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벌주의'의 해악을 바로잡으려는 노력을 역사속에서 찾아보면 대표적으로 영조의 '탕평책'이 있다. 영조는 당쟁을 해소하기 위해 각 당파의 인재를 요직에 고루 등용하는 정책을 폈다. 당파로 나뉘어져 오랜 기간 조정의 패권을 놓고 다투던 정치세력에 균형을 잡고자 하는 목적이었다.

신임옥사(辛壬獄事?왕통문제와 관련해 소론이 노론을 숙청한 사건)를 겪으며 왕위에 올라 당파싸움의 폐단을 뼈저리게 겪은 영조는 1724년 즉위하자마자 탕평정책의 의지를 밝혔다. 영조는 자신의 옹립에 공이 컸던 '노론(老論)'측 인사 뿐 아니라 자신의 '세제(世弟)' 책봉에 반대했던 '소론(少論)'에서도 고루 인재를 등용했다. 영의정에는 노론 사람을,우의정에는 소론 사람을 앉히는 식이었다.

하지만 이런 탕평책의 와중에서도 기존의 남인이 '시파'와 '벽파'로 갈라지는 등 당파는 늘어만 갔다. 산술적 균형만 맞춘 탕평 인사는 오히려 필요한 인재를 요소요소에 배치하는 것에 걸림돌이 되기도 했다. 또한 탕평책으로 조정 전체로 보면 여러 당파의 인사가 등용되는 결과가 나왔지만,결국엔 각 당파의 사람들이 조정에 각 부처별로 또다시 모여 다투는 폐단은 여전히 계속됐다.

쇼트트랙의 파벌 싸움을 해결하는 데도 이런 딜레마가 있다. 동계올림픽 몇 달 전 빙상계는 한체대파와 비한체대파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남녀대표팀 코치를 각각 다른 파벌에서 한 명씩 선출했다. 파벌 다툼을 수면 위로 드러내지 않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하지만 그 결과 남녀 선수들이 각각 성별에 따라서가 아니라 자신이 선호하는 코치 밑에서 훈련하는 결과가 나타났다. 일부 종목의 선수 선발에서는 파벌 간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실력있는 선수가 출전하지 못하는 일도 일어났다.

이처럼 양 파벌 간의 산술적 균형만 맞추려는 것은 파벌 싸움을 잠시 중단시킬 수는 있어도 결국엔 똑같은 딜레마에 봉착하게 된다. 근본적인 해결책이 없이는 빙상계에서 그 어떤 '탕평책'도 미봉책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