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법 아시아나항공 부회장에게 CEO(최고경영자) 자리까지 오르게 된 비결을 물었다. "비결은 없고 이유는 있습니다.
바로 서울대 입시에서 떨어졌기 때문입니다"라는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그는 1963년 서울대 경영학과에 지원했으나 고배를 마시고 후기대학인 경희대에 들어갔다.
재수를 하는 것도 방법이지만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해 이를 악물고 공부했다.
서울대를 나온 사람보다 못하다는 소리는 결코 듣고 싶지 않았다.
맡은 일은 뭐든지 열심히 했다.
이렇게 배양된 삶에 대한 습관과 태도가 그의 운명을 CEO로 밀어올렸다는 얘기다.
박 부회장은 종합상사 출신이다.
배재고(12회),경희대 정외과를 거쳐 1969년 11월 ㈜금호에 입사했다.
'수출입국(輸出立國)'이라는 슬로건 아래 20년간 수출전선을 누볐다.
활달하고 담이 컸던 그에게 사람 만나고 물건 파는 일은 잘 어울렸다.
처음엔 타이어를 취급했지만 나중엔 농가에서 나오는 볏짚 머리를 일본에 수출하고 서양에서 '몽크피시(monkfish)'라고 부르는 아귀도 프랑스에 내다파는 등 안 팔아본 것이 없었다.
젊은 날의 대부분은 중동시장에서 보냈다.
지금은 아스라한 추억으로 남아 있지만 당시 겪었던 간난신고(艱難辛苦)는 이루 말할 수가 없다.
1975년 국제박람회 참석을 위해 이란에 갔다가 본사로부터 한 통의 전문을 받았다.
사우디아라비아 제다에 있는 바이어가 철근 1만t을 구매하겠다고 하니 그를 만나 계약을 체결하라는 내용이었다.
문제는 사우디아라비아 비자가 없었다는 것.새로 비자를 받으려면 몇 달을 기다려야 할 판이었다.
낙담해서 호텔로 돌아와 잘 알지도 못하는 프런트 직원에게 푸념을 늘어놓았더니 뜻밖에도 사우디 항공사 기장과 줄이 닿게 해주었다.
일단 무비자 상태로 비행기를 타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중간 기착지인 리야드에서 불법 입국 혐의로 체포돼 감옥에 갇혔다.
"제다를 거쳐 베이루트로 갈 예정이어서 비자가 없어도 되는 줄 알았다"고 우겼다.
우여곡절 끝에 기장에게 여권을 맡기는 조건으로 제다행이 허용됐다.
물론 바이어를 만나 2500만달러짜리 계약을 성사시켰다.
이번에는 사우디를 어떻게 빠져 나오느냐가 문제였다.
여권을 되찾으려고 시도하다가 다시 철창 신세를 지고 말았다.
사우디 경찰도 바보는 아니었던 것이다.
결국 소식을 들은 바이어가 외무성에 선처를 부탁해 베이루트로 강제출국당하는 선에서 마무리됐다.
베이루트 얘기가 나오자 박 부회장은 "거기도 참 골때렸다"며 웃었다.
1970년대 후반 중화학제품을 팔기 위해 레바논에 출장갔을 때의 일.베이루트 시내에선 기독교 민병대와 이슬람 민병대가 교전을 벌이며 대치하고 있었다.
현지 주재원과 식사를 하기 위해 영국 식당으로 갔다.
그런데 갑자기 얼큰한 음식이 생각나 길 건너 스페인 식당으로 발길을 옮겼다.
수저를 들어 수프를 막 떠먹으려는 순간 '꽝'하는 폭발음과 함께 바로 눈앞에 있던 영국 식당이 통째로 날아갔다.
폭탄테러였다.
한 순간의 선택이 생과 사를 가르던 순간이었다.
베이루트 공항에서의 총격전도 잊을 수 없다.
이슬람 민병대가 계류장에 머물고 있던 이집트항공기와 승객을 납치한 뒤 공항에서 경찰과 대치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납작 엎드려 있는 박 부회장의 머리 위로 총탄이 빗발치고 유혈이 낭자한 전투가 벌어졌다.
"그때는 정말 죽는 줄 알았어요.
지금 생각하면 무모하리만치 고지식했지요.
아마 그 시절의 저는 불가능을 몰랐거나 아니면 제가 아니었던 것 같아요."
그랬던 박 부회장도 상사맨이 된 것을 딱 한 번 후회한 적이 있다.
1980년 시멘트공장을 수출하려고 인도의 라지스탄(펀잡 서쪽의 사막지대)을 찾았을 때의 일.승용차를 빌려 사막 한가운데로 들어가 광산과 현장 입지 조건 등을 조사하다가 석양 무렵에야 일이 끝났다.
사막의 밤은 갑자기 찾아왔다.
천지 사방이 캄캄해지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운전기사는 길을 잃었다.
새벽이 오고 날이 밝아도 여전히 미로 속을 헤매고 있었다.
