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퓰리즘이란 유령이 남미를 배회하고 있다.
남미가 좌파로 물들고 있다고 떠들썩하다.
최근 영국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남미의 좌파 바람을 '포퓰리즘의 복귀'로 정의했다.
좌파 가면을 쓴 남미의 '고질적 전통'(포퓰리즘)이 재탄생했다는 것이다.
최근 중남미의 포퓰리즘은 자원 국유화로 나타나고 있다.
중남미 최대 산유국인 베네수엘라가 모든 자원에 대해 국유화 조치를 단행한 데 이어 볼리비아도 가스와 유전의 국유화를 선언했다.
이 같은 자원 국유화 바람은 페루 멕시코 등으로 확대될 조짐도 보이고 있다.
◆포퓰리즘의 원조는 아르헨티나의 페론주의
포퓰리즘의 역사는 반세기를 훨씬 넘는다.
다수의 빈민과 서민층의 인기를 얻기 위한 정책을 추진했던 아르헨티나의 페론주의가 대표적인 포퓰리즘으로 알려져 있다.
1943년 6월4일 아르헨티나에서 통일장교단(GOU)이 이끄는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다.
장교단의 리더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48세의 육군대령 후안 도밍고 페론은 쿠데타 이후 노동부 장관을 거쳐 부통령이 됐고,1946년 대통령 선거에서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아 최고 권력을 움켜쥐었다.
포퓰리즘의 전형적 예로 흔히 거론되는 페론주의가 처음 날개를 펼치는 순간이었다.
집권한 페론은 친노동 정책을 펼쳐 인기를 누렸다.
당시 아르헨티나는 산업화의 물결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들었다.
돈도 없고,일자리도 없는 가난한 사람들은 하루하루 생계가 걱정인 상태였다.
페론 정부는 개혁이라는 미명 아래 저소득계층의 임금을 올려주고 복지를 늘리는 등 각종 물량공세를 폈다.
또 언론 보도의 자유를 통제하고 외국산업의 배제와 산업의 국유화를 단행했다.
부패 청산을 위한 개혁조치들이 취해지고 노동단체에는 전례가 없는 각종 혜택들이 주어졌다.
노동자 대중들에겐 이 같은 '행복한 기억'들이 쉽게 잊혀지지 않았고 이는 페로니즘으로 승화됐다.
하지만 페론의 공(功)은 여기까지다.
페론은 1949년 헌법을 개정,재선에 성공하면서 독재의 길로 들어섰다.
자신의 정치이념을 '정의주의'(Justicialismo)라는 이념으로 포장하며 노동자들의 계속적인 지지를 이끌어냈다.
1955년에는 사회개혁을 명분으로 교회까지 탄압해 가톨릭 교도로부터도 거센 반발을 샀다.
결국 군부는 그해 9월 혁명을 일으켜 페론을 국외로 추방했다.
페론은 그에 대한 향수를 이기지 못한 대중들의 지지에 힘입어 1973년 9월 다시 대통령에 당선되지만 10여개월 뒤인 1974년 7월 세상을 떠났다.
◆포퓰리즘의 결과는 참담
포퓰리즘은 아르헨티나를 후진국으로 만든 채 지금도 국민들을 신음케 하고 있다.
자원이 풍부한 멕시코와 브라질도 포퓰리즘 정책의 마수에서 헤어날 수 없었고,그 결과 오히려 빅부 격차가 확대됐다.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아르헨티나는 '남미의 진주'로 불렸던 부국이었다.
곡물 육류 수출로 세계 5위의 경제력을 자랑하던 이 나라는 그러나 20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점차 경제 후진국으로 곤두박질쳤다.
불과 한 세대 만에 진주가 광채를 잃어버린 것이다.
30년 만에 국민소득은 절반 이하로 떨어졌고,전반적인 소득 감소로 중산층이 무너지자 이제 두 사람 가운데 한 명은 빈곤층으로 전락한 상황이 됐다.
이처럼 아르헨티나가 급격히 추락한 것은 '남미병'의 상징인 포퓰리즘 때문이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1940년대에 노조세력을 바탕으로 집권한 후안 페론의 포퓰리즘 정책이 두고두고 후대에 고통을 물려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포퓰리즘 정책들은 대다수 서민들을 위한다는 기치를 내건다.
때문에 대중으로부터 열광적인 지지를 받는다.
"없는 자의 이익을 옹호한다"며 선심성 정책을 쏟아내고 국민의 이성보다는 감성을 자극한다.
이런 정치적 접근은 더할 나위 없는 효과를 발휘한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부메랑이 돼 돌아온다.
모든 구성원이 희생과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
전문가들은 "포퓰리즘은 민주주의가 실패하는 가장 큰 원인이자 나라 경제를 거덜내는 원흉"이라며 "포퓰리즘은 사회를 멍들게 하고 결국은 국가의 존립까지 위태롭게 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강동균 한국경제신문 사회부 기자 kdg@hankyung.com
남미가 좌파로 물들고 있다고 떠들썩하다.
