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물이 때아닌 전성기를 맞고 있다.

안방 극장과 스크린은 물론 공연·출판계까지 우리 역사,특히 그 중에서도 고대사를 다룬 대하사극과 영화,책들이 넘쳐나고 있다.

고구려 건국신화를 바탕으로 한 MBC의 '주몽'은 지난 5월 첫 전파를 탄 이후 지금은 40%에 육박하는 시청률로 안방극장 최고의 인기프로그램으로 자리잡았다.

역시 고구려 실력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SBS의 '연개소문'도 방송 한달이 채 안 됐지만 벌써 20%대의 시청률로 인기몰이에 나서고 있다.

여기에 KBS도 가세해 9월부터 발해의 건국시조를 다룬 '대조영'을 내보낼 예정이다.

고구려 광개토대왕을 주인공으로 한 100억원짜리 대작 '태왕사신기'도 내년초 MBC에서 방영될 날만 기다리고 있다.

이들 드라마는 한결같이 '찬란했던 한민족의 역사복원'을 내세우거나 '민족의 저력을 보여줬던 초강대국 고구려의 재발견' 등을 제작 의도로 밝히고 있다.

고대사는 아니지만 7월13일 개봉된 이후 지금까지 관람객 300만명을 돌파한 강우석 감독의 '한반도' 역시 '민족주의' 코드를 전면에 내세워 흥행에 성공한 작품이다.

이 같은 '사극붐'에 대해선 긍정론과 부정론이 엇갈린다.

잘 알려지지 않았던 역사적 사실을 재조명해 우리의 역사의식을 고취한다는 취지도 있지만 '민족주의'라는 낡은 코드를 싸구려 상품으로 포장한 퇴행적 정치 캠페인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역사를 음모로 인식하거나 민족 투쟁의 기록으로만 인식하는 것은 매우 편협한 집단주의라는 지적들이다.

◆사극,왜 인기인가

'사극 열풍'은 우리 사회의 답답한 사회심리를 반영한다는 게 중론이다.

살기 힘들고 각박해진 현실에 대한 불만의 투영물이라는 것.고구려연구회 박승범 학술정보 간사는 "고구려에 대한 관심이 최근 급격히 높아진 것은 역사에 대한 단순한 궁금증을 넘어선다.

이는 우리 사회의 각종 부조리를 시원하게 해결해 줄 영웅을 학수고대하는 대중심리의 반영"이라고 풀이했다.

여기에 중국이 고구려 역사를 자국 역사로 편입시키려는 이른바 '동북공정'을 추진하고 있고,일본 또한 역사교과서 왜곡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멀쩡한 독도를 자국영토라고 주장하고 있는 주변 상황도 사극 붐을 부추기고 있다.

땅에 떨어진 민족적 자긍심을 역사 속에서 찾으려는 경향이 자연스레 대두될 수 밖에 없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는 셈이다.

드라마 '연개소문'을 집필 중인 작가 이환경씨는 "'연개소문'은 동북공정에 의해 훼손된 우리 역사의 복원운동"이라며 "드라마 방영으로 중국은 불편하겠지만 시청자들은 무력한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역사왜곡 논란

민족의 자긍심을 내세우다 보니 사실(史實)이 아닌 허구가 드라마를 뒤덮고 있다는 비판이 학계를 중심으로 제기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연개소문' 1·2회에서 다뤄진 안시성 전투 장면.많은 사학자들은 △연개소문이 안시성 전투를 이끈다는 설정 △연개소문이 치우천왕과 단군에게 제사하는 장면 등을 지적하며 "시대에 맞지 않는 묘사로 사실을 왜곡했다"고 비판한다.

사극이 아니라 판타지라는 평가도 나온다.

고구려연구재단 윤휘탁 연구원은 "치우천왕,배달국,환인 등은 후대의 기록에나 나오는데 고구려 시대 인물인 연개소문이 이를 알았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고 말했다.

가장 논란이 된 연개소문의 안시성 참전 여부에 대해서도 학자들은 대체로 "역사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사실"이라는 점에 의견을 같이 한다.

당 태종을 물리친 안시성 전투는 너무나 잘 알려져 있지만 연개소문이 참전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조선 후기 송준길과 박지원이 안시성주는 양만춘이라 밝혔지만 학계에서는 여전히 '안시성주'로만 쓰고 있다.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한 뒤 이에 강력히 반발한 끝에 소환에도 응하지 않은 사람이 바로 '안시성주'였다.

이런 안시성주가 불과 2년 뒤 연개소문에게 자기 휘하에 있는 3만 병력과 7만 백성들을 고스란히 내주었다는 것은 앞뒤가 안 맞는다는 얘기다.

◆과도한 민족주의

사실 여부를 떠나 드라마나 영화에서의 지나친 민족주의를 경계해야 한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윤휘탁 연구원은 "검증되지 않은 내용에 픽션이 가미된 채 국민들에게 받아들여진다면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중국 고대사를 전공한 한 사학자는 "민족주의 정서에 호소하는 움직임은 사실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데 좋지 않다"며 드라마의 파급력을 경계했다.

고구려사를 재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해온 사학자들조차 "지나치게 연개소문을 영웅화하고 고구려사를 영광으로 포장하기 위해 역사를 오역하는 무리한 접근은 동북공정에 맞서는 데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반대입장을 밝혔다.

과도한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도 적지 않다.

반일감정에 편승한 영화 '한반도' 역시 역사를 음모로 덧칠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일부에서는 이 같은 영웅물 러시 현상이 콤플렉스의 산물이라는 주장도 내놓는다.

영웅을 필요로 한다는 것 자체가 지극히 비합리적이며 따라서 개방된 민주사회 세계관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지적이다.

철학자 칼 포퍼는 "민족주의는 종족적 본능,정열과 편견,개인의 책임을 집단에 전가하는 집단주의의 향수일 뿐"이라고 말했다.

새겨들어볼 만한 지적이다.

허구로 가득찬 민족사에 안주, 자위하면서 과연 세계를 호흡하는 진정한 한국의 힘이 키워질 것인지 한번 생각해볼 문제다.

김재창 한국경제신문 문화부 기자 char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