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자 하나로 억만장자 대열에 오른 기업인이 있다.
도미노(Domino's)피자의 창업자 톰 모나건(69)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4세 때 고아가 된 뒤 30세에 세계 최대 피자 체인점을 건설한 그의 일생은 한편의 드라마처럼 감동적이다.
아버지가 크리스마스 이브에 세상을 떠났을 때 모나건은 겨우 4세였다.
혼자 힘으로 가정을 꾸리기가 힘에 겨웠던 어머니는 미시간주의 한 가톨릭 고아원에 그의 동생과 함께 모나건을 입양시켰다.
모나건은 그 곳에서 사제들과 수녀의 손에서 자랐다.
◆신선한 피자를 만드는 가게로 출발
그의 어릴적 꿈은 사제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신학교에서 친구들과 다투다 징계를 받고 사제의 꿈을 접고 해병대에 입대한다. 1959년 제대 후 모나건은 미시간 주립대학에 입학할 등록금을 벌기 위해 신문 가판대에서 일했다. 그러나 학업과 일을 병행하기 어려웠고 병까지 얻어 결국 대학을 중퇴해야 했다.
기회는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미시간주 앤아버의 한 식당 주인으로부터 피자 가게를 인수하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은 것이다. 인수 가격은 500달러에 수천달러의 부채를 떠안는 조건이었다. 당시 23세의 젊은이였던 모나건은 학업을 계속하지 못한 설움을 달래며 피자에 인생을 걸기로 다짐했다. 상호는 이탈리아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도미니크'로 정했다.
모나건은 피자가 손상되지 않고 소비자에게 확실히 배달될 수 있도록 피자 만드는 모든 과정을 개선하기로 하고 색다른 아이디어를 내느라 골몰했다. 그리고 두 가지 혁신적인 방법을 생각해 냈다. 큰 사각형의 골판지 상자와 피자가 배달되는 동안 식지 않도록 '보온 상자' 또는 절연체로 만든 작은 주머니를 사용하기로 한 것이다.
그는 컨베이어형 오븐과 피자 트레이,피자 절단도구 등도 개발했다. 이 모든 도구는 신선한 피자를 만드는데 들어가는 노동력과 시간을 단축시키는 데 목적이 있었다.
대학가에서 그의 피자는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다. 해마다 신규 매장을 2~3개씩 늘려나갈 정도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회사의 재정 상태는 항상 빠듯했다. 사정을 알아본 결과 동업자로 참여한 요리사가 회계를 조작,날마다 현금을 빼돌렸던 것이다. 모나건은 7만5000달러의 빚까지 떠안게 되었고,그의 피자 가게는 64년 파산하게 된다.
◆맛과 서비스로 도미노 체인점 성공시켜
하지만 그는 포기할 수 없었다. 젊음을 몽땅 쏟아부은 사업을 그만둔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맛과 서비스를 제공하면 피자 사업은 반드시 성공한다는 확신으로 1년 만에 '도미노'란 이름으로 피자 체인점 사업을 새롭게 시작했다.
모나건은 피자가 배달됐을 때 식거나 미지근하면 아무리 최고의 재료로 맛있게 만들어도 헛수고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점포마다 배달 시간이 30분을 넘지 않는 것을 철칙으로 삼도록 지시했다. 이 '30분' 아이디어는 처음에는 단지 시간상의 목표였지만 나중에는 도미노 피자의 품질을 증명하는 증표가 됐고,지방의 일개 피자 체인점이 미국을 대표하는 유명 브랜드로 우뚝 서게되는 발판이 돼주었다.
그는 일명 '스폰서십 프로그램'도 도입했다. 가맹점주들이 우수 직원으로 추천하면 이 직원들이 도미노 피자점을 개설할 때 우선권을 주고 자금 지원도 해주는 프로그램이다. 이 제도는 직원들에게 '도미노 가족'의 일원으로 충성심을 북돋웠고 이런 충성파들은 '30분 이내 배달'이라는 도미노의 경영 수칙을 철저히 엄수했다.
◆흥청망청으로 기업 넘긴 뒤 자선사업에 몰두
도미노 체인점은 순식간에 수천개로 불어났고 모나건도 억만장자 대열에 오르게 된다. 1980년대 들어 그는 자신이 열렬히 응원하던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야구단을 매입했고,박물관 극장 농장 등 관심있는 사업을 가리지 않고 사들이는 과욕을 부렸다. 자동차 수집 취미까지 생겨 1억5000만달러를 들여 클래식 자동차 150대를 구입하기도 하는 등 흥청망청 돈을 써버렸다.
최고경영자(CEO)가 중심을 잃자 1989년 59%였던 도미노의 시장 점유율은 3년 뒤 경쟁 업체인 피자헛에 1위 자리를 넘겨줘야 했다. 도미노의 매출은 점차 줄어들었고 파산하는 점포도 속출했다. 뒤늦게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달은 모나건은 1998년 투자회사인 베인 캐피털에 10억달러를 받고 도미노 피자를 매각한다.
이후 모나건은 그동안 모은 재산을 이용해 여러개의 가톨릭 자선 단체를 출범시켰다. 보통 사람도 열심히 노력하면 엄청난 부를 쌓을 수 있다는 자신의 성공담을 알리는 일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물론 실패담도 빼놓지 않는다.
