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성 그리고 탈근대의 문제는 많은 대학에서 지속적으로 출제되는 문제다.

논술이 근본적으로 '지금 여기'가 무엇인가를 묻는 질문이기 때문이다.구체적으로는 '근대의 의미가 무엇인가' 혹은 '근대의 발전과정이 놓치고 지나간 것들의 의미'등 다양한 주제가 가능할 것이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하게 파악해야 할 것은 근대 출현의 의미일 듯하다.

첫째는 개인의 출현이 지니고 있는 의미이고 둘째는 근대적 합리성의 의미다.

요즈음 각 대학의 논술 출제 경향을 보면 세계화의 맥락과 양상에 관련되는 문제들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세계화라는 현상은 단순히 하나의 맥락으로 정리되지 않는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그 양상 역시 마찬가지로 문화적인 것에서부터 국제 정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 속에서 살펴볼 수 있다.

(1)개인의 출현과 소멸

개인의 출현은 근대의 본질적인 문제다.

전근대로부터 근대가 성립했을 때 중요한 요소중 하나가 '신분제의 해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신분적 구속으로부터의 자유로운 개인들을 출현시켰다.

17세기의 철학자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명제가 의미하듯 자신이 주변의 환경이나 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이성에 의해 비로소 존재한다는 명제다.

'의심하는 나'는 진리에 이르는 출발점으로 잡았던 주체로서의 인간이다.

근대에 이르러 자유로운 인간이라는 새로운 발명은 너무나도 위대한 것이었지만,한편에서는 국민국가라는 거대한 사회적 체제를 만들고자 하는 역사적 과정은 이러한 자유로움에 대한 새로운 통제방식을 필요로 했다.

신이라는 절대적 윤리가 사라진 시대에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인 생존과 그것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저항은 인간의 기본적 권리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러한 권리들의 대립으로 인해 벌어지는 사회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정부와 국가라는 새로운 지배체제와 이념이 요청됐다.

결국 정책 실행을 위한 끊임없는 통계들이 축적되면서 발달한 통계학이나 개인의 관리를 위한 정교화된 관료제,개인적인 삶을 통제하기 위해 고안된 감옥,학교,병원으로 대표되는 사회통제기구 등의 발달은 개인을 전체 속에서 움직이는 작은 부품으로 소외시키게 되는 것이다.

이성을 통해 세계의 주인인 개인의 행복을 추구했던 근대 사회의 역사는 결과적으로 모든 정보와 생산수단을 통제하는 구조적 제도를 완성시켜 감으로써 오히려 개인을 축소시키고 개인을 소멸시키는 결과를 야기하게 됐다.

그런 점에서 '개인의 출현과 소멸'이라는 근대의 프로젝트는 중요한 논술 주제다.

서구 200년의 근대화 과정을 단숨에 따라잡고자 했던 한국의 '조국 근대화'과제는 '지금 여기'의 모든 문제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로운 21세기의 '개인'의 필요성은 탈근대의 과제와 맞물려 있다.

새롭게 대두된 개인의 역사적 등장은 사회의 다양성과 다층성을 확대시키고 사회는 점차 국가의 절대적 통제를 벗어나 상대적 자율성을 지닌 체계로 변모하게 된다.

이제 국가는 개인을 통제하는 수단이 아니라 개인의 욕구를 최대한 만족시킬 수 있는 체제로의 변화를 요청받고 있다.

(2)근대적 합리성 비판

근대성의 두 번째의 주제는 근대가 낳은 합리성에 대한 문제다.

이는 20세기에 들어오기 이전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에 의해 예견된 적이 있다.

제도화된 권력에 근거한 통제는 근대 이성주의자들의 고안한 통제형식이다.

이러한 통제 조직의 전형이 바로 관료제인 것이다.

근대가 성립하는 과정에서 이전보다 훨씬 광활한 지역을 관리하려다보니 각 지역의 인구변동과 생산력,토지관계,가족관계 등의 수치가 통계적으로 파악되어야 했다.

각 지역의 치안행정 등을 해결하기 위한 체계적인 관료제도가 필요해진 것이다.

더욱이 교회의 권위가 약화되면서 교회가 담당하고 있던 일상에 대한 관리기능까지도 국가가 담당해야 했다.

관료제도는 점점 정밀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관료제를 통해 많은 일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효율성이 중시되어야 한다.

때문에 이성적으로 구조화되고 조직화된 위계적 제도가 요청됐다.

여기서 사람들은 특정한 책임을 맡고 규칙이나 성문화된 규정,그리고 자신들보다 높은 지위의 사람들이 행사하는 강제수단에 따라 행동하게 된다.

이러한 관료제는 일을 조직하는 데 있어서 과거의 어떤 제도보다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고안된 형식구조를 취하게 된다.

제도화된 규칙이나 규정은 그 종사자로 하여금 목적을 이루기 위한 최선책을 취하도록 강제한다.