누가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우물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던가.
오아시스는 흔적도 없었다.
아무 것도 먹지도,마시지도 못하고 무려 30시간을 헤맨 끝에 낙타를 탄 한 노인을 만나 사막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적도에서 가장 가깝다는 그 사막의 별빛은 너무도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지만 박 부회장은 열사의 모래먼지에 뒤덮여 녹초가 돼버렸다.
시멘트 공장 수출건도 무산됐다.
맥이 탁 풀린 나머지 호텔방에 누워 끙끙 앓았다.
괴로운 밤이었다.
그 일이 있은 지 얼마되지 않아 회사는 그를 홍콩지점장으로 보냈다.
잠시 머리를 식히며 재충전하라는 배려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1981년 말에는 최대 시장인 미주 영업을 맡았다.
다시 옛날 생활로 돌아갔다.
18박19일 동안 무려 10개국을 방문하는 강행군도 있었다.
이력이 붙은 영업은 더욱 노련해지고 비즈니스 감각은 최고조를 달리던 시절이었다.
금호가 1988년 그룹의 명운을 걸고 아시아나항공을 창립했을 때 그는 영업담당 상무로 발령받았다.
취약한 브랜드와 경쟁사들의 견제를 극복해야 하는 신생 항공사와 노련한 해외 영업통의 만남은 필연적이었다.
박 부회장은 뉴욕을 비롯한 세계 주요 도시에 성공적인 취항을 이루고 해외영업망을 촘촘하게 구축하는 등 종합상사 시절에 결코 뒤지지 않는 업적들을 쌓아올리며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수출전선이나 영업전선이나 전선은 '전선(戰線)'이다.
그곳에도 화약 냄새 가득한 총성과 포연이 있다.
박 부회장은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주저없이 적진에 돌진했고 열심히 싸웠다.
때로는 예기치 않은 복병을 만나 좌절할 때도 있었지만 늘 다시 털고 일어섰다.
그는 36년의 직장생활을 견뎌온 힘을 '서울대 낙방'이라고 얘기한다.
하지만 그것은 진실이 아닐 것이다.
서울대 낙방생이 어디 한둘인가.
박 부회장은 신입사원들에게 이렇게 '진심'을 얘기하고 있다.
"지난 세월은 온통 성취와 보람의 연속이었습니다.
오늘날 저를 만든 자양분은 바로 일이었습니다.
하고 싶다는 열정,하겠다는 의지,반드시 할 수 있다는 확신만 있다면 어떠한 도전도 아름답습니다."
조일훈 한국경제신문 산업부 기자 jih@hankyung.com
바로 서울대 입시에서 떨어졌기 때문입니다"라는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그는 1963년 서울대 경영학과에 지원했으나 고배를 마시고 후기대학인 경희대에 들어갔다.
재수를 하는 것도 방법이지만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해 이를 악물고 공부했다.
서울대를 나온 사람보다 못하다는 소리는 결코 듣고 싶지 않았다.
맡은 일은 뭐든지 열심히 했다.
이렇게 배양된 삶에 대한 습관과 태도가 그의 운명을 CEO로 밀어올렸다는 얘기다.
박 부회장은 종합상사 출신이다.
배재고(12회),경희대 정외과를 거쳐 1969년 11월 ㈜금호에 입사했다.
'수출입국(輸出立國)'이라는 슬로건 아래 20년간 수출전선을 누볐다.
활달하고 담이 컸던 그에게 사람 만나고 물건 파는 일은 잘 어울렸다.
처음엔 타이어를 취급했지만 나중엔 농가에서 나오는 볏짚 머리를 일본에 수출하고 서양에서 '몽크피시(monkfish)'라고 부르는 아귀도 프랑스에 내다파는 등 안 팔아본 것이 없었다.
젊은 날의 대부분은 중동시장에서 보냈다.
지금은 아스라한 추억으로 남아 있지만 당시 겪었던 간난신고(艱難辛苦)는 이루 말할 수가 없다.
1975년 국제박람회 참석을 위해 이란에 갔다가 본사로부터 한 통의 전문을 받았다.
사우디아라비아 제다에 있는 바이어가 철근 1만t을 구매하겠다고 하니 그를 만나 계약을 체결하라는 내용이었다.
문제는 사우디아라비아 비자가 없었다는 것.새로 비자를 받으려면 몇 달을 기다려야 할 판이었다.
낙담해서 호텔로 돌아와 잘 알지도 못하는 프런트 직원에게 푸념을 늘어놓았더니 뜻밖에도 사우디 항공사 기장과 줄이 닿게 해주었다.
일단 무비자 상태로 비행기를 타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중간 기착지인 리야드에서 불법 입국 혐의로 체포돼 감옥에 갇혔다.
"제다를 거쳐 베이루트로 갈 예정이어서 비자가 없어도 되는 줄 알았다"고 우겼다.
우여곡절 끝에 기장에게 여권을 맡기는 조건으로 제다행이 허용됐다.
