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월드컵이 열리던 2002년 6월로 잠깐 돌아가 보자.당시 국민들은 연일 계속되던 '태극전사'들의 승전보에 들떠 있었다.

급기야 사상 첫 4강 진출이라는 놀라운 성적을 거두자 국민들은 흥분의 도가니에 빠졌다.

해방 이후 온 국민이 그토록 열광했던 적이 몇 번이나 있었을까. 하지만 그 열광의 함성 속에 드리워지고 있는 어두운 그림자를 경계하는 사람은 당시 그렇게 많지 않았다. 상당수의 택시운전기사들과 영세 자영업자들은 "한국이 월드컵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건 좋지만 장사가 안 돼서 걱정"이라는 푸념을 늘어 놓곤 했다.

"월드컵이 끝나면 경기가 급격히 나빠질 것"이라는 얘기가 나돌기도 했다.

그 걱정들은 곧 현실로 나타났다.

2002년 7.0%라는 비교적 높은 성장세를 보였던 한국경제는 그 후 '저성장의 늪'에서 헤매게 된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2003년 이후의 경기부진은 외환위기 이후 정부의 무리한 경기부양책의 대가라는 게 일반적인 분석이다.


◆무리한 경기부양은 재정건전성 악화·자산버블 초래

자본주의는 인간이 발명한 그 어떤 경제 체제보다 우수한 체제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결정적 약점으로 꼽히는 게 있다면 바로 경기변동이다.

즉 어떤 때는 경기가 호황을 구가하다가 일정 시간이 지나면 경기가 침체에 빠지는 현상이 주기적으로 되풀이된다.

때문에 정부는 두 가지 경기부양 정책,즉 재정정책과 통화정책으로 경기변동폭을 최소화하려고 항상 노력한다.

경기 부양책은 적절하게만 사용하면 경기 변동으로 인한 서민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잘못 사용되면 득(得)보다는 실(失)이 더 큰 경우도 적지 않다.

예컨대 국내수요가 극도로 부진할 경우 정부는 재정지출을 늘려 소비나 투자 활성화를 도모한다.

그러나 재정지출을 지나치게 늘리면 정부의 빚이 많아져 재정건전성이 나빠진다.

단적인 예가 일본이다.

일본은 1990년대 장기불황 때 재정 지출을 급격하게 늘렸다.

그러나 결과는 경기는 회복되지 않고 재정건전성만 악화됐다. 일본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 규모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가장 높은 수준이다.

통화정책도 마찬가지다.

보통 중앙은행이 기준금리를 낮추면 소비나 투자가 살아나게 마련이다.

그러나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우선 물가불안이 심화된다.

또 금리가 낮아지면 은행에서 싼 값에 돈을 빌려서 주식이나 부동산에 투자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이렇게 되면 주식가격이나 부동산 가격이 단기간에 '적정가치 이상'으로 급등하는 이상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이른바 '자산가격 버블(Bubble)'이 형성될 수 있다.

또 여윳돈을 은행에 묻어두고 거기서 생기는 이자로 생활하는 사람들의 소득도 줄어든다.

재정정책과 통화정책 외에 정부는 건설이나 금융부문의 각종 규제완화를 통해 경기부양을 시도하기도 한다.

그러나 경기부양을 겨냥한 규제완화는 항상 부작용을 낳았다.


◆카드버블·벤처버블의 교훈

과도한 경기부양으로 인한 부작용은 최근 몇 년만 살펴봐도 적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앞서 언급한 2002년 월드컵 이후 경기 침체의 직접적 원인은 '신용카드 버블'이다.

정부는 외환위기 이후 내수경기가 부진하자 신용카드 발급에 대한 각종 규제를 완화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신용카드 회사들은 마구잡이 식으로 카드 발급을 늘리기 시작했다.

신용카드를 발급받은 소비자들도 분에 넘치는 소비를 일삼았다.

그 결과 한국 경제는 2002년까지 연평균 7%대의 높은 성장세를 보였다.

그러나 그 대가는 참혹했다.

신용카드 남발로 인한 가계부채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하자 민간소비는 2003년 이후 2년 연속 사상 유례없는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소비자들의 지갑은 얼어붙기 시작했고,자영업자들은 극도의 경기 침체로 신음했다.

그 결과 우리 경제의 성장률은 최근 3년 연속 잠재성장률(5% 내외)을 밑돌았다.

벤처버블도 이와 유사하다.

정부는 외환위기 직후 침체된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1999년 5월 '코스닥시장 활성화 대책'을 발표했다.

이에 따라 그해 10월 코스닥지수가 장중 한때 2900 선까지 치솟는 등 코스닥시장은 과열양상을 띠었다.

그러나 거품론이 일면서 불과 9개월 만에 코스닥지수는 고점 대비 80% 이상 빠진 525포인트까지 폭락했다.

이로 인해 당시 코스닥 주식을 매입했던 투자자들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고,벤처기업들의 상당수도 도산했다.

일부 벤처기업은 기술이나 상품개발보다는 정부나 투자자의 자금을 끌어들이는 데 급급한 나머지 불법도 서슴지 않았으며,이로 인해 증권시장의 선진화가 늦어지고 신뢰도가 크게 추락하는 부작용도 발생했다.


[ 선거 의식한 경기부양책 경계해야 ]

잘못된 경기부양책은 부작용이 크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경기부양의 유혹에 빠져드는 것은 선거와 무관치 않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경기가 좋지 않으면 국민의 지지도가 하락하고,이는 결국 집권당의 선거 패배로 이어지므로 부작용을 무릅쓰고 경기부양에 나선다는 것이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최근 내놓은 '재정정책의 경기조절 역할에 대한 실증적 연구'도 이러한 점을 지적한다. 이 보고서는 1987년 민주화 이후 정부가 대표적 경기부양 수단인 재정정책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민주화 이후에는 경기가 나빠질 때 발생하는 정치적 압력 또한 커지기 때문에 정부가 경기부양을 위해 불필요한 재정지출을 늘릴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는 정부가 매년 국회에 제출하는 예산제안서에도 나타난다.

80년대에는 수입과 지출이 균형을 이루는 건전 재정을 많이 강조한 반면 90년대부터는 건전재정 원칙을 유지하면서도 재정의 적극적인 역할을 강조하는 경향이 많았다는 것이다. 특히 87년 이전에는 경기가 나쁠 때는 재정지출 규모를 늘리고,경기가 좋을 때는 지출 규모를 축소하는 식으로 재정정책이 경기변화에 대칭적으로 대응했으나,87년 이후에는 이런 관계가 약화됐다고 보고서는 분석했다.

생글독자 여러분,나라의 장래를 생각하지 않고 표를 얻기 위해 선심정책을 쓰는 정당에는 표를 찍지 말아야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