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 2007학년도 수시 1학기 문제는 통합 논술의 멋진 모델이야. 제시문에 대한 이해분석 능력,주어진 자료에 기초해 나름의 결론을 이끌어 내는 추론 능력,이에 기반해 문제 상황에 적용하는 창의적 문제해결 능력을 종합적으로 묻고 있어. 또한 논제를 세분화함으로써 과정에서 객관성을 확보하고 있다는 점도 특징이야. 매년 11월에 치르는 '대학수학능력시험'보다 대학수학능력을 평가하기에 적절한 시험인 것은 분명한 것 같아.

특히 6월10일 실시됐던 고대 논술 모의고사의 유형을 그대로 준수함으로써 일반 논술학원에서 수강하지 않은 학생들도 시험지를 받는 순간 해 볼 만하다는 생각을 들게 한 점은 정말 칭찬해 주고 싶어. 모의고사 이후 채점 기준을 포함한 상세한 해설을 참가학교에 배포하고,실제 논술시험 이후 논제와 자체 해설을 즉시 공개한 것도 고려대가 학생들을 얼마나 배려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야.

형식적으로 6월10일 모의고사 유형에 충실했고,주제 자체도 학생들이 친숙한 정의와 효율성으로 정함으로써 배경지식을 갖고 있지 않던 학생들도 별다른 어려움 없이 논술을 작성할 수 있었을 거야. 하지만,항상 강조하듯이 쉬운 듯 한 논제가 정말 어려운 법이야. 쉬운 논제는 대개 학생의 생각하는 능력 차이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거든. 말 많은 것과 말 잘하는 것이 다르듯이 잘 쓴 답안과 쉽게 쓴 답안은 다르지.

실제로 제시문 자체는 평이했지만,그 속에 담겨진 문제의식 그리고 평가하고자 하는 통합적 사고력은 만만치 않은 문제였어. 아마 학생 간의 점수 격차가 컸을 거야.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을 정치적 동물로 규정한 이래로,그 정치적 인간이 추구해 온 최선의 정치가 무엇인지 그리고 시장 논리만이 최고의 가치인 현대 사회에서 정치로 이룰 수 있는 정의란 무엇인지 대단한 고민거리야. 정의와 효율성은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구호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문제로 존재하고 있어. 특히 사회가 분배의 체계라 한다면,이런 분배가 효율적이냐,그리고 정의로운 것이냐에 대한 의문은 서로 밀접하게 관련돼 있어.


◆논제Ⅰ 해설

Ⅰ. 위 제시문들은 정의와 효율성에 관한 것이다. (다)의 요지를 밝히고(200자 이내),(라)의 관점에서 (다)의 견해를 비판하고,모든 제시문을 참고해 정의와 효율성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논술하시오.


항상 강조하듯이 논제를 보는 순간 질문에 밑줄 긋고 번호를 써야겠지? 첫 번째 질문은 (다)의 요지를 밝히라는 것이지. 두 번째 질문은 (라)의 관점에서 (다)의 요지를 밝히라는 것이고. 세 번째 질문은 '모든 제시문'을 참고해 정의와 효율성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논하라는 것이야. 결국 (다)의 요지를 밝히고 (라)의 요지를 간략하게 서술한 후 그에 기초해 앞서 밝힌 (다)의 핵심 주장과 근거를 비판하는 과정을 거치면 되는 거야. 여러 차례 강조하듯이 형식에서 파격을 취하려 하지 말라고 했지? 고려대 문제는 논제를 상세하게 쪼개고 각 논제별로 배점을 주고 있기 때문에 질문에 대한 답변이 논리적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면 질문의 순서대로 답해도 무방해. 특히 (라)에서 (다)를 비판하려면 (라)와 (다)가 서로 대립 각을 세우는 지점이 어디인지를 정확하게 찾아내는 것이 우선이야.

제시문 (다)는 롤스의 정의론 내용인데 동등한 자유의 원리를 우선하고,사회적으로 가장 열악한 처지에 있는 사회 계층의 상황을 개선하는 한에서,그리고 사회 경제적 분배의 측면에 한해 불평등은 인정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어. 그리고 제시문 (라)는 정의란 옳고 그름의 문제이며 공리주의에서 옳고 그름은 최대 행복의 원리에 근거한다고 주장하고,개인에게 마치 불편부당한 제삼자처럼 됨으로써 자신의 행복보다 전체의 행복을 우선할 것을 요구하고 있어. 이 부분에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공리주의가 특정 개인의 희생을 외부에서 강요하는 전체주의라기보다는 엄정한 평등과 자발적인 희생을 강조하는 매우 도덕적 정의관이라는 점이야.

