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퓰리즘은 대중의 지지를 바탕으로 하지만 실제로는 특정 지도자나 독재자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 정치행태다.

포퓰리즘의 근본 요소는 개혁을 내세우는 정치 지도자들의 정치적 책략으로 구성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선거를 치를 때 유권자들에게 경제논리에 어긋나는 선심 정책을 남발하는 것이 전형적인 포퓰리즘이다.

◆다수의 의견(대중)은 항상 옳은가

포퓰리즘에 빠진 정치 지도자들이 흔히 자신들의 지지기반으로 내세우는 게 다수의 의견,즉 여론이다.

여론이 원하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여론은 '대중'(大衆·mass)과 같은 의미로 볼 수 있다.

대중이란 지위 계급 직업 학력 재산 등의 사회적 속성을 초월한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로 이뤄진 집단을 말한다.

특정한 기준에 따라 선악의 가치 판단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군중 속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사람들 모두를 의미한다.

대중은 현대 민주주의의 바탕이 되기도 했지만 다수의 의견(대중)이라고 해서 언제나 옳다고 할 수는 없다.

다수의 의견만 고집하다 보면 소수의 목소리가 전혀 반영되지 않게 된다.

지난해 온 나라를 떠들석하게 만들었던 '황우석 교수 사태'가 대표적이다.

황우석 신드롬에는 그의 팀이 이룩한 객관적 연구 성과 외에 정치와 언론이 대중의 감수성을 자극하면서 만들어낸 '소망의 합작품'이었던 측면이 크다.

한 마디로 한국적 대중사회가 과학 영웅으로서의 황 교수를 애국심과 인도주의의 코드에 입각해 생산하고 소비했던 것이다.

하지만 건전한 민주주의를 위해 필요한 것은 대중이 아니라 '공중'(公衆·public)이다.

공중은 대중과 달리 이성적인 판단 능력을 갖고 있다.

각종 정보와 경험을 통해 획득한 지식을 바탕으로 객관적으로 판단한다.

다시 말해 공중은 공공성이나 책임성을 염두에 두고 독립적으로 사고하며 이성적으로 행동한다.

공중은 소수자의 논리를 존중하기 때문에 독재를 막는 최후의 보루이기도 하다.

◆나치즘은 포퓰리즘 정치의 극단적 형태

포퓰리즘은 역사적으로 숱한 갈등과 고통을 안겨주기도 했다.

로마시대에 정상적인 입법기관인 원로원을 장악하지 못한 독재자 줄리우스 카이사르가 원로원을 피해 직접 대중에게 호소하면서 정치를 독재화시킨 '시저리즘'(Caesarism)을 시작으로,1789년 프랑스 시민혁명 이후 로베스 피에르와 당통 등이 주도한 '피의 정치'도 포퓰리즘을 악용한 것이었다.

레닌이나 스탈린에 의한 '무산자 독재의 전위대'도 마찬가지다.

특히 독일 히틀러의 나치즘은 포퓰리즘이 극단적이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포퓰리즘 선동정치의 대표자인 히틀러는 의회의 절차 민주주의를 이용해서 독재 권력을 장악했다.

히틀러는 당대에 가장 진보적이고 민주적이라는 평가를 받던 '바이마르(Weimar) 헌법'의 허점을 이용해 정권을 탈취하고 독재의 발판을 마련했다.

히틀러는 1933년 3월 의회 의원의 3분의 2가 넘는 441표를 얻어 '수권법'을 통과시켰다.

수권법 통과를 위해 히틀러는 바이마르 헌법을 철저히 이용했다.

1933년 2월 그는 제국의사당에서 일어난 원인 미상의 화재를 공산주의자 소행으로 돌리면서 포고령을 발포했다.

이는 바이마르 헌법 제48조의 비상사태에 관한 규정에 따라 제국 인민들의 기본권을 잠정적으로 중단시키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그리고 헌법상의 기본권 규정과 민주적 절차 규정을 개정하는 데 필요한 3분의 2 이상의 의석 확보를 위해 의회를 해산하고 새로 선거를 치렀다.

이 과정에서 반대파인 사회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 후보들이 스스로 망명하도록 유도하거나 체포·추방하면서 나치당의 의석을 늘렸다.

이렇게 해서 가톨릭중앙당의 의원들과 함께 헌법 개정에 필요한 정족수를 만든 뒤 1937년 수권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제국 내각에 입법권과 조약 체결권을 주고 내각의 법안 제정 권한을 다시 총통에게 부여함으로써 히틀러 일인독재의 바탕을 마련했다.

이후 나치는 아무런 견제도 받지 않은 채 600만명에 달하는 유대인 대학살과 6000만명이 넘는 전쟁 사상자를 낳은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파국의 길로 치달았다.

직접 민주정치 또는 대중(민중) 민주정치를 표방하는 포퓰리즘 정치는 결국 소수의 광기 어린 전위대에 의한 자의적 전횡과 횡포로 귀결되기 십상이라는 것을 역사는 말해주고 있다.

강동균 한국경제신문 사회부 기자 kd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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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틀러, 유대인을 '공공의 적'으로 만들어 독재 ]

히틀러로 대표되는 나치 독일에서 유대인을 학살한 이유는 나치 독일의 출발점에서 찾을 수 있다.

1929년 세계 대공황으로 모두가 살기 어렵던 시절 히틀러는 독일 민족주의를 내세우면서 등장한다.

당시 그가 주장한 민족주의의 내용은 독일에 거주하는 다른 민족들이 독일의 경제와 사회를 좀먹어 나머지 독일 국민이 피해를 보고 있다는 것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 독일 경제는 과도한 인플레이션과 막대한 전쟁 배상금 등으로 극심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실업자가 급증하는 상황에서 독일 사회 내부에서는 유대계 자본가들이 국가 경제를 조작해 부를 축적하고 있다는 인식이 자라났다.

속수무책으로 경제가 무너지기 시작했던 1933년 히틀러는 독일인의 피와 땀의 결정은 독일인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정권을 잡았다.

히틀러는 공산 체제의 구 소련과 이 공산 체제를 주도적으로 세운 유대인과 슬라브족,이 세 가지 요소를 없애려 유럽 각국에서 잡아들인 유대인과 집시,공산주의자 및 노약자(비유대인) 등을 대량 학살했다.

사회적 소수에 대한 공격을 불황의 해법으로 선택했던 것이다.

대중의 불만과 공격성을 정치의 무대에 무차별적으로 끌어들였던 것.

히틀러는 아리안족의 우수성,게르만족의 위대함을 선전했고,이러한 민족적·인종적 허상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다른 인종과 민족을 공격했다.

유대인들은 당시 사회적으로 소수였고,중세 이후로 유대인들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소위 '만만한 먹잇감'이 됐다.

결국 히틀러는 유대인이라는 소위 '공공의 적'을 조작해 내는 방법으로 독재를 이끌어갔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