최근 영국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남미의 좌파 바람을 '포퓰리즘의 복귀'로 정의했다.
좌파 가면을 쓴 남미의 '고질적 전통'(포퓰리즘)이 재탄생했다는 것이다.
최근 중남미의 포퓰리즘은 자원 국유화로 나타나고 있다.
중남미 최대 산유국인 베네수엘라가 모든 자원에 대해 국유화 조치를 단행한 데 이어 볼리비아도 가스와 유전의 국유화를 선언했다.
이 같은 자원 국유화 바람은 페루 멕시코 등으로 확대될 조짐도 보이고 있다.
◆포퓰리즘의 원조는 아르헨티나의 페론주의
포퓰리즘의 역사는 반세기를 훨씬 넘는다.
다수의 빈민과 서민층의 인기를 얻기 위한 정책을 추진했던 아르헨티나의 페론주의가 대표적인 포퓰리즘으로 알려져 있다.
1943년 6월4일 아르헨티나에서 통일장교단(GOU)이 이끄는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다.
장교단의 리더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48세의 육군대령 후안 도밍고 페론은 쿠데타 이후 노동부 장관을 거쳐 부통령이 됐고,1946년 대통령 선거에서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아 최고 권력을 움켜쥐었다.
포퓰리즘의 전형적 예로 흔히 거론되는 페론주의가 처음 날개를 펼치는 순간이었다.
집권한 페론은 친노동 정책을 펼쳐 인기를 누렸다.
당시 아르헨티나는 산업화의 물결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들었다.
돈도 없고,일자리도 없는 가난한 사람들은 하루하루 생계가 걱정인 상태였다.
페론 정부는 개혁이라는 미명 아래 저소득계층의 임금을 올려주고 복지를 늘리는 등 각종 물량공세를 폈다.
또 언론 보도의 자유를 통제하고 외국산업의 배제와 산업의 국유화를 단행했다.
부패 청산을 위한 개혁조치들이 취해지고 노동단체에는 전례가 없는 각종 혜택들이 주어졌다.
노동자 대중들에겐 이 같은 '행복한 기억'들이 쉽게 잊혀지지 않았고 이는 페로니즘으로 승화됐다.
하지만 페론의 공(功)은 여기까지다.
페론은 1949년 헌법을 개정,재선에 성공하면서 독재의 길로 들어섰다.
자신의 정치이념을 '정의주의'(Justicialismo)라는 이념으로 포장하며 노동자들의 계속적인 지지를 이끌어냈다.
1955년에는 사회개혁을 명분으로 교회까지 탄압해 가톨릭 교도로부터도 거센 반발을 샀다.
결국 군부는 그해 9월 혁명을 일으켜 페론을 국외로 추방했다.
페론은 그에 대한 향수를 이기지 못한 대중들의 지지에 힘입어 1973년 9월 다시 대통령에 당선되지만 10여개월 뒤인 1974년 7월 세상을 떠났다.
◆포퓰리즘의 결과는 참담
포퓰리즘은 아르헨티나를 후진국으로 만든 채 지금도 국민들을 신음케 하고 있다.
자원이 풍부한 멕시코와 브라질도 포퓰리즘 정책의 마수에서 헤어날 수 없었고,그 결과 오히려 빅부 격차가 확대됐다.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아르헨티나는 '남미의 진주'로 불렸던 부국이었다.
곡물 육류 수출로 세계 5위의 경제력을 자랑하던 이 나라는 그러나 20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점차 경제 후진국으로 곤두박질쳤다.
불과 한 세대 만에 진주가 광채를 잃어버린 것이다.
30년 만에 국민소득은 절반 이하로 떨어졌고,전반적인 소득 감소로 중산층이 무너지자 이제 두 사람 가운데 한 명은 빈곤층으로 전락한 상황이 됐다.
이처럼 아르헨티나가 급격히 추락한 것은 '남미병'의 상징인 포퓰리즘 때문이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1940년대에 노조세력을 바탕으로 집권한 후안 페론의 포퓰리즘 정책이 두고두고 후대에 고통을 물려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포퓰리즘 정책들은 대다수 서민들을 위한다는 기치를 내건다.
때문에 대중으로부터 열광적인 지지를 받는다.
"없는 자의 이익을 옹호한다"며 선심성 정책을 쏟아내고 국민의 이성보다는 감성을 자극한다.
이런 정치적 접근은 더할 나위 없는 효과를 발휘한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부메랑이 돼 돌아온다.
모든 구성원이 희생과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
전문가들은 "포퓰리즘은 민주주의가 실패하는 가장 큰 원인이자 나라 경제를 거덜내는 원흉"이라며 "포퓰리즘은 사회를 멍들게 하고 결국은 국가의 존립까지 위태롭게 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강동균 한국경제신문 사회부 기자 kd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