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튼 우즈체제 아래서의 환율제도는 조정가능한 페그제라고 했다.
다시 말해 금의 가치에 자국 통화의 가치를 고정시키고 '근본적인 불균형'이 발생하면 상하 10% 범위 내에서 조정이 가능토록 한 것이었다.
그런데 브레튼 우즈체제가 성립할 당시 자국통화의 가치를 고정시키는 대상으로는 금 외에 '금의 가치에 고정된 외국통화'도 가능케 돼 있었다.
국제거래에 있어 금 거래가 여러 가지로 불편을 초래하고 그 양도 많지 않았다는 현실적 이유로 이른바 기축통화를 도입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나라의 통화가 기축통화가 될 것인가.
그것은 당연히 국제경제체제에서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나라의 통화여야 한다.
왜냐하면 다른 나라들이 기축통화의 가치에 자국통화의 가치를 고정시키기 위해서는 기축통화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브레튼 우즈체제가 출범할 당시 후보는 자명한 듯 보였다.
우선 2차대전 이후 세계경제의 중심으로 부상한 미국과 19세기 이후 그동안 세계경제의 주도권을 쥐고 흔들어 왔던 영국이 그들이었다.
그러나 막상 2차대전이 끝나고 나니 상황이 그리 간단치만은 않았다.
우선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많은 나라들은 전후 복구를 위해 많은 물자를 수입해야 했고,반면에 생산시설이 많이 파괴돼 수출능력은 부족했다.
따라서 이들은 대규모 무역적자를 낼 수밖에 없었고,이는 곧 자본부족으로 이어졌다.
반면 미국은 무역흑자를 기록하고 있었기 때문에 국제시장에서 달러에 대한 수요와 공급 사이에는 심각한 차이,즉 달러 갭(dollar gap)이 나타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브레튼 우즈체제 하의 국제통화기금(IMF)이 1947년 3월 기능하기 시작했고,영국은 그 해 7월 금 태환(파운드화를 금으로 바꿔주는 것) 재개를 선언했다.
당시 영국연방국들을 중심으로 영국의 파운드화를 외환으로 보유하고 있던 많은 나라들이 있었는데 이를 파운드 블록이라고 한다.
그런데 영국이 1947년 금 태환을 재개하자,영국의 경제상황에 불안을 느끼던 이들 나라가 보유하고 있던 파운드에 대해 대대적으로 태환을 요구하게 됐다.
견디다 못한 영국은 한 달여 만에 다시 파운드화의 금태환 정지를 선언했고,국제통화체제에서 영국 파운드화의 지위는 결정적 손상을 입게 됐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브레튼 우즈가 합의될 당시 정해진 환율이 잘못 설정됐다는 것이다.
유럽의 대부분 국가들은 전후 복구를 위해 많은 물자를 수입해야 했다.
그런데 많은 물자를 수입할 필요가 있다면,당연히 자국통화의 가치를 높게 평가해야 할 것이다(그래야 물건을 외국으로부터 싸게 사올 수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유럽국가들이 자국통화를 고평가했고,이런 문제는 경제가 회복되면서 점차 제자리를 찾아갈 것으로 생각됐다.
그런데 문제는 경제회복이 나라마다 그 규모나 속도에 있어 차이를 보였다는 것이다.
이는 곧 국가별로 여러 가지 환율이 존재하는 상황을 만들었다.
즉 공식적인 달러-파운드 환율은 £1=$4이었지만 예를 들어 이탈리아에서는 달러-파운드 환율이 £1=$2.6이 되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미국은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각국에 환율의 현실화를 요구하게 됐고,마침내 영국이 1949년 9월 환율을 £1=$2.8로 30% 가까이 평가절하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파운드블록을 비롯한 유럽의 대부분 국가들이 다투어 평가절하했고,이로써 미국은 1950년 이후 세계통화체제에서 사실상 유일한 기축통화로 자리잡게 됐다.
이렇게 해서 브레튼 우즈체제를 이끌었던 '금환본위제(gold-dollar standard)'가 탄생했던 것이다.
환율조정으로 유럽국가들의 수출여력이 개선되면서 달러 갭 문제도 해소됐고,달러를 기축으로 국제통화가 안정되면서 1950년대 세계경제는 빠른 회복과 성장세를 구가하게 됐다.
