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시문 1

인간을 오로지 '인간'으로 되게 하는 것은 생명의 한 새로운 단계가 아니라 모든 각각의 생명 일반에 대해서,또한 인간의 생명에 대해서도 대립되어 있는 원리며,이 원리는 그 자체로는 전혀 '자연적인 생명의 진화'로 환원될 수 없다. 그리스인들은 이미 이러한 원리를 주장하였으며 이 원리를 '이성'이라고 불렀다. 다시 말해서 정신이라는 말이다. 정신은 자유라는 것,다시 말해서 정신은 강제로부터,압력으로부터,유기적인 것의 예속으로부터,생명으로부터,생명에 속하는 모든 것으로부터,따라서 또한 그 자신의 충동적인 '지능'으로부터 해방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자유는 정신의 현존재의 중심체로부터의 자유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정신적' 존재는 충동과 환경의 구속을 받지 않으며 '환경으로부터 자유롭다'. 따라서 이것을 '세계가 열려져 있는 것'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그러한 존재는 세계를 가지고 있다. 반면에 동물은 환경만을 가지고 있고 이 환경 속에 몰아적(沒我的)으로 몰두한다.

인간이 실행할 수 있는 정신적 활동은 동물적인 신체의 도식과 그것의 내용이 매우 단순한 보고에 그치고 마는 것과는 반대로 제2의 차원과 단계의 반사활동에 본질적으로 결부되어 있다. 우리는 이러한 활동을 '집중'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그리고 이 활동과 그것의 목표,즉 '자기집중'의 목표를 총괄하여 '자기 자신에 의한 정신적 활동중심의 의식' 또는 '자기의식'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동물은 식물과 달리 의식을 가지고 있지만,아무런 자기의식도 가지고 있지 않다. 동물은 자기를 소유하지 못하며 자기를 제어할 수 없다. 그래서 동물은 자기조차도 의식하지 못한다.

집중,자기의식 그리고 근원적 충동저항을 대상화할 수 있는 능력은 서로 분리시킬 수 없는 하나의 유일한 구조를 구성하고 있다. 이러한 구조 자체는 오로지 인간만의 특징이다. 이와 같이 자기를 의식하게 되는 것,즉 자기의 실존을 새롭게 반전(反轉)시키고 집중시키는 것은 정신이 가능하게 하는 것인데,이러한 것으로 인간의 두 번째 본질적 징표가 주어진다.

우리가 '인간'이라고 부르는 존재는 자신의 정신에 의해 환경을 세계존재의 차원으로 확대하고 저항들을 대상화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 자신의 생리적이고 심리적인 성질을 다시금 대상화할 수 있다. 또한 모든 개별적인 심리적 체험과 또 자기 생명의 기능들 자체가 갖고 있는 모든 개개의 기능을 다시금 대상화할 수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존재는 자기의 생명조차도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유롭게 던져버릴 수 있다.

동물은 듣고 보지만,자기가 듣고 보는 것을 알지 못한다. 동물의 심리는 기능하고 살아있어도,동물은 결코 심리학자와 생리학자가 될 수는 없다. 우리는 어느 정도까지 동물의 정상적인 상태 속으로 들어가 보기 위해서 인간에게서 대단히 드문 몰아적 상태-즉 의식이 희미해지는 최면에 빠졌을 때,특정한 마약을 복용했을 때,정신을 의식적으로(즉 이미 정신의 도움으로) 마비시키는 기술,예컨대 모든 종류의 주술적인 예식에서-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동물은 또한 그의 충동적 자극을 그의 충동으로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환경의 사물들 자체로부터 생겨나오는 역동적인 견인과 반발로 체험한다. 심지어 어떤 심적인 특성에서 보면 아직도 동물에 가까이 있는 원시인조차도 '나는 이러한 사물을 싫어한다'고 말하지 못하고 '이 사물은 타부(금기사항)'라고 말한다. 동물의 의식에서 보면 환경의 현상물에서 나오는 이러한 유혹과 배척만이 존재할 뿐이다.


제시문 2

카뮈(A Camus)는 진지하게 논의되어야 할 유일한 철학적 문제는 자살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의도한 엄격한 뜻으로 받아들인다 해도 결코 옳은 말은 아니다.

생리학과 진화의 문제에 관심 있는 생물학자는 자의식은 뇌의 시상하부(視床下部)와 대뇌변연계(大腦邊緣系)에 있는 정서중추에 의해 제어되고 형성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중추들은 우리의 의식을 미움,사랑,죄의식,공포 등의 모든 감정으로 채우고 있고 윤리철학자들은 이러한 감정에 의존하여 선악의 기준을 직관하고 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이 이 시상하부와 대뇌변연계를 만들어냈느냐 하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들은 바로 자연선택에 의해 진화되어 온 것이다. 따라서 자아의 존재나 이 자아를 종식시키는 자살은 결코 철학의 중심과제는 아닌 것이다. 시상하부와 대뇌변연계 복합체는 자연히 이러한 논리적 환원을 부인하고,자살을 죄의식과 이타성의 감정으로 본다. 이 점에서는 진화적으로 긴 시간에 걸쳐 볼 때 개개의 생물이 거의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알고 있는 철학자 자신의 정서적 중추가 그의 유아론자(唯我論者)로서의 자각보다 현명하다고 할 수 있겠다.

