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을 가기로 마음을 잡은 상태였기 때문에 재수생활은 착실하게 했다.
수학은 여전히 어려웠다.
임종욱 사장은 수학에 접근하는 방법 자체를 바꾸기로 했다.
복잡한 공식을 갖다 놓고 문제를 푸는 방법을 포기했다.
대신 기출문제나 예상문제집을 놓고 문제와 답의 유형을 반복적으로 관찰했다.
이런 방식으로 서너 달을 매달렸더니 정답을 찾을 수 있는 '길'이 보였다.
예를 들어 정답이 0이나 1이 되는 문제의 유형들을 집중적으로 봐뒀더니 다른 문제에도 응용이 가능하더라는 것.임 사장은 이를 '통박'이라고도 표현했다.
임 사장은 이렇게 닦은 실력(?)으로 고려대학교 경영학과에 들어갈 수 있었다.
대학생활은 평탄했다.
최재국 현대자동차 사장,김인 삼성SDS 사장,황태선 삼성화재 사장,오영국 국민은행 부행장 등이 동창생들이었다.
김인 사장은 "종욱이는 비교적 조용하고 온순한 성격이었지만 자존심이 무척 강하고 집요한 면을 갖고 있었다"며 "수업내용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능력이 뛰어나 노트필기도 잘했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전했다.
기업인으로서 임 사장의 운명은 1974년 대학졸업 후 삼성그룹 공채에서 떨어지면서 판가름났다.
필기시험은 합격했지만 면접에서 물을 먹은 것.생애 세 번째이자 마지막 낙방이었다.
그의 발길은 당시 가전업체로 승승장구하고 있던 대한전선으로 향했다.
첫 근무처는 서울 본사 자금과.당시 대한전선은 TV 생산용 구미공장을 비롯해 여러 개의 공장을 짓고 있던 터라 많은 자금이 필요했다.
선배들을 따라다니며 부지런히 일을 배웠다.
결과적으로 상고를 졸업한 것이 적잖은 도움이 됐다.
영업세 신고를 앞두고는 며칠 밤을 새워가며 일했다.
신고 기한을 맞추지 못하면 가산세를 물어야 했기 때문이다.
'독하게 일하는 것….' 임 사장의 전매특허는 이때 집중적으로 단련됐다.
1978년 9월,입사 3년8개월 만에 과장으로 고속 승진한 그는 전선을 생산하던 안양공장으로 가게 된다.
당시 안양공장 관리부장이 본사에 과장급 인력을 요청하면서 "성깔있는 친구를 하나 추천해 달라"고 했는데 임 사장이 천거된 것.안양에 13평짜리 전세를 얻어 내려간 '성깔'은 가자마자 부하들을 휘어잡았다.
우선 경리과 직원들이 호텔을 잡아 결산을 하던 관행을 없애버렸다.
반대하는 직원들에게는 "회사에서 밤을 새우면 되지,뭘 호사스럽게 호텔까지 가느냐"고 호통을 쳤다.
회사 자료를 밖으로 갖고 나가는 데 대해서도 불호령을 내렸다.
하지만 가끔 핏대를 내긴 해도 임 사장은 속정이 깊었다.
야단맞은 직원들을 따로 불러 소주잔을 기울이며 다독거리는 일도 잊지 않았다.
시간이 늦으면 총각 직원들은 집에 데려다 잠도 재웠다.
그렇게 8년이라는 세월을 경리과장으로 일했다.
인사 적체 때문에 승진이 늦어져 스트레스를 받긴 했지만 공장 살림살이는 눈에 띄게 좋아졌다.
1986년 안양공장을 떠나 비서실 차장으로 가면서 설원량 회장(2004년 작고)과의 운명적인 만남이 시작된다.
설 회장은 대한전선 창업자인 설경동 회장의 아들로 1970년대부터 경영에 참여,회사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설 회장은 원칙과 실질적인 해결을 중시하는 스타일이어서 아이디어가 많고 해결사로서의 성향을 갖고 있던 임 사장을 무척 신뢰했다.