물론 바이어를 만나 2500만달러짜리 계약을 성사시켰다.
이번에는 사우디를 어떻게 빠져 나오느냐가 문제였다.
여권을 되찾으려고 시도하다가 다시 철창 신세를 지고 말았다.
사우디 경찰도 바보는 아니었던 것이다.
결국 소식을 들은 바이어가 외무성에 선처를 부탁해 베이루트로 강제출국당하는 선에서 마무리됐다.
베이루트 얘기가 나오자 박 부회장은 "거기도 참 골때렸다"며 웃었다.
1970년대 후반 중화학제품을 팔기 위해 레바논에 출장갔을 때의 일.베이루트 시내에선 기독교 민병대와 이슬람 민병대가 교전을 벌이며 대치하고 있었다.
현지 주재원과 식사를 하기 위해 영국 식당으로 갔다.
그런데 갑자기 얼큰한 음식이 생각나 길 건너 스페인 식당으로 발길을 옮겼다.
수저를 들어 수프를 막 떠먹으려는 순간 '꽝'하는 폭발음과 함께 바로 눈앞에 있던 영국 식당이 통째로 날아갔다.
폭탄테러였다.
한 순간의 선택이 생과 사를 가르던 순간이었다.
베이루트 공항에서의 총격전도 잊을 수 없다.
이슬람 민병대가 계류장에 머물고 있던 이집트항공기와 승객을 납치한 뒤 공항에서 경찰과 대치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납작 엎드려 있는 박 부회장의 머리 위로 총탄이 빗발치고 유혈이 낭자한 전투가 벌어졌다.
"그때는 정말 죽는 줄 알았어요.
지금 생각하면 무모하리만치 고지식했지요.
아마 그 시절의 저는 불가능을 몰랐거나 아니면 제가 아니었던 것 같아요."
그랬던 박 부회장도 상사맨이 된 것을 딱 한 번 후회한 적이 있다.
1980년 시멘트공장을 수출하려고 인도의 라지스탄(펀잡 서쪽의 사막지대)을 찾았을 때의 일.승용차를 빌려 사막 한가운데로 들어가 광산과 현장 입지 조건 등을 조사하다가 석양 무렵에야 일이 끝났다.
사막의 밤은 갑자기 찾아왔다.
천지 사방이 캄캄해지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운전기사는 길을 잃었다.
새벽이 오고 날이 밝아도 여전히 미로 속을 헤매고 있었다.
누가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우물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던가.
오아시스는 흔적도 없었다.
아무 것도 먹지도,마시지도 못하고 무려 30시간을 헤맨 끝에 낙타를 탄 한 노인을 만나 사막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적도에서 가장 가깝다는 그 사막의 별빛은 너무도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지만 박 부회장은 열사의 모래먼지에 뒤덮여 녹초가 돼버렸다.
시멘트 공장 수출건도 무산됐다.
맥이 탁 풀린 나머지 호텔방에 누워 끙끙 앓았다.
괴로운 밤이었다.
그 일이 있은 지 얼마되지 않아 회사는 그를 홍콩지점장으로 보냈다.
잠시 머리를 식히며 재충전하라는 배려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1981년 말에는 최대 시장인 미주 영업을 맡았다.
다시 옛날 생활로 돌아갔다.
18박19일 동안 무려 10개국을 방문하는 강행군도 있었다.
이력이 붙은 영업은 더욱 노련해지고 비즈니스 감각은 최고조를 달리던 시절이었다.
금호가 1988년 그룹의 명운을 걸고 아시아나항공을 창립했을 때 그는 영업담당 상무로 발령받았다.
취약한 브랜드와 경쟁사들의 견제를 극복해야 하는 신생 항공사와 노련한 해외 영업통의 만남은 필연적이었다.
박 부회장은 뉴욕을 비롯한 세계 주요 도시에 성공적인 취항을 이루고 해외영업망을 촘촘하게 구축하는 등 종합상사 시절에 결코 뒤지지 않는 업적들을 쌓아올리며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수출전선이나 영업전선이나 전선은 '전선(戰線)'이다.
그곳에도 화약 냄새 가득한 총성과 포연이 있다.
박 부회장은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주저없이 적진에 돌진했고 열심히 싸웠다.
때로는 예기치 않은 복병을 만나 좌절할 때도 있었지만 늘 다시 털고 일어섰다.
그는 36년의 직장생활을 견뎌온 힘을 '서울대 낙방'이라고 얘기한다.
하지만 그것은 진실이 아닐 것이다.
서울대 낙방생이 어디 한둘인가.
박 부회장은 신입사원들에게 이렇게 '진심'을 얘기하고 있다.
"지난 세월은 온통 성취와 보람의 연속이었습니다.
오늘날 저를 만든 자양분은 바로 일이었습니다.
하고 싶다는 열정,하겠다는 의지,반드시 할 수 있다는 확신만 있다면 어떠한 도전도 아름답습니다."
조일훈 한국경제신문 산업부 기자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