다윈주의(Darwinism)의 의미에서 볼 때 생물은 그 자신을 위해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생물의 주요 기능은 결코 다른 생물을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유전자를 재생산하는 것이며,따라서 생물은 유전자의 임시운반자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유성생식으로 만들어진 생물은 각기 특유의 존재로서 그 종을 구성하는 모든 유전자를 기초로 하여 우연하게 구성된 유전자 조합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자연선택 과정에서 어떤 유전자들을 그 다음 세대에 더 높은 비율로 물려줄 수 있는 어떤 장치가 생긴다면 그것이 어떤 장치이건 결국 그 종으로 하여금 어떤 특징을 갖도록 해줄 것이다. 그래서 어떤 부류의 장치는 개체의 수명을 연장시키는가 하면 다른 장치는 우수한 교미행동과 그 결과 생기는 자식의 보호를 촉진하기도 할 것이다.

생물의 복잡한 사회행동이 유전자들의 자기복제 기술에 첨가되면 이타성은 보다 증가되어 결국 극단적인 형태로 발전하게 될 것이다. 이 점이 바로 정의상으로 개체의 적응도를 감소시킨다고 하는 이타성이 과연 어떻게 자연선택에 의해 진화할 수 있는가 하는 사회생물학의 중심적 이론문제가 된다. 이에 대한 대답은 바로 혈연적 이유이다. 즉 이러한 이타성을 유도하는 유전자를 같은 혈통의 두 개체가 공유하고 또 그 가운데 한 개체의 이타행동이 이러한 유전자들의 그 다음 세대에 대한 공동의 공헌을 증대시킨다면 이타성의 경향은 그 유전자 풀(gene pool)에 널리 확산될 것이다.

카뮈는 그 자신에 대한 질문,즉 "부조리는 죽음을 명하는가?"에 대해서 정상에 도달하기 위한 투쟁은 그 자체가 이미 인간의 마음을 충족시키는 데 충분하다고 답하고 있다. 이 무미건조한 판단은 아마 맞을지도 모르나 이 말은 진화론에 비춰 면밀히 검토되지 않는 한 어떤 의미도 거의 갖지 못할 것이다. 사람과 같이 고도로 사회성이 있는 종(種)의 시상하부-대뇌변연 복합체는 그에게 잠재해 있는 유전자들이 개체의 생존,번식 그리고 이타성을 능률적으로 발현시키는 행동반응들로 편성될 때에만 최대로 번식할 수 있다는 것을 알거나 아니면 더 정확히 말해서 마치 아는 것처럼 행동하도록 프로그램되어 있다.

따라서 어떤 생물이 긴장으로 가득 찬 상황에 놓이게 되면 뇌의 이 중추복합체는 의식으로 하여금 그 생물을 상반감정의 공존상태로 몰아넣는다. 애정이 증오에 섞이고,공격성은 두려움에,확장은 후퇴에 합쳐져 이들의 혼합은 개체의 행복과 생존을 증대시키는 것이 아니고 이들 감정을 조절하는 유전자들의 전달을 최대한으로 돕게 된다.


[ 성균관대 2006학년도 논술문제 해설 ]

성균관대 논술은 제시문이 특히 어려워. 짧고 쉬운 수능 제시문에 익숙한 학생들은 성균관대 논술 제시문에 당황할 수밖에 없지. 그렇기 때문에 제시문을 정확하게 독해할 수 있느냐가 당락을 좌우할 거야. 채점 기준표에서도 제시문 이해력 및 통계자료 해석 능력이 50%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

성대 논술의 논제는 평가항목별로 쪼개져 있는데 이를 과정평가형 논술이라고 해. 변별력 확보에 용이하지. 평가 기준을 세분화하여 학생들의 분포를 넓힐 수 있고,채점의 공정성도 확보할 수 있거든. 과정평가형 논술에서는 핵심만 간결하게 제대로 쓰는 게 좋아. 성대는 특이하게 원고지를 제공하지 않아. 그럼 각각의 논제를 함께 해결해보자.



Ⅰ.<제시문 1>과 <제시문 2> 각각의 핵심 내용을 설명하시오.

