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통계] 36. 대답해주지 않는 부동층

선거전의 여론조사에서는 중립항목이 포함된 경우가 많다.


그 이유는 아마도 우리나라 국민의 정치에 대한 높은 관심에도 불구하고 선거조사에서는 부동층이 30% 내지 50%에 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따라서 부동층을 잡기 위한 방안이 각 후보자들의 중요한 선거전략이 되고 있다.언론의 선거결과 예측에서도 부동표 해석이 중요한 변수가 되고 있다.


1994년 대구와 경주 보궐선거에서 민자당은 자체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대구지역은 백중세를,경주지역은 우세를 예상했다.


그러나 결과는 두 곳 모두에서 패배하였는데 그 이유는 40%로 나타났던 부동표에 대한 투표성향을 잘못 예측한 데 있었다고 한다.


민자당의 예상과는 달리 부동표는 대부분 야당 성향이었다.


부동층에 대한 정의는 "선거에서 지지 후보를 정하지 못한 유권자그룹"을 말한다.


그러나 부동층 안에서도 '지지 후보를 결정했으나 말해줄 수 없는 경우'가 많은 것이 우리의 현실이 아닐까? 특히 전화조사에서 이런 현상이 두드러진다.


아마도 그동안의 권위주의 체제 하에서 민감한 질문에 대해서는 자신의 의견을 가능한 한 숨기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조사 주체의 의도나 조사 결과의 사용 목적에 대한 의문 때문에도 속마음을 털어놓는 것을 망설이는 사람도 많다.


낯선 사람이 전화 속에서 불쑥 던지는 질문에 진지하게 응답하지 않는 것은 당연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선거를 앞두고 이 나라 언론들은 한결같이 '전에 없는 부동표'를 무슨 대단한 괴변처럼 떠들어댔다.


…내가 보기에는 이 나라 사람들에게는 '진의(眞意)아닌 의사표시'가 한 정신적인 습성을 이룬 듯하다.


김왕흥씨의 경우,나는 그가 투표 당일까지 한번도 자신의 지지자나 지지 정당을 밝히는 걸 본 적이 없다.


오히려 그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그야말로 전형적인 부동표로 보였다.


그러나 그의 가족들은 말할 것도 없고,어지간히 가까운 사람들이면 모두 그가 누구를 찍을지 훤히 알고 있었다.


…게다가 이런 현상은 유독 김왕흥씨에게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김왕흥씨와 자주 어울리는 시장패거리만 해도 투표 당일까지 명확하게 자신의 지지를 밝힌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그들 또한 서로들 누가 누구의 지지자인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런 그들이 과연 얼굴도 모르는 사람의 갑작스러운 전화에 선뜻 제 속마음을 털어놓았을까?" (오딧세이야 서울,이문열,1권,194쪽,민음사,1993)


전화조사에 응답하기를 꺼리는 사람들의 심리는 전화조사의 오차를 크게 한다.


오차가 크면 후보자 간의 지지도 차이가 근소한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전화조사로 누가 당선될 것인지를 예측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우리나라의 선거 여론조사는 1980년대 후반 처음 시작된 후 지금까지 여러 차례의 선거를 치르면서 경험을 쌓아 왔다.


특히 몇 차례의 대통령 선거와 지자체 선거에서 당선자를 정확히 예측함으로써 조사 능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1996년,2000년,2004년에 실시된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틀린 예측이 많아서 국민의 비난을 받기도 했다.


투표 마감 바로 직후 개표가 시작되기도 전에 각 방송사들은 일제히 선거 결과에 대한 예측 방송을 했는데,사람들은 먼저 그러한 '초스피드'에 놀랐고 이어서 예측의 큰 오차에 놀랐다.


1996년 선거의 경우,253개 지역구의 당선자를 예측하기 위해 세 방송사와 5개 조사 회사가 3차에 걸쳐 '투표자 공동 조사'를 실시했다.


조사는 지역구별로 500~1000명의 유권자에 대해서 전화로 실시했는데,표본은 연령 성별 외에도 동별 인구 수,역대 투표 성향,부모의 고향,학력 등을 고려해 선정했다고 한다.


조사 결과 방송사들은 신한국당이 175석,국민회의 72석,자민련 33석,그리고 민주당이 11석을 얻을 거라고 단정적으로 보도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 예측과 차이가 많아서 '엉터리 여론 조사' 파문이 일어났다.


더욱이 로이터 UPI 등 세계 주요 외신은 이 투표 여론 조사에 대해 '수백만달러를 들인 한 편의 코미디''선거 여론조사 사상 최악의 우둔한 결과' 등의 혹평으로 조롱했고 방송 3사는 뉴스 시간에 공개적으로 사과해야 했다.


잘못된 예측의 원인은 여러 가지로 분석할 수 있다.


조사 요원의 대다수가 아르바이트생이었고,응답 결과를 분석할 때 무응답이나 거짓응답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것을 일차적으로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방송사들이 오차의 한계를 무시하고 선거 예측을 지나치게 단순화해 보도하여 혼란을 더욱 가중시켰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일치된 견해다.


오차의 한계를 무시한 방송사들의 속보 경쟁으로 말미암아 선거 예측이 선정적으로 확대 보도되었던 것이다.


조사 결과는 1,2위의 득표율 차이가 10% 이상인 지역구는 '당신 확실',5~10%는 '경합',그리고 5% 이내는 '혼전'으로 분류되었다.


물론 방송사들도 이 오차의 한계를 고려하기는 했다.


즉 175석의 예상이 나온 신한국당의 경우 최소 130석,최대 189석까지 나올 수 있다고 덧붙였던 것이다.


그러나 방송을 시작하자마자 단정적으로 각 정당별 의석 수와 각 지역구별 당선 예상자 명단을 먼저 발표했고 심지어는 당산 예상자와 인터뷰를 하는 성급함을 보였다.


개표 방송 초반에 기선을 제압하려는 방송사 간의 과열 경쟁으로 신속한 보도를 앞세우다 보니 고려해야 할 '오차의 한계'는 뒷전에 밀린 것이다.


253개 지역구 전체에 대한 당선자를 정확히 예측한다는 것은 무리다.


더욱이 표 차이가 근소할 것으로 예상되는 지역구가 많은 경우에는 오차의 한계를 반드시 고려해 예측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투표자 조사 결과 오차의 한계(4.3%포인트) 이내의 예상 득표율 차이를 보인 선거구가 160여개나 되었다.


따라서 방송사들은 '당선 예상''경합 우세''혼전' 등으로 구분해서 예측하거나 각 당별로 최저 의석 수와 최대 의석수를 제시하는 게 적절했을 것이다.


조사 회사들의 주장에 따르면 투표자 조사 결과는 오차의 한계 범위 내에서 실제 선거 결과와 거의 맞았다고 한다.


여론조사의 선진국인 미국도 선거 여론조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1930년 이후 60여년간 여러 차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정확성과 신뢰성을 높여 왔다.


그에 비하면 일천한 우리의 선거 여론조사가 겪은 이런 실수는 한번쯤 거쳐야 할 통과 의례일 수도 있다.


어느 나라든지 잘못된 예측으로 인한 망신의 경험을 갖고 있다.


유권자의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키고 올바른 선거 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선거 여론조사는 더욱 확대,발전되어야 한다.


우리의 조사와 결과 해석의 수준을 더욱 정교하고 정확하게 하는 데 이 같은 경험을 좋은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김진호 교수 jhkim@kndu.ac.kr


[ 약력 ]


△서울대 경영대 졸업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 경영학 석·박사


△(전)KBS 선거예측조사 자문위원


△(현)국방대 경영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