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만명의 아랍인들은 유대인 한 명의 손톱만한 가치도 없다."(이스라엘 랍비 야코프 페린,1994년)

"이번 저항이 이스라엘에 의해 무력화된다면 아랍 세계는 영원히 굴욕을 면치 못하고 시온주의자들이 절대 권력을 갖게 될 것이다."(레바논 무장단체 헤즈볼라 지도자 하산 나스랄라,2006년)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불리던 가나안 땅은 수천년이 지난 현재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곳이 돼 버렸다.

1947년 유엔이 팔레스타인 땅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로 분할한다는 안을 통과시킨 이후 이곳에선 무려 다섯 차례의 유혈전쟁이 벌어졌고,지난달 12일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으로 사실상 여섯 번째 중동전쟁에 접어들게 된 것이다.

◆근대 정치의 산물,이스라엘

결코 끝나지 않을 것으로만 보이는 이번 전쟁의 원인은 무엇일까.

서구문명과 비서구문명의 충돌,이스라엘을 내세워 중동 원유에 대한 효과적인 통제를 원하는 미국의 전략적인 의도 등 다양한 해석이 제시되고 있지만 전문가들은 충돌의 근원을 20세기 초·중반을 휩쓸었던 민족주의의 산물로 보고 있다.

또 1948년 5월 이스라엘이 옛 고토인 팔레스타인에 세워지기까지의 과정은 국제 정치의 미묘한 역학 관계가 낳은 우연의 연속이기도 했다.

AD 70년 로마제국에 의해 유대인의 마지막 왕국 '유데아'가 짓밟힌 이래 유대인들은 2000년 가까이 유랑생활을 겪어야 했다.

영국에서부터 러시아까지 각지에 흩어져 살면서 다른 민족의 탄압에 저항하기도 했지만 단일국가를 건설하겠다는 아이디어는 민족주의가 유럽을 휩쓸고 있을 무렵인 19세기 말에 들어서야 등장했다.

하지만 누대에 걸쳐 터를 잡고 아랍인들을 내쫓고 옛 고토를 회복하는 일은 불가능이나 다름 없었다.

이러던 차에 1차 세계대전이 유대인들에게 기회를 제공했다.

독일과 '일전'을 치르기 위해 연합세력의 규합이 절실했던 영국이 '유대계 독립국가 건설'이라는 희망적인 메시지(벨푸어 선언)를 보낸 것.영국은 독일에 대항하기 위해 아랍권에도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주겠다고 약속하는 등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터키가 팔레스타인에서 물러나면서 주인 없는 땅이 되자 유대인들의 독립국가를 향한 열망은 더욱 불 타올랐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소련을 중심으로 재편된 국제정치 구도는 또 한 번 유대인들에게 기적을 선사한다.

1948년 이스라엘 독립을 전후해서 미국 영국을 포함해 서방 국가들은 팔레스타인으로의 무기 반입을 막았는데 소련만은 달랐다.

체코슬로바키아를 통해 대량의 무기를 비밀리에 유대인 집단에 매각한 것.유엔 안보리에서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던 소련이 장차 중동에서 미국의 첨병 역할을 하게 될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역사적인 아이러니는 이렇게 해서 벌어졌다.

◆비극의 씨앗,1948년 이스라엘 건국

1948년 5월 이스라엘의 초대 수상 벤 구리온의 국가 탄생을 선포하는 목소리가 라디오를 통해 이스라엘 전역에 전파됐다.

이 때 수도인 텔아비브 동쪽 주민들은 '복음'과도 같은 이 목소리를 거의 듣지 못했다고 한다.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에 참전한 6만여 아랍 전사들이 쏟아붓는 포격에 라디오 소리가 묻혀버린 것.

무리한 독립이었던 만큼 이스라엘은 피로 얼룩진 전쟁을 벌여야만 했다.

1948년부터 이듬해까지 처러진 '독립전쟁'(아랍측은 '대재앙'이라 부른다)을 비롯 이스라엘과 아랍은 시나이전쟁(1956년),6일전쟁(1967년),욤 키푸르전쟁(1973년),레바논전쟁(1992년) 등 총 다섯 차례에 걸친 굵직한 전쟁을 벌이게 된다.

3000만명 VS 75만명.압도적인 인구차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이들 전쟁을 모두 승리로 이끌었고,6일 전쟁 이후엔 요르단강 서안과 골란고원을 추가로 획득했다.

전쟁을 통해서도 해결되지 않은 갈등은 숱한 테러를 낳기도 했다.

이스라엘 과격단체인 이르건이 독립국가 건설을 반대하던 영국에 반발,1946년 당시 영국 군사령부가 있던 예루살렘의 킹 데이비드 호텔을 폭파한 이래 중동 땅은 테러로 얼룩져 버렸다.

50여년 전 유대인의 열망과 국제 역학관계가 탄생시킨 이스라엘과 아랍 간의 갈등은 2001년 9·11사태가 발생함으로써 문제의 심각성을 드러냈다.

팔레스타인 지역 분쟁이 중동 땅에서 그칠 일이 아니라는 점을 여실히 보여줬기 때문이다.

박동휘 한국경제신문 생활경제부 기자 donghuip@hankyung.com



[ 레바논, 끊임없는 내전ㆍ외침 '중동 화약고' ]

최근 중동사태의 화약고가 된 레바논의 역사는 피와 분노,증오와 보복으로 점철돼 있다.

종교·종파·민족의 차이를 무시한 채 강대국들에 의해 한 나라로 묶이면서 끊임없는 내전과 외침에 시달려야 했다.

경기도 만한 크기에 450만명의 인구를 가진 레바논의 선조는 B C 3000년께부터 지중해 연안에 티레,시돈,바일 등 도시국가를 건설하고 알파벳을 발명한 페니키아인이다.

이후 바빌로니아,페르시아,마케도니아,로마 등의 지배를 받았고 로마시대에는 그리스도교가 퍼졌다.

그러나 7세기 아랍인에게 정복되면서 아랍화·이슬람화가 진행돼 현재 언어는 아랍어를 쓴다.

이어 오스만 투르크,프랑스의 지배를 거쳐 1944년 독립을 이뤘지만 친서구적 기독교도와 아랍 민족주의 색채가 짙은 이슬람교도 간의 견제와 균형속에 정부를 구성,태생부터 갈등을 내포했다.

두 종교를 중심으로 무려 17개에 달하는 종파가 공존과 반목을 거듭하고 있다.

1960년대까진 '지중해의 보석'으로 불렸지만 이후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밀려오고 1972년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가 수도인 베이루트로 옮겨오면서 이스라엘의 잦은 공습을 받는 등 중동분쟁의 진앙지가 됐다.

레바논 출신으론 잠언시인 칼릴 지브란을 비롯 1960년대를 풍미한 미국 가수 폴 앵커,미국 소비자운동의 선구자 랠프 네이더,포브스지가 선정한 세계 부호 중 3위인 멕시코 재벌 카를로스 슬림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