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신문 2006년 4월18일 A39면

박효종 < 서울대 교수·정치학 >

우리 사회에서는 언제부터인가 미국과 관련된 현안이 생기면 쌍지팡이를 짚고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니며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는 진보주의 운동가 집단이 생겨났다.

사안에 따라 판단하는 '용미주의자들'과는 달리 미국이기 때문에,또 미국과 더불어 하는 일이기 때문에 '무조건' 반대하는 근본주의적 성향의 반미운동가들이 국정과 여론을 좌지우지할 만큼 강력한 세력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다 보니 평택 미군기지 확장 이전사업에도 반미단체들이 기세를 올리고 있다.

미군기지 이전은 한·미 두 나라가 합의해 국회 비준 동의까지 얻은 사업인데도,일전을 불사하겠다는 반미단체들의 시퍼런 서슬에 국방부와 경찰조차 눈치를 보고 있다.

그런가 하면 정부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추진하겠다고 밝히자 이때를 놓칠세라 반대하는 움직임이 가시화되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 저지 범국민운동본부'가 결성돼 거리로 나선 것이다.

여기에는 양대 노총을 비롯 환경운동연합,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등 270개 진보계열 노동시민단체가 참여하고 있다.

지금 상황을 보면 "반미면 어때?" 정도가 아니라 "반미가 아니면 안돼!"하는 수준까지 다다른 것이다.

언제부터 반미운동이 하나의 유행이 되고 진보의 상징이 되었을까.

미군 훈련 도중 사고를 당한 '효순이 미순이' 문제가 터지고 촛불시위가 벌어지면서부터일까.

미국은 해방 이후부터 우리에게 특별한 존재였다.

이 땅에 상당수의 병력을 주둔시키고 있는 미국은 '해방자'이면서도 '점령자'이고 '수호자'이면서도 '경쟁자'라는 독특한 역할모델로 인식되었다.

50년 이상 지속되고 있는 한·미 동맹관계의 복합적 성격을 보면 동반자와 복종관계,협력과 갈등,우호적 관계와 경쟁 등 애증의 요소가 섞여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미국은 좋은 것'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살았던 기성세대와는 달리 민주화 이후 진보주의자들에게 미국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가지고 있는 이율배반적 존재,혹은 좋은 것보다 나쁜 것을 더 많이 가지고 있는 사악한 존재로 투영되기 시작한 것이다.

386세대에 미국은 인권이나 공정성 등 자유민주주의적 가치의 기수라기보다는 우월한 힘을 바탕으로 자국의 국가이익을 약자에게 강요하는 제국주의자로 보여졌다.

특히 한국의 안보를 보장함으로써 경제 발전과 민주화를 가능케 한 '시혜자'라기보다는 광주민주화운동을 억압한 군부정권과 결탁한 세력,혹은 한국의 대북 포용정책에 동참하지 않음으로써 남북 화해를 방해하는 배후 세력이라는 인식이 퍼져나갔다.

그 결과 한국의 진보주의자들은 반미주의자가 되었다.

그러나 미국에 대하여 "이제까지 할 말을 하지 못했다"며 "할 말은 하겠다"는 것이 미국적인 모든 것에 대하여 날을 세우며 증오와 불만을 쏟아내는 모습으로 나타나서는 곤란하다.

"대미 자주냐,대미 의존이냐" 하는 문제를 근본주의자처럼 접근하기보다는 기존에 존재하는 한·미 동맹을 통하여 한국의 국익과 민족적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한반도 주변에 강대국들이 엄존함으로써 한국이 고립된 상태로 자주와 독립을 유지하기 어려운 지정학적 상황에 처해있는 것이 현실이라면,"자주냐,의존이냐"하는 문제가 선택의 핵심이 될 수 없다.

오히려 동맹을 통하여 자주를 실사구시화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우리에겐 앞으로 통일과 경제 발전 등 '지속 가능한' 국가적 번영을 이루어야 한다는 절체절명의 과제가 있다.

또 민주주의와 인권이 만개하는 선진화 공동체를 만들어야 하는 과제도 소홀히 할 수 없다.

그러한 중차대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최선의 길을 찾는다면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우회'하기보다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통해' 가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라는 점을 반미운동가들은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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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전적인 동맹관계 찾는 노력 필요


로마가 강성했던 시절,갈리아(현재 프랑스) 사람들은 로마와 라인강 동쪽의 게르만족의 위협 사이에서 고민해왔다.

로마의 지배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자주독립의 감정과 게르만족의 침략으로부터 안전을 지켜주는 우산(로마군대)이 필요하다는 현실론 속에서 우왕좌왕한 적이 많았다.

때로는 로마에 반기를 들고,때로는 로마와 함께 게르만을 공격하기도 했다.

케사르가 이 지역에서 7년간 전쟁을 치른 기록인 '갈리아 전쟁기'는 당시 정서를 잘 보여준다.

대한민국은 주변에 초강대국들을 두고 있다.

태평양 건너이긴 하지만 세계 최강 미국이 떡 버티고 있고 한반도 아래쪽에는 일본이 자리잡고 있다.

위로는 러시아(옛 소련)와 중국이 국경을 맞대고 있다.

우리에게 미국의 존재는 엄청난 것이다.

일본의 강점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켰고 동시에 소련과 체제 경쟁을 벌이는 강대국으로서 자국 군대를 한반도에 주둔시켰다.

중국과는 6·25 때 전쟁을 치르기도 했다.

미국은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한국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고 지금까지 굳건한 동맹관계를 형성해왔다.

박효종 교수가 지적했듯이 한국은 미국에 이중 감정을 갖고 있다.

6·25전쟁을 함께 치른 혈맹국으로서 많은 도움을 준 것에 대해서는 고마워하면서도 우리나라의 운명에 지나치게 개입한 것 아니냐는 의문을 갖고 있는 사람 또한 적지 않다.

이들은 국가의 자주권을 강조하면서 '대미의존(對美依存)' 문제를 제기해왔다.

무엇이 의존이고 무엇이 협력인지 명쾌하게 구분하기는 어렵다.

외교뿐만 아니라 모든 교류와 교역은 상호 의존이면서 동시에 상호 협력이기 때문이다.

미국이 국익(國益)에 따라 한국과의 관계를 적절히 이용했던 것도 사실일테고,한국 역시 옛 소련과 경쟁해야 했던 미국의 처지를 적절히 활용하면서 실익을 추구했을 것이다.

이 같은 과정들은 정치적이고 외교적인 것이 많아 공개되지 않은 것이 꽤 있을테고,그 내막을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이유도 없다.

중요한 것은 속사정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자주'와 '종속'에 대한 논란만 확산되는 것은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이다.

원래 두 나라의 외교나 경제 협력에서 긍정적인 것들은 소리없이 전달되는 반면 부작용은 크게 부각되곤 한다.

'주한 미군 철수'가 아닌 '평택 이전'은 우리나라의 지정학적 위험을 최소화하고 해외투자자에 대한 신뢰를 높여 경제가 안정적으로 성장하는 토대가 되지만 그 효과는 공기처럼 일반인에게 느껴지지 않는다.

반면 미군 기지의 평택 이전에 따른 현지 주민 강제 이주 문제는 일부 사람들의 이해를 침해할 수 있다.

이로 인한 부작용 같은 것들을 최소화하면서 한국과 미국이 상호 이익을 극대화해나가는 전략을 세심히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유일한 길일 것이다.

현승윤 한국경제신문 경제교육연구소 연구위원 hyuns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