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은 1970년대 초까지 아시아에서 일본을 제외하고는 '가장 잘나가던 국가'였다.
2차 세계대전의 폐해가 적었던 데다 부존 자원과 농산물도 풍부했다.
1954년 미스 코리아 출신의 한국 여성이 필리핀 부자에게 시집을 갔고,베트남에 파병된 필리핀 병사들은 한국 병사들의 10배 가까운 월급을 받았을 정도였다.
서울에 있는 주한 미국대사관 빌딩과 장충체육관을 필리핀 기업이 지을 만큼 필리핀의 위상은 우리를 압도했다.
그러나 지금의 필리핀은 정치적으로도,경제적으로도 아시아의 후진국이다.
지난해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1170달러로 우리나라의 10분의 1에도 못 미친다.
지난 20년 동안 필리핀의 외채는 눈덩이처럼 늘어나 국내총생산(GDP)의 80%에 이르렀고,외채 이자 상환금으로만 지난해 예산의 33%를 쏟아부어야 했다.
한 달 소득이 23달러(약 2만2000원)가 안 되는 극빈층이 전체 인구(8500만명)의 35%에 달한다.
필리핀의 민주주의가 흔들리는 데에는 이 같은 '경제적인 후진성'이 가장 큰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지주들이 지배하는 사회
필리핀은 아직도 쌀과 코코넛 사탕수수 바나나 등을 생산하는 농업 위주의 사회다.
총 노동인구의 40% 이상이 농업에 종사하고 농민의 대부분은 지주로부터 밭을 빌려 농사를 짓는 소작농들이다.
대지주들이 필리핀의 거대한 지배세력으로 자리잡고 있다.
반면 제조업은 국내총생산의 25%,총 노동인구의 10%에 불과하다.
그것도 식품 가공과 음료 석유제품 섬유 신발 등 경공업 분야에 주로 포진해 있다.
노동자들이 대규모 공장에서 엄격한 규율을 배우고 소득도 쌓아 가면서 중산층으로 성숙해 가는 과정을 필리핀은 경험하지 못했다.
사회 지도층을 형성하는 필리핀 대지주들은 산업화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는다.
산업화를 진행할 경우 사회주도 세력이 교체(대지주→기업가)될 가능성이 높은데,이미 엄청난 부(富)를 소유하고 있는 필리핀 대지주들이 산업화에 적극적으로 나설 이유가 없다.
대농장 위주의 노예 노동에 의존했던 남미 국가들이 공업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지 않았던 것과 비슷하다.
◆부패한 사회 지도층
사회계층 간 이동이 거의 없는 폐쇄된 사회에서는 부패가 만연할 수밖에 없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상층부로 올라갈 수 없기 때문에 공직자들은 권력을 동원해 신분 상승을 이루려는 부정부패 유혹에 쉽게 빠져든다.
실제로 필리핀의 가장 큰 문제는 사회 지도층의 부정부패다.
지난해 7월 글로리아 아로요 대통령의 남편이 불법 도박 조직으로부터 뇌물을 받았다는 의혹이 나온 데 이어 아들과 가족들이 연루된 부정 의혹까지 이어져 국민들의 반감은 커졌다.
아로요 대통령은 정치 성향이 강한 부패 군인들을 강제로 전역시키고 군대 예산을 투명하게 만들기 위한 개혁을 여러 차례 시도했으나 그 성과는 미미했다.
이에 따라 소장파 장교들을 중심으로 불만이 증폭돼 왔다.
거꾸로 강제 전역당한 일부 군 장교들이 아로요 반대 세력이나 기업가들과 연계해 아로요를 압박하고 있다.
지난 22일 일부 군부 세력의 쿠데타 기도를 포함해 지금까지 아로요의 축출을 노린 공식 쿠데타만 여섯 차례나 될 정도로 정국은 불안정하다.
아로요 대통령에 반대하는 시위 군중들은 개혁 실패와 부정부패 등을 이유로 대통령의 하야를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외국인들과 우수 인재들은 혼돈 속으로 빠져들고 있는 필리핀을 떠나고 있다.
◆한계 드러낸 '피플 파워'
필리핀의 '피플 파워(민중혁명)'는 1986년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를 몰아냈다.
2001년엔 부패 스캔들로 얼룩진 조셉 에스트라다를 몰아내는 힘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들어 '피플 파워'를 발휘했던 필리핀 국민들이 의욕을 잃고 있는 것 같다.
지난달 한 여론 조사에서 조사 대상자의 36%만이 페르디난드 마르코스를 몰아낸 게 잘한 일이라고 답하는 등 필리핀 국민들 사이에서 체념하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
응답자의 3분의 1 이상은 "기회만 되면 이민을 가고 싶다"고 답했다.
수십 년 동안 경제난으로 생활고에 시달린 필리핀의 많은 사람들은 이제 '누가 대통령이 돼도 똑같다'고 생각하고 있다.
산업화가 이뤄지지 않는 후진적 경제구조가 지속되는 한 '민주화의 꿈'을 실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필리핀 국민들은 몸으로 체득하고 있다.
안정락 한국경제신문 국제부 기자 jr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