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화제를 낳고 있는 영화 '다빈치 코드'가 지난 18일 개봉됐다.

댄 브라운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이 작품은 상영 전부터 '神聖冒瀆'이라는 종교적인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는 영화 내용이 종교적 신념을 侵害한다는 이유로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지만 법정은 이를 棄却했다.

그러나 기독교계의 반발은 계속되고 있다.

기독교측의 반발에 대해서는 따가운 시선도 없지 않다.

특정 종교가 자신들의 신념을 이유로 예술의 영역을 제한하는 것은 종교 이기주의일 뿐만 아니라 명백하게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것이다.

영화 '다빈치 코드'는 이처럼 '표현의 자유'와 '종교적 신념'이라는 오랜 논쟁에 다시 불을 지피고 있다.

多元化한 사회 안에서 종교를 어떤 시각으로 바라 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이번 갈등에서의 핵심적인 주제다.

다빈치 코드에 대한 일반 대중들의 관심은 기독교회로서는 當惑스러울 수밖에 없다.

이 영화가 예수의 신성과 십자가의 犧牲을 부정하고 있고 이는 결국 기독교의 敎理 체계를 근본에서 뒤흔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빈치 코드가 근거로 삼고 있는 복음서는 최근세인 20세기 들어 이집트에서 발견된 '나그함마디 문서'이다.

그 내용은 예수와 마리아 막달레나의 결혼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 복음서는 초대교회에서 영지주의라는 異端으로 배격된 '그노시스' 종파의 문서이며,現存하고 있는 어떤 신약성경 복음서 사본보다 100년 이상 연대가 늦다.

이미 역사적 자료로서 가치를 잃었다는 의미이다.

다빈치 코드에 나오는 역사적인 배경 또한 잘못된 것들이 많다.

니케아 공의회 때 성경을 取捨選擇했다는 역사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또 마녀재판이나 십자군 전쟁을 마리아 막달레나와 연관시키는 것도 무리가 따른다.

다빈치의 그림에 대한 해석에도 시대적인 배경을 무시한 자의적 해석이 허다하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고 해서 영화의 상영을 막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영화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기각한 판결문에서도 분명히 적시하고 있듯이 영화는 예술적 虛構를 다루는 것으로 반드시 사실에 부합해야 할 필요는 없다.

종교적 교리와 다르다고 해서 창작 행위를 부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를 막는다는 것은 일원적 종교사회에서나 가능한 일이고 결국 全體主義와 다를 것이 없다.

현대사회는 개인의 사상의 자유를 존중하는 다원화한 사회이다.

여러 신앙이 공존하고 다른 생각과 의견을 지닌 사람들이 더불어 살아가고 있다.

그리스도교를 의도적으로 歪曲하고 폄하하는 것은 물론 당사자에게는 매우 불편한 일이 될 수 있지만 그럴수록 열린 자세가 필요하다.

신앙적 차원에서 보더라도 그렇다.

믿을 자유가 있는 것처럼 믿지 않을 자유도 분명 존재하는 것이고 교회 밖에서 다른 해석이 나온다고 해서 교리적 이유로 이를 강제로 제지할 수는 없다.

다빈치 코드와는 또 다른 차원에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종교 관련 이슈 하나가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神社 參拜 문제다.

다빈치 코드가 종교와 예술의 문제라면 고이즈미 총리의 신사참배는 종교와 정치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신앙의 자유라는 명목으로 軍國主義의 상징인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는 고이즈미 총리의 행동은 종교를 내세워 정치적인 행동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모습이다.

'신사참배'는 일본 고유의 민간 종교인 신도(神道)의 전례행사다.

신도는 샤머니즘적 조상 숭배가 골자다.

우리나라로 말하자면 '서낭당'과 같은 토속종교로서 일종의 원시 종교다.

그러나 1882년 메이지 천황 주도 아래 '국가신도 비종교 정책'이라는 것을 추진하면서 점차 정치적 색채를 강하게 띠게 되었다.

이 정책을 꾸준히 추진한 결과 신사참배는 종교라기보다는 국민 통합 이데올로기라는 상징적인 역할을 하게 됐다.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는 바로 이 같은 정치 논리의 연장선상에 있다.

더구나 일종의 원시 종교인 신도에 대해 일국의 최고 정치지도자가 '종교적 신념'을 갖는다는 것은 매우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정치가 종교를 수단화하면 사회는 전체주의적 단색 사회로 치달을 가능성이 크다.

마르크스가 종교를 비판의식을 약화시키는 아편으로 비유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에리히 프롬이 지적했듯이 모든 인간은 절대가치에 대해 자신을 헌신하려는 종교적인 욕구를 가지고 있다.

불완전한 인간 자신의 모습을 극복하려는 인간 행위의 가장 강력한 동기를 종교가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종교의 힘은 뒤르켐과 베버가 주장한 것처럼 사회를 통합하는 갈등 해소의 기제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사회가 다원화하면서 종교의 통합적 기능은 크게 약화했고,역으로 사회 갈등을 觸發하는 요소로 작용하는 측면도 없지 않다.

종교가 다원화한 사회에 적응하는 것을 거부하거나 정치에 이용될 때 그러한 역기능은 극대화한다.

종교적 신념은 지켜져야 하겠지만 시대의 요청을 읽어낼 줄 아는 지혜도 필요하다.

다원적 이념과 종교를 수용할 줄 아는 합리적인 자세와 보편적 인류애라는 열린 마음이라야 사회와 종교는 조화를 이루어 나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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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읽기

·神聖冒瀆 (신성모독)
·侵害 (침해)
·棄却 (기각)
·多元化 (다원화)
·當惑 (당혹)
·犧牲 (희생)
·敎理 (교리)
·異端 (이단)
·現存 (현존)
·取捨選擇 (취사선택)
·虛構 (허구)
·全體主義 (전체주의)
·歪曲 (왜곡)
·神社參拜 (신사참배)
·觸發 (촉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