설 회장이 변화의 큰 방향을 제시하면 임 사장은 이를 앞장서 전파하고 실행했다.
하지만 오너의 신임을 받는다고 해서 회사생활에 '꽃이 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무거운 부담과 책임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1987년 대한전선이 스테인리스 스틸 제조업체인 삼양금속을 인수했을 때 설 회장은 삼양금속 관리부장 자리를 맡겼다.
만성적인 적자에 노사관계까지 좋지 않았던 회사를 조기에 정상화시키라는 특명과 함께였다.
은행에 부실기업으로 낙인 찍힌 탓에 자금 구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당시 설 회장은 "임 사장이 깡통을 차고 동냥을 하러 다닌다"고 안쓰러워 했다.
또 강성 노조는 본사에서 파견된 관리부장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다.
출근을 저지하는가 하면 사업장 내에서 폭력을 행사하기까지 했다.
그래도 임 사장은 끈질기게 버텼다.
주중에는 서울 본사와 거래 은행을 쫓아다니고 주말에는 현장에서 근로자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1995년에 임 사장은 비서실장(이사)으로 돌아와 설 회장을 직접 보좌하게 된다.
통상 비서실장의 직책이 전무였던 점을 감안하면 그에 대한 신임이 얼마나 두터웠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임 사장의 진면목은 유례없는 경제위기 속에서 드러났다.
1997년 들어 한보사태가 터지자 앞으로 국내외 경제상황이 심상찮게 돌아갈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뭔가 큰 위기가 닥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었다.
대한전선은 내수를 줄이고 수출을 늘리는 전략을 선택했다.
해외 부실 사업들도 대거 정리했다.
1997년 여름 기아자동차가 부도 조짐을 보이자 국내 경제는 또 한 번 요동쳤다.
임 사장은 이 즈음 대한전선 사사(社史)에 남을 뚝심을 선보였다.
기아는 대한전선의 전선 거래처였다.
임 사장은 기아가 물품대금을 지급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자 수백대의 자동차를 매출채권 회수 명목으로 가져왔다.
처분이 어렵다는 이유로 사내에서 반대 의견도 많았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4만5000평이나 되는 안산공장에 자동차들을 쌓아 놓고 임직원들로 하여금 직접 판매토록 했다.
본인도 10대 이상을 팔았다.
기아에 물품대금을 떼이고도 손을 놓고 있던 다른 거래업체들은 눈이 휘둥그레질 수밖에 없었다.
직장생활에 대한 임 사장의 신조는 힘-성과-성실이라는 세 가지 단어로 요약된다.
항상 "힘있게 일해야 한다"는 것.일을 할 때는 항상 칼날이 아니라 칼자루를 쥐어야 한다는 원칙과 비슷한 맥락이다.
힘을 가지려면 성과를 내야 한단다.
실제 뭔가 가시적인 결과물이 있어야 다른 사람들이 힘을 인정해준다.
마지막으로 성과를 내려면 "죽기 살기로 일해야 한다"고 임 사장은 강조한다.
세상에 공짜는 없으며 열심히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요행도 없다고 설명한다.
돌이켜 보면 임 사장은 천성적으로 두뇌 회전이 빠르고 순발력이 좋았지만 직장생활에는 요령을 부리지 않았다.
오히려 선 굵고 우직한 일상 속에서 헌신과 희생의 덕목을 지키는 데 더 많은 힘과 열정을 쏟았다.
스스로에게 더욱 의미있는 일은 야간상고 진학을 마다하지 않으면서도 지키고자 했던 특유의 고집과 자존심을 끝까지 지켜냈다는 점이다.
1974년 54명의 동료 신입사원들과 함께 대한전선 로비에 들어섰을 당시 그의 가슴은 "언젠가 최고의 자리에 오르면 반드시 최고의 기업으로 키우겠다"는 결심으로 설레고 있었다.
이제 30여년 전으로 돌아가 임 사장은 스스로에게 물어볼 것이다.
대한전선을 어떻게 최고의 기업으로 만들겠느냐고?