결국 공리주의 입장에서 롤스의 정의론을 비판하라는 것인데,이런 경우 공리주의의 핵심 주장을 반복한 것만으로는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없어. 차등의 원리가 허용하는 경제적 불평등이 기본적 자유의 불평등을 야기할 현실적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들어 비판하거나 광범위한 이념들의 차이가 존재하는 현실 민주주의 상황에서 안정적인 사회의 구현을 가능하게 하는 주장인지에 대한 것도 쟁점이 될 수 있겠어. 특히 우리의 삶 속에서 구체적인 사례를 찾아 반박하는 것이 제일 강력한 비판 방법일 거야.

그런데 (라)에서 (다)를 비판하는 부분에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어. 롤스의 정의론에 대한 어설픈 배경지식으로 (다)를 비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야. 왜냐하면,논제에서 요구한 것이 롤스의 정의론을 비판하라는 것이 아니라 제시문 (다)를 비판하라는 것이었고,제시문 (다)는 롤스의 정의론과 관련한 가정이나 내용을 모두 담은 것이 아니라 일부만을 담은 것이기 때문이지. 즉 제시문 (다)가 롤스의 정의론을 활용한 것이라 해서 (다)의 내용을 비판하면서 무지의 베일이 드리워진 원초적 상황이 사회 정의의 원리들이 선택될 상황으로 합당하지 않다고 비판하거나 롤스가 상정한 개인들이 남들과 유리된 채로 삶의 이상을 수립하는 자들이면서 개인적인 자유만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현실적으로 개인들의 동일성과 삶의 이상의 형성을 인도하고 구속하는 공동체적 제약을 간과하고 있다고 비판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을 거야. 차라리 무지의 베일은 제시문 (나)와 관련이 있고,제시문 (나)를 비판하라고 논제에서 요구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주의하자.

또한 자신의 생각을 논하는 부분에서는 (라)의 입장을 취하든, (다)의 입장을 취하든,제3의 입장을 취하든 수험생의 마음이지만 세 개의 질문이 하나의 논제로 구성돼 있다는 점을 감안해 글의 통일성과 완결성에도 신경을 써야 할 거야. (라)의 입장에서 (다)를 비판하는 단락을 자신의 생각인 것처럼 쓰고,정작 자신의 생각을 서술하는 부분에서 (다)의 입장에서 서술한다면 서로 다른 두 개의 글처럼 보이겠지?

그리고 '모든 제시문을 활용하여'라는 부분에 주의해야 하는데,모든 제시문을 활용하라는 의미는 제시문 속에 담겨져 있는 쟁점을 놓치거나 무시하지 말라는 의미로 해석해야 해. 제시문의 모든 단락은 철저한 의도를 갖고 배치한 것이야. 단락의 내용은 물론이고,제시문의 배치 순서도 의미가 있다는 거야. 제시문 (가)의 경우 대략 내용이 "각자에게 각자의 몫을 주는 것이 정의라면,정당한 몫의 기준이 무엇인가? 힘인가? 사회적 효율성인가? 아니면 다른 것인가?"라는 정도의 내용이고,이는 정의에 대한 상식적인 서술에 해당하고 그 자체에 의미가 있다기보다는 제시문(다)와 (라)의 견해차가 발생하는 배경이나 지점을 밝혀주는 역할이라 할 수 있어. 쟁점 파악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친절한 가이드 역할인 셈이지.

마지막으로 답안을 구상할 때 전혀 활용하지 않은 제시문은 없는지 항상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점 다시 강조하고 싶어. 활용한다는 의미가 제시문을 그대로 옮겨 적으라는 말이 아니야. 제시문은 대개의 경우 따져서 판단해야 할 쟁점이나 답변을 위한 단편적 사실을 제공하기 때문에 특정 제시문을 전혀 활용하지 않았다는 것은 주제와 관련한 유력한 시각을 놓치는 것이라는 뜻이지. 다음 주에는 논제 Ⅱ, Ⅲ, Ⅳ를 추가로 살펴보도록 하자.

남태윤 S.논술 원장 ok@nons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