유영석 한국경제신문 국제부 기자 yooys@hankyung.com
도미노(Domino's)피자의 창업자 톰 모나건(69)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4세 때 고아가 된 뒤 30세에 세계 최대 피자 체인점을 건설한 그의 일생은 한편의 드라마처럼 감동적이다.
아버지가 크리스마스 이브에 세상을 떠났을 때 모나건은 겨우 4세였다.
혼자 힘으로 가정을 꾸리기가 힘에 겨웠던 어머니는 미시간주의 한 가톨릭 고아원에 그의 동생과 함께 모나건을 입양시켰다.
모나건은 그 곳에서 사제들과 수녀의 손에서 자랐다.
◆신선한 피자를 만드는 가게로 출발
그의 어릴적 꿈은 사제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신학교에서 친구들과 다투다 징계를 받고 사제의 꿈을 접고 해병대에 입대한다. 1959년 제대 후 모나건은 미시간 주립대학에 입학할 등록금을 벌기 위해 신문 가판대에서 일했다. 그러나 학업과 일을 병행하기 어려웠고 병까지 얻어 결국 대학을 중퇴해야 했다.
기회는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미시간주 앤아버의 한 식당 주인으로부터 피자 가게를 인수하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은 것이다. 인수 가격은 500달러에 수천달러의 부채를 떠안는 조건이었다. 당시 23세의 젊은이였던 모나건은 학업을 계속하지 못한 설움을 달래며 피자에 인생을 걸기로 다짐했다. 상호는 이탈리아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도미니크'로 정했다.
모나건은 피자가 손상되지 않고 소비자에게 확실히 배달될 수 있도록 피자 만드는 모든 과정을 개선하기로 하고 색다른 아이디어를 내느라 골몰했다. 그리고 두 가지 혁신적인 방법을 생각해 냈다. 큰 사각형의 골판지 상자와 피자가 배달되는 동안 식지 않도록 '보온 상자' 또는 절연체로 만든 작은 주머니를 사용하기로 한 것이다.
그는 컨베이어형 오븐과 피자 트레이,피자 절단도구 등도 개발했다. 이 모든 도구는 신선한 피자를 만드는데 들어가는 노동력과 시간을 단축시키는 데 목적이 있었다.
대학가에서 그의 피자는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다. 해마다 신규 매장을 2~3개씩 늘려나갈 정도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회사의 재정 상태는 항상 빠듯했다. 사정을 알아본 결과 동업자로 참여한 요리사가 회계를 조작,날마다 현금을 빼돌렸던 것이다. 모나건은 7만5000달러의 빚까지 떠안게 되었고,그의 피자 가게는 64년 파산하게 된다.
◆맛과 서비스로 도미노 체인점 성공시켜
하지만 그는 포기할 수 없었다. 젊음을 몽땅 쏟아부은 사업을 그만둔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맛과 서비스를 제공하면 피자 사업은 반드시 성공한다는 확신으로 1년 만에 '도미노'란 이름으로 피자 체인점 사업을 새롭게 시작했다.
모나건은 피자가 배달됐을 때 식거나 미지근하면 아무리 최고의 재료로 맛있게 만들어도 헛수고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점포마다 배달 시간이 30분을 넘지 않는 것을 철칙으로 삼도록 지시했다. 이 '30분' 아이디어는 처음에는 단지 시간상의 목표였지만 나중에는 도미노 피자의 품질을 증명하는 증표가 됐고,지방의 일개 피자 체인점이 미국을 대표하는 유명 브랜드로 우뚝 서게되는 발판이 돼주었다.
그는 일명 '스폰서십 프로그램'도 도입했다. 가맹점주들이 우수 직원으로 추천하면 이 직원들이 도미노 피자점을 개설할 때 우선권을 주고 자금 지원도 해주는 프로그램이다. 이 제도는 직원들에게 '도미노 가족'의 일원으로 충성심을 북돋웠고 이런 충성파들은 '30분 이내 배달'이라는 도미노의 경영 수칙을 철저히 엄수했다.
◆흥청망청으로 기업 넘긴 뒤 자선사업에 몰두
도미노 체인점은 순식간에 수천개로 불어났고 모나건도 억만장자 대열에 오르게 된다. 1980년대 들어 그는 자신이 열렬히 응원하던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야구단을 매입했고,박물관 극장 농장 등 관심있는 사업을 가리지 않고 사들이는 과욕을 부렸다. 자동차 수집 취미까지 생겨 1억5000만달러를 들여 클래식 자동차 150대를 구입하기도 하는 등 흥청망청 돈을 써버렸다.
최고경영자(CEO)가 중심을 잃자 1989년 59%였던 도미노의 시장 점유율은 3년 뒤 경쟁 업체인 피자헛에 1위 자리를 넘겨줘야 했다. 도미노의 매출은 점차 줄어들었고 파산하는 점포도 속출했다. 뒤늦게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달은 모나건은 1998년 투자회사인 베인 캐피털에 10억달러를 받고 도미노 피자를 매각한다.
이후 모나건은 그동안 모은 재산을 이용해 여러개의 가톨릭 자선 단체를 출범시켰다. 보통 사람도 열심히 노력하면 엄청난 부를 쌓을 수 있다는 자신의 성공담을 알리는 일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물론 실패담도 빼놓지 않는다.
유영석 한국경제신문 국제부 기자 yoo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