조일훈 한국경제신문 산업부 기자 jih@hankyung.com
수학은 여전히 어려웠다.
임종욱 사장은 수학에 접근하는 방법 자체를 바꾸기로 했다.
복잡한 공식을 갖다 놓고 문제를 푸는 방법을 포기했다.
대신 기출문제나 예상문제집을 놓고 문제와 답의 유형을 반복적으로 관찰했다.
이런 방식으로 서너 달을 매달렸더니 정답을 찾을 수 있는 '길'이 보였다.
예를 들어 정답이 0이나 1이 되는 문제의 유형들을 집중적으로 봐뒀더니 다른 문제에도 응용이 가능하더라는 것.임 사장은 이를 '통박'이라고도 표현했다.
임 사장은 이렇게 닦은 실력(?)으로 고려대학교 경영학과에 들어갈 수 있었다.
대학생활은 평탄했다.
최재국 현대자동차 사장,김인 삼성SDS 사장,황태선 삼성화재 사장,오영국 국민은행 부행장 등이 동창생들이었다.
김인 사장은 "종욱이는 비교적 조용하고 온순한 성격이었지만 자존심이 무척 강하고 집요한 면을 갖고 있었다"며 "수업내용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능력이 뛰어나 노트필기도 잘했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전했다.
기업인으로서 임 사장의 운명은 1974년 대학졸업 후 삼성그룹 공채에서 떨어지면서 판가름났다.
필기시험은 합격했지만 면접에서 물을 먹은 것.생애 세 번째이자 마지막 낙방이었다.
그의 발길은 당시 가전업체로 승승장구하고 있던 대한전선으로 향했다.
첫 근무처는 서울 본사 자금과.당시 대한전선은 TV 생산용 구미공장을 비롯해 여러 개의 공장을 짓고 있던 터라 많은 자금이 필요했다.
선배들을 따라다니며 부지런히 일을 배웠다.
결과적으로 상고를 졸업한 것이 적잖은 도움이 됐다.
영업세 신고를 앞두고는 며칠 밤을 새워가며 일했다.
신고 기한을 맞추지 못하면 가산세를 물어야 했기 때문이다.
'독하게 일하는 것….' 임 사장의 전매특허는 이때 집중적으로 단련됐다.
1978년 9월,입사 3년8개월 만에 과장으로 고속 승진한 그는 전선을 생산하던 안양공장으로 가게 된다.
당시 안양공장 관리부장이 본사에 과장급 인력을 요청하면서 "성깔있는 친구를 하나 추천해 달라"고 했는데 임 사장이 천거된 것.안양에 13평짜리 전세를 얻어 내려간 '성깔'은 가자마자 부하들을 휘어잡았다.
우선 경리과 직원들이 호텔을 잡아 결산을 하던 관행을 없애버렸다.
반대하는 직원들에게는 "회사에서 밤을 새우면 되지,뭘 호사스럽게 호텔까지 가느냐"고 호통을 쳤다.
회사 자료를 밖으로 갖고 나가는 데 대해서도 불호령을 내렸다.
하지만 가끔 핏대를 내긴 해도 임 사장은 속정이 깊었다.
야단맞은 직원들을 따로 불러 소주잔을 기울이며 다독거리는 일도 잊지 않았다.
시간이 늦으면 총각 직원들은 집에 데려다 잠도 재웠다.
그렇게 8년이라는 세월을 경리과장으로 일했다.
인사 적체 때문에 승진이 늦어져 스트레스를 받긴 했지만 공장 살림살이는 눈에 띄게 좋아졌다.
1986년 안양공장을 떠나 비서실 차장으로 가면서 설원량 회장(2004년 작고)과의 운명적인 만남이 시작된다.
설 회장은 대한전선 창업자인 설경동 회장의 아들로 1970년대부터 경영에 참여,회사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설 회장은 원칙과 실질적인 해결을 중시하는 스타일이어서 아이디어가 많고 해결사로서의 성향을 갖고 있던 임 사장을 무척 신뢰했다.
