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전역에 에너지 위기감을 불러일으켰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천연가스 분쟁이 지난 4일 전격 타결됐다.


하지만 이번 사태는 러시아가 에너지 자원을 앞세워 세계 무대에서 영향력을 키우려는 야심을 분명히 드러냈다는 점에서 향후 가스와 석유를 둘러싼 국제적 분쟁이 더욱 격화될 것을 예고하는 신호탄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세계 에너지 패권 전쟁 불붙나] 이제 영토전쟁 아닌 자원전쟁 본격화
◆러시아,에너지 자원 무기화


러시아·우크라이나 '가스전쟁'의 발단은 가스 가격에 대한 대립이었지만 근저엔 에너지 대국으로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러시아의 의도가 깔려 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구소련 시절부터 '누가 슬라브족의 원조냐'라는 문제를 놓고 대립해 왔다.


양국은 종교도 같은 정교(正敎)이면서 러시아 정교와 우크라이나 정교로 각각 나뉘어 있다.


그러다 1991년 소련이 붕괴되면서 우크라이나가 독립한 뒤 양국은 화해를 모색했다.


하지만 작년 우크라이나가 '오렌지 혁명'을 통해 민주국가로 변신하고 빅토르 유셴코 대통령이 친서방 정책을 펴면서 갈등이 깊어졌다.


우크라이나가 노골적으로 친유럽·서방화 정책을 표방하고 나서자 러시아로서는 견제할 필요성이 생긴 것이다.


러시아는 이번 가스전쟁을 통해 오는 3월 총선을 앞두고 있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영향력을 극대화하겠다는 속셈을 드러냈다.


에너지 문제를 우크라이나의 정치 이슈로 만들어 서방세계로 가까이 가려는 유셴코 대통령의 입지를 약화시키겠다는 계산인 것이다.


◆러시아,에너지 산업 국유화로 자원전쟁 대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1990년 민영화됐던 에너지 산업을 꾸준히 국영화해 '자원의 무기화'에 대비해 왔다.


그 결과 현재 러시아에서 생산되는 원유의 30%는 국가가 통제할 수 있게 됐다.


러시아는 이번 '가스관 시위'를 통해 냉전시대 구소련의 영화를 재현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념과 핵무기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던 과거와 달리 유전 및 가스관으로 세계를 위협하는 시대가 도래했음을 보여준 것이다.


영국 BBC는 "이번 사태는 국제사회가 에너지로 인한 새로운 갈등과 긴장을 경험하게 된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고 분석했다.


◆러시아 '명분',우크라이나 '실리'


러시아 국영 가스회사 가즈프롬의 알렉세이 밀레르 회장은 지난 4일 모스크바에서 가진 기자회견을 통해 "우크라이나와의 가스가격 인상 협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고 밝혔다.


양측은 가즈프롬과 오스트리아 라이파이슨은행의 합작회사인 로스우크레네르고를 중간에 세워 가스를 거래하는 타협안을 도출했다.


이 안에 따르면 향후 5년간 가즈프롬은 로스우크레네르고에 1000㎥당 230달러에 가스를 판매하고,로스우크레네르고는 이를 95달러의 할인된 가격으로 우크라이나에 공급하게 된다.


러시아는 지난 1일 가스공급을 중단하면서까지 관철하려고 했던 230달러라는 '명분'을 얻은 셈이다.


반면 50달러인 기존 수입 가격을 80달러까지만 올려줄 수 있다고 버텼던 우크라이나는 자신들의 주장에서 15달러만 더 주고 사태를 해결하는 '실리'를 차지했다.


이로 인해 생기는 230달러와 95달러의 차액인 1000㎥당 135달러의 손실은 로스우크레네르고가 떠안게 됐다.


이 손실을 보전하기 위해 로스우크레네르고는 우크라이나가 투르크메니스탄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에서 수입하는 가스까지 독점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일각에서는 가즈프롬이 이번 사태로 에너지 위기감이 고조된 유럽 국가들의 압력이 커지는 것에 부담을 느껴 230달러의 명분을 살린 채 실제로는 우크라이나측의 소폭 인상안을 들어줬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이날 양측의 협상 타결 발표가 유럽연합(EU) 25개 회원국 에너지 관계자들의 긴급회의가 열리기 몇 시간 전에 이뤄졌다는 점도 이 같은 해석을 뒷받침한다.


장경영 한국경제신문 국제부 기자 longr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