 차이가 난 것이다.
이처럼 격차가 벌어진 데 대해 김경준 파트너(컨설팅회사의 임원급 컨설턴트)는 개방경제와 폐쇄경제의 두 갈래 길에서 어느 쪽을 택했느냐가 좌우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남한과 북한의 경제가 수십배 차이가 나는 것도 지난 반세기 동안 전개된 글로벌 개방경제체제에 편승하느냐,문을 닫고 사느냐의 선택이 결정적으로 운명을 갈랐음을 누구도 부인하기 어렵다.
실제로 1970~1980년대 개발도상국 중 개방경제를 선택한 나라의 연평균 성장률은 4.5%에 육박하는 반면,폐쇄경제 국가들은 평균 0.7% 성장에 그쳤다.
경제 규모가 두 배가 되는데 연평균 성장률이 4.5%이면 16년이 걸리지만,0.7%인 경우엔 무려 102년이나 걸린다.
이는 경제가 멈춰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여년 전 아담 스미스가 갈파했던 것처럼, 개방과 시장경제가 국민들을 잘 살게 만든 실례는 한국 싱가포르 대만 홍콩이나 선진국들에서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김경준 파트너는 세계 경제의 큰 조류인 FTA를 반대하는 것은 지극히 시대착오적이라고 비판한다.
자유무역을 강대국이 약소국을 착취하는 논리로 몰아가는 종속이론이나 허울 좋은 민족경제론적 시각으론 오늘날 한국 경제의 성공을 설명할 길이 없다.
만약 종속이론이 맞았다면 한국이 세계시장 점유율 1,2위를 다투는 산업을 여러 개 거느리는 게 애초에 불가능했어야 옳다.
결론은 자명하다.
지금이라도 네팔이나 북한처럼 꽁꽁 닫아걸고 다 함께 못 사는 나라를 만들 것인가,아니면 세계 경제 흐름에 맞춰 문을 열고 지속적인 경제발전을 꾀할 것인가.
오형규 한국경제신문 경제교육연구소 연구위원 o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