설 회장이 변화의 큰 방향을 제시하면 임 사장은 이를 앞장서 전파하고 실행했다.
하지만 오너의 신임을 받는다고 해서 회사생활에 '꽃이 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무거운 부담과 책임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1987년 대한전선이 스테인리스 스틸 제조업체인 삼양금속을 인수했을 때 설 회장은 삼양금속 관리부장 자리를 맡겼다.
만성적인 적자에 노사관계까지 좋지 않았던 회사를 조기에 정상화시키라는 특명과 함께였다.
은행에 부실기업으로 낙인 찍힌 탓에 자금 구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당시 설 회장은 "임 사장이 깡통을 차고 동냥을 하러 다닌다"고 안쓰러워 했다.
또 강성 노조는 본사에서 파견된 관리부장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다.
출근을 저지하는가 하면 사업장 내에서 폭력을 행사하기까지 했다.
그래도 임 사장은 끈질기게 버텼다.
주중에는 서울 본사와 거래 은행을 쫓아다니고 주말에는 현장에서 근로자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1995년에 임 사장은 비서실장(이사)으로 돌아와 설 회장을 직접 보좌하게 된다.
통상 비서실장의 직책이 전무였던 점을 감안하면 그에 대한 신임이 얼마나 두터웠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임 사장의 진면목은 유례없는 경제위기 속에서 드러났다.
1997년 들어 한보사태가 터지자 앞으로 국내외 경제상황이 심상찮게 돌아갈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뭔가 큰 위기가 닥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었다.
대한전선은 내수를 줄이고 수출을 늘리는 전략을 선택했다.
해외 부실 사업들도 대거 정리했다.
1997년 여름 기아자동차가 부도 조짐을 보이자 국내 경제는 또 한 번 요동쳤다.
임 사장은 이 즈음 대한전선 사사(社史)에 남을 뚝심을 선보였다.
기아는 대한전선의 전선 거래처였다.
임 사장은 기아가 물품대금을 지급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자 수백대의 자동차를 매출채권 회수 명목으로 가져왔다.
처분이 어렵다는 이유로 사내에서 반대 의견도 많았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4만5000평이나 되는 안산공장에 자동차들을 쌓아 놓고 임직원들로 하여금 직접 판매토록 했다.
본인도 10대 이상을 팔았다.
기아에 물품대금을 떼이고도 손을 놓고 있던 다른 거래업체들은 눈이 휘둥그레질 수밖에 없었다.
직장생활에 대한 임 사장의 신조는 힘-성과-성실이라는 세 가지 단어로 요약된다.
항상 "힘있게 일해야 한다"는 것.일을 할 때는 항상 칼날이 아니라 칼자루를 쥐어야 한다는 원칙과 비슷한 맥락이다.
힘을 가지려면 성과를 내야 한단다.
실제 뭔가 가시적인 결과물이 있어야 다른 사람들이 힘을 인정해준다.
마지막으로 성과를 내려면 "죽기 살기로 일해야 한다"고 임 사장은 강조한다.
세상에 공짜는 없으며 열심히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요행도 없다고 설명한다.
돌이켜 보면 임 사장은 천성적으로 두뇌 회전이 빠르고 순발력이 좋았지만 직장생활에는 요령을 부리지 않았다.
오히려 선 굵고 우직한 일상 속에서 헌신과 희생의 덕목을 지키는 데 더 많은 힘과 열정을 쏟았다.
스스로에게 더욱 의미있는 일은 야간상고 진학을 마다하지 않으면서도 지키고자 했던 특유의 고집과 자존심을 끝까지 지켜냈다는 점이다.
1974년 54명의 동료 신입사원들과 함께 대한전선 로비에 들어섰을 당시 그의 가슴은 "언젠가 최고의 자리에 오르면 반드시 최고의 기업으로 키우겠다"는 결심으로 설레고 있었다.
이제 30여년 전으로 돌아가 임 사장은 스스로에게 물어볼 것이다.
대한전선을 어떻게 최고의 기업으로 만들겠느냐고?
조일훈 한국경제신문 산업부 기자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