주어진 업무는 여러 부분으로 나눠지며,각 부서가 주어진 업무의 정해진 부분을 책임진다.

일의 전말을 아는 사람은 좀처럼 존재하지 않으며 일에 대한 구상과 실행이 분리되는 현실이 빚어진다.

베버는 이러한 과정을 '합리화 과정'이라 부르면서,이 과정이 서구에서 어떤한 원리로 이루어졌는지를 분석해낸다.

업무의 성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효율성은 합리화 과정의 주된 목적이 되고,사람마다 달라질 수 있는 일의 순서를 '규정을 통해 가장 효율적으로 정식화'함으로써 예측가능한 단계로 확정한다.

모든 인간 생활의 양태는 일의 효율성을 위해 수량화되어 계산 가능해지고,이러한 규칙화와 수량화는 인간을 통제하는 무인기술로 작동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형식합리성'이다.

이는 인간이 주어진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최적의 수단을 추구하는 것이 규칙과 규정 그리고 보다 큰 사회구조를 정화시키는 과정에서 결정됨을 뜻한다.

다른 한편으로 관료제 조직이 점차 비대해지고 그 위계질서가 불변하는 것으로 고정될 때 인간소외를 부추기는 권력기구가 된다.

모든 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단계에만 숙달되어 무언가 덜 떨어진 인간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컨베이어벨트에서 부속품 하나만을 하루종일 끼우는 노동자는 더 이상 세계의 주인으로서의 이성적 존재는 더 이상 아닌 것이다.

베버는 이러한 현상을 '합리성의 쇠감옥'이라고 표현한다.

그 합리성이란 형식안에 갖쳐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그들의 기본적인 인간성마저 부정된다는 의미에서 쇠감옥인 것이다.

동시에 이처럼 이성이 행복에 이르기 위한 도구로서의 제도적 효율성만을 고민하고 스스로 추구해야 할 가치와 이상에 대한 반성적 사고는 뒷전으로 밀려나가게 된 것을 아도르노 등은 '도구적 이성'이라 부른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제출되고 있는 것이 하버마스이다.

(3)근대적 시공간

근대성의 세 번째 주제는 시공간의 문제다.

연대와 고대를 중심으로 출제빈도가 대단히 높은 주제다.

느림의 의미를 묻는 문제나 속도 혹은 공간의 합리성 비판 등의 문제로 출제되었고 이른바 경제지리학이라는 교과에서 중심적으로 다루고 있는 문제라는 점에서 중요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예컨대 성균관대에서 기출된 문제는 프랜시스 케언크로스의 '거리의 소멸-디지털 혁명'과 앨빈토플러의 '제3의 물결',밀렌쿤데라의 '느림',마이클 하임의 '가상현실의 철학적 의미'등을 제시문으로 출제하여 현대사회의 과학기술과 시공간의 체험방식을 묻고 있다.

'매일 한 건물에서 다른 건물로 무리지어 옮겨 다니고,저녁마다 이 과정을 거꾸로 되풀이했다는 사실'과 '출퇴근을 위해서는 하루 두 번 이동량이 가장 많은 시간에 맞게 구축된 수송망이 필요하며 도로는 가장 혼잡할 때의 교통량의 하중을 수용해야 하며 통근열차와 버스는 최대한 승객을 수용'해야 하는 근대적 삶은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삶의 공간과 노동공간의 분리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한 건물은 흔히 낮 동안 비어 있고 다른 건물은 대개 밤 시간에 비어있기에 이러한 이동은 효율성으로 인해 비효율성이 증가하고 있다.

더욱이 근대적 시간은 시간 패턴의 개별화가 촉진되면 노동의 지루함이 감소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고독감과 사회적 고립이 증대할 수도 있다.

만약 친구나 애인 또는 가족 모두가 각기 다른 시간에 일을 하게 될 경우 각자의 스케줄을 조정하는데 도움을 주는 새로운 서비스 기능이 생기지 않는다면,서로가 얼굴을 마주하는 사회적 접촉은 더 어렵다는 점에서 근대적 시·공간구조에 대한 성찰적 인식이 필요할 것이다.

결국 분절되는 시·공간은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구상되고 실행되었다.

동시에 이는 시공간의 균질화를 통해 표준화된 가치를 만들고 이를 근거로 시공간이 화폐화되었다는 사실과 이 과정에서 인간의 소외가 촉진되고 기계나사와 같이 도구적으로 대상화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4)공리주의 비판

네 번째 주제는 근대성의 중심가치로서의 공리주의다.이 공리주의는 윤리과목을 통해 학생들이 접한 바 있을 것이다.깊이 있게 공부하지 못한 관계로 자주 출제되지만 학생들에게 어렵게 느껴지는 문제이기도 하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명제로 정식화되고 있는 공리주의는 결국 민주주의의 구성원리인 사회계약론과 더불어 다수의 판단에 기초한 윤리적 합의의 원칙들을 만들어냈고 근대의 정신적 중심가치로 여겨지고 있다.그런 점에서 탈근대적 성찰의 요구가 필요한 주제이다.