제시문을 정확하게 이해했는지 평가하기 위한 논제야. 이런 논제는 핵심 내용은 학생들이 거의 비슷하게 적어 낸다고 봐야 해. 그래서 감점 안 당하는 게 중요해. 써야 할 말과 불필요한 말을 잘 정리해야 한다는 거지. 제시문의 핵심 개념이나 용어는 반드시 활용해야 하지만 문장을 그대로 옮겨 적는 짓은 감점의 지름길이라는 것 잊지 말자. 제시문 1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동물과 대비하면서 설명하고 있는데 간단하게 정리하면 표와 같아.

제시문 1이 인간을 자연적 생명의 진화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하는 데 반해,제시문 2는 자의식에 관여하는 시상하부와 대뇌변연계가 결국 자연선택에 의해 진화해온 것이라 주장하고 있어. 인간은 유전자의 임시 운반자인 생물일 뿐이라는 거야. 인간의 이타성도 생물학적 이유에 의한 것이며 유전자에 의해 널리 확산될 것이라는 거지. 제시문 2는 자살을 철학이 아닌 생물학의 입장에서 서술하고 있는데 인문계 학생에게 익숙지 않은 내용이었을 거야.



Ⅱ. <제시문 1>의 입장에서 <제시문 2>의 입장을 비판하고,<제시문 2>의 입장에서 <제시문 1>의 입장을 비판하시오.

제시문 1과 제시문 2는 생물학적 진화의 결과물로 인간을 볼 것이냐에 대해 서로 상이한 주장을 하고 있으며 그 구체적인 갈등 지점이 자살이야. 인간 정신을 강조하는 제시문 1의 입장에서 인간과 유사하게 정서중추를 갖고 있는 다른 동물은 자살하지 않는 점을 들어 제시문 2를 비판할 수 있어. 고래가 해안가에서 죽게 되는 것을 자살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나,이는 방향감각 상실 때문이라는 주장이 유력하지. 그리고 제시문 2는 우울증과 같이 자살로 이어지기 쉬운 정신질환이 약물 치료를 통해 회복될 수 있다는 점을 제시문 1의 비판 근거로 삼을 수 있어. 심리치료에 병행한 약물치료의 효과는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지.



Ⅲ.<제시문 1>과 <제시문 2> 중 하나를 선택하고,아래 [표·그림 1]과 [표·그림 2] 중 그와 연관성이 높다고 판단되는 것을 찾아 그 이유를 설명한 후,그 표·그림이 시사하는 내용을 해석하시오.

표·그림 1은 평균수명이 높아질 때 자살률도 함께 올라가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어. 평균수명은 꾸준히 증가하지만 자살률이 일정하게 증가하지 않는 점 때문에 두 지표의 관계가 별 상관없다고 판단할 수도 있으나 하단의 추가 설명에서 '직선은 전체적인 추세를 나타내는 선'이라고 친절하게 밝혀주고 있으니,관련이 있다고 분석하는 것이 타당할 거야.

또한 표·그림 2는 실업률과 자살률이 함께 올라가는 경향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데 자살이 인간의 자의식에 의해서 형성된다는 해석을 가능하게 해주지. 그렇기 때문에 제시문 1은 표·그림 1이나 표·그림 2 중 어느 것에 의해서도 설명될 수 있어. 표나 그림에 대한 분석은 객관적이지만 그에 대한 해석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기억하자. 그렇기 때문에 표 해석도 나름의 이유 설명이 필요한 것이고,그러한 주관적인 해석을 얼마나 타당하게 전개해 나가느냐를 평가하기 위한 것이 이 논제의 의도인 셈이지.



Ⅳ.[표·그림 1]과 [표·그림 2]에서 공통적으로 지적된 사회적 병리현상을 치유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서 Ⅲ에서 선택한 제시문의 입장에 근거하여 자신의 견해를 논술하시오.

공통적으로 지적되는 사회적 병리현상은 '자살'이야. 제시문 1의 입장을 취한다면 결국 자살도 자기 의식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자기 의식을 확고하게 하는 것이 치유방안이 될 거야. 내면을 이성적 정신으로 지켜나감으로써 외부의 압력에 저항할 것을 요구한다는 거야. 제시문 2는 결국 인간의 자의식도 정서중추에 의해 제어되고 형성되는 것으로 주장하고 있으니까 자살을 막기 위해 정서 중추의 조절이 필요하다는 관점으로 나갈 수 있겠어. 결국 자살은 질병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하며 따라서 치료 대상일 뿐인 것이지. 논제 1~3번은 이해,분석능력을 묻기 위한 논제인 데 반해 논제 4번은 독창적인 문제 해결 능력을 요구하는 논제였어. 이 때문에 4번 논제는 기본적인 입장을 정한 후에는 자신의 생각을 과감하게 펼쳐야 한다는 점을 명심하자.

남태균 S · 논술 원장 ok@nonsul.com

[ 표-생글생글 7월 17일자 19면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