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가 도랑에 빠졌다면 우선 소를 건져내고 그 다음에 어떻게 해서 도랑에 빠졌는지 알아낸 뒤 다시는 소가 도랑 근처에 가지 못하게 대책을 세워야 한다."

세계적인 복사기 업체인 제록스의 앤 멀케이 회장 겸 최고경영자(CEO)는 한 동료 기업인에게 들었던 이 조언을 항상 가슴 속에 품고 산다.

그는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하거나 위기에 빠질 때마다 이 '도랑에 빠진 소 이야기'를 떠올린다.

파산 일보 직전까지 갔던 제록스를 구해낸 멀케이 회장.그는 강력한 결단력을 가진 인물로도 유명하다.

CEO에 오르기 직전인 2001년 7월 뉴욕 로체스터 생산 공장을 폐쇄한 일화는 널리 알려져 있다.

당시 사업 개시 1년밖에 되지 않은 제록스의 잉크젯프린터부문 공장을 폐쇄하는 조치를 내린 것이다.

그곳에는 1500명의 직원이 일하고 있었고 더구나 자신이 일군 사업부였다.

그러나 그는 우선 회사를 건져내야 한다는 일념에 과감한 결단을 내린 것이다.

멀케이는 2000년 5월 제록스의 사장으로 임명된다.

당시 제록스는 수년간의 판매 감소와 높은 비용으로 침몰해가고 있었다.

직원들도 고객만큼이나 불만에 가득 차 있었다.

그해 10월 제록스는 16년 만에 첫 분기 손실을 기록했고 빚은 쌓여갔다.

또 증권거래위원회는 제록스의 회계 부정에 대한 수사에 들어갔다.

결국 제록스는 멀케이의 결단력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사장직에 오른 후 즉각 구조조정에 착수했다.

판매사업부를 조정하고 10억달러의 연간 비용을 줄이는 일에 착수했다.

직원 수를 줄이는 데도 과감하게 나섰다.

그가 사장이 된 지 1년 후인 2001년 8월 제록스의 사정이 차츰 나아지고 있다는 평가가 나오기 시작했다.

직원과 임원들 사이에 신뢰가 생기고 더 이상 파산 얘기도 나오지 않았다.

경영실적은 여전히 손실을 벗어나지 못했지만 시장의 기대치를 웃돌았다.

멀케이는 2001년 8월 제록스의 CEO직을 맡았다.

2년 후인 2003년 초가 되자 제록스가 다시 살아나고 있다는 확실한 신호가 나오기 시작했다.

제록스가 2002년 4분기에 주당 1센트의 순익을 달성,3년 만에 처음으로 연간 기준 흑자를 기록했다고 발표한 것이다.

제록스의 올해 1분기 순익은 2억달러였다.

전년 동기(2억1000만달러)보다는 소폭 감소했지만 한때 고사위기에 빠졌던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변화다.

제록스의 재기는 멀케이 회장의 끝없는 구조조정 덕이다.

제록스는 2002년 한 해에만 5300명을 감원했다.

사장 시절인 2000년에도 8600명을 해고했다.

구조조정을 통해 최대 9만6000여명이던 직원을 5만5000여명으로 줄였다.

또 2002년 신뢰 추락의 원인이 됐던 회계 부정 스캔들도 무난하게 마무리했다.

조기에 신뢰를 회복하고 경영 정상화에 집중해야 한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멀케이는 직원들의 사기를 북돋우는 데도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사장 재임 초기 3개월 동안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직원들과 수십 차례의 회의를 가졌다.

사원들의 어려움을 돕기 위해 필요한 곳이면 언제 어디든 달려갔다.

그의 열정에는 제록스에 몸담았던 25년간의 세월이 묻어 있다.

24세에 복사기를 파는 일을 시작으로 제록스의 일원이 됐다.

그의 남편도 제록스에서 판매 관리자로 일하다 은퇴했다.

멀케이는 이런 배경 때문에 CEO 승진을 앞두고 제 살을 깎아내는 고통이 따를 구조조정과 혁신의 적임자가 아니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당시 제록스의 컨설턴트 겸 고문이던 한 임원은 "그녀가 '제록스 정신'을 지녔다는 사실은 좋은 소식이기도 하고 한편으론 나쁜 소식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멀케이는 이런 우려가 나올 때마다 기꺼이 제록스의 문화를 바꿀 것이라고 말했고 그렇게 실천했다.

그는 결국 고사위기에 빠졌던 제록스를 구해낸 것이다.

안정락 한국경제신문 국제부 기자 jr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