노택선 한국외국어대 경제학과 교수 tsroh@hufs.ac.kr
다시 말해 금의 가치에 자국 통화의 가치를 고정시키고 '근본적인 불균형'이 발생하면 상하 10% 범위 내에서 조정이 가능토록 한 것이었다.
그런데 브레튼 우즈체제가 성립할 당시 자국통화의 가치를 고정시키는 대상으로는 금 외에 '금의 가치에 고정된 외국통화'도 가능케 돼 있었다.
국제거래에 있어 금 거래가 여러 가지로 불편을 초래하고 그 양도 많지 않았다는 현실적 이유로 이른바 기축통화를 도입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나라의 통화가 기축통화가 될 것인가.
그것은 당연히 국제경제체제에서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나라의 통화여야 한다.
왜냐하면 다른 나라들이 기축통화의 가치에 자국통화의 가치를 고정시키기 위해서는 기축통화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브레튼 우즈체제가 출범할 당시 후보는 자명한 듯 보였다.
우선 2차대전 이후 세계경제의 중심으로 부상한 미국과 19세기 이후 그동안 세계경제의 주도권을 쥐고 흔들어 왔던 영국이 그들이었다.
그러나 막상 2차대전이 끝나고 나니 상황이 그리 간단치만은 않았다.
우선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많은 나라들은 전후 복구를 위해 많은 물자를 수입해야 했고,반면에 생산시설이 많이 파괴돼 수출능력은 부족했다.
따라서 이들은 대규모 무역적자를 낼 수밖에 없었고,이는 곧 자본부족으로 이어졌다.
반면 미국은 무역흑자를 기록하고 있었기 때문에 국제시장에서 달러에 대한 수요와 공급 사이에는 심각한 차이,즉 달러 갭(dollar gap)이 나타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브레튼 우즈체제 하의 국제통화기금(IMF)이 1947년 3월 기능하기 시작했고,영국은 그 해 7월 금 태환(파운드화를 금으로 바꿔주는 것) 재개를 선언했다.
당시 영국연방국들을 중심으로 영국의 파운드화를 외환으로 보유하고 있던 많은 나라들이 있었는데 이를 파운드 블록이라고 한다.
그런데 영국이 1947년 금 태환을 재개하자,영국의 경제상황에 불안을 느끼던 이들 나라가 보유하고 있던 파운드에 대해 대대적으로 태환을 요구하게 됐다.
견디다 못한 영국은 한 달여 만에 다시 파운드화의 금태환 정지를 선언했고,국제통화체제에서 영국 파운드화의 지위는 결정적 손상을 입게 됐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브레튼 우즈가 합의될 당시 정해진 환율이 잘못 설정됐다는 것이다.
유럽의 대부분 국가들은 전후 복구를 위해 많은 물자를 수입해야 했다.
그런데 많은 물자를 수입할 필요가 있다면,당연히 자국통화의 가치를 높게 평가해야 할 것이다(그래야 물건을 외국으로부터 싸게 사올 수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유럽국가들이 자국통화를 고평가했고,이런 문제는 경제가 회복되면서 점차 제자리를 찾아갈 것으로 생각됐다.
그런데 문제는 경제회복이 나라마다 그 규모나 속도에 있어 차이를 보였다는 것이다.
이는 곧 국가별로 여러 가지 환율이 존재하는 상황을 만들었다.
즉 공식적인 달러-파운드 환율은 £1=$4이었지만 예를 들어 이탈리아에서는 달러-파운드 환율이 £1=$2.6이 되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미국은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각국에 환율의 현실화를 요구하게 됐고,마침내 영국이 1949년 9월 환율을 £1=$2.8로 30% 가까이 평가절하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파운드블록을 비롯한 유럽의 대부분 국가들이 다투어 평가절하했고,이로써 미국은 1950년 이후 세계통화체제에서 사실상 유일한 기축통화로 자리잡게 됐다.
이렇게 해서 브레튼 우즈체제를 이끌었던 '금환본위제(gold-dollar standard)'가 탄생했던 것이다.
환율조정으로 유럽국가들의 수출여력이 개선되면서 달러 갭 문제도 해소됐고,달러를 기축으로 국제통화가 안정되면서 1950년대 세계경제는 빠른 회복과 성장세를 구가하게 됐다.
노택선 한국외국어대 경제학과 교수 tsroh@huf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