첫째,최대다수가 누리는 행복이 무엇이냐 하는 것에서 발생한다.최대다수의 행복이란 행복의 총량인 것이고 한 사회가 누리는 행복이 총량으로 규정될 때 그 과정에서 배분과 절차의 합리성은 배제된다는 것에 주목하여야 한다.

예컨대 구성원의 절반을 노예로 부리면서 사회전체의 공리를 최대화하거나 우리 나라의 경우처럼 성장거점에 의해 발전을 추구한 전체의 발전을 위해 농촌의 희생을 전제로 도시를,중소기업의 희생에 기초해 대기업을,내수의 희생을 대가로 수출중심을,여성과 노동자의 희생을 대가로 남성과 자본의 가치를 발전시킨 경우에 과연 합리적인가의 문제가 남아 있다.

더구나 과연 행복을 수량화시킬 수 있는지 하는 문제 역시도 포함될 것이다.비물질적인 행복, 예컨대 사랑이나 올바른 가치 등등은 어떻게 판단되어야 할 것인지 하는 문제는 여전히 공리주의에서 판단할 수 없는 문제가 될 것이다.그러기에 공리주의는 근본적으로 경제적인 문제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둘째,최대다수의 이익을 공공성이라고 전제한다면 공공성이 확보되기 위해 구성원 모두의 의사가 합리적으로 반영되어야 하며 그 이해관계가 합리적으로 조정되어야 한다.그런데 이 모든 문제가 합리적으로 반영되어 있다하더라도 중요한 문제가 남는다.

이는 다수가 소수에 대한 합리적 대화가 전제로 깔려 있는 것인데,타자와의 대화가 불가능한 경우의 문제가 남아 있다.만약 '합의할 수 없는 타자'일 경우가 바로 그것인데 이를테면 국가의 내셔널한 기억을 위해 죽어버린 자들이 소환되는 경우가 바로 그것일 것이다.

아울러 미래의 타자들 역시도 합의할 수 없는 타자이며 '우리'라는 이름 밖에 존재한 예컨대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 등등도 그러한 타자일 것이다.

셋째,공리주의는 소수자의 희생을 통해 다수의 행복이 추구되며,소수의 희생은 전체의 발전을 위한 토양이며 궁극적으로 희생자의 이익을 위한 것이 전제 혹은 설득되어야 한다.그러나 현실에서의 희생은 공리주의가 추구하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그러기에 '합의와 설득'이라는 공리주의의 전제는 무너지며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권력에 의해 강제화되는 것이 현실이다.제국주의적 폭력이나 다수자에 의해 자행되는 일상의 파시즘이 바로 그런 것이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제출될 수 있는 것이 칸트의 목적론적 윤리설이다.이는 윤리교과에 정리된 것처럼 인간을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라는 명제로부터 정언명령에 기초한 자유로운 선한 의지에 의해 온전한 도덕법칙을 찾고자 했다.'너의 행위의 준칙이 보편적 법칙에 준거하여 행위하라'고 하는 의미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5)위험사회론

최근 과학기술이나 환경적 위기와 관련해 자주 출제되는 주제다.과거에도 늘 위험이 존재했지만 지금의 위험은 과거의 그것과 현격하게 질을 달리 한다.이른바 합리화 혹은 근대화로 널리 알려진 발전의 과정에서 부(富)는 체계적으로 확대,재생산되었고 그와 동시에 위험은 부를 위해 감수해야 하는 우연적인 난관이 아니라,체계적으로 생산되는 정상적 개연성으로 혹은 필연성으로 변모하였다.

그 결과 부의 추구와 분배문제 이외의 다른 모든 것은 우연적이고 비정상적인 것으로 여겼던 산업사회가 그 정점에서 마주하게 된 것은 구조적 위험으로 가득 차 있는 참으로 아슬아슬한 위험사회인 것이다.

결국 현대사회의 안전과 위험 문제는 산업혁명 이래 근대적 합리화 과정 전반에 대한 비판적 재평가를 요청하며 동시에 새로운 발전방향에 대한 새로운 모색을 절실하게 요구한다.그런 점에서 독일의 사회학자인 울리히 벡은 ‘위험사회’에서 이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

울리히 벡에 따르면 현대의 위험은 방사능과 같이 인간의 평상적인 자각능력을 완전히 벗어나며 부는 소유할 수 있으나 위험으로부터는 그저 영향만 받을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그러기에 위험은 계층간 차이를 넘어 전계층에 평준화되어 있고 전지구화되어 과학의 지위나 가족의 위상을 완전히 해체시킨다고 이야기한다.더욱이 그로 인하여 자본주의의 발전논리를 새로운 단계로 끌어올리며 비정치적인 것을 정치적인 것으로 만든다는 것이 이 문제의 핵심일 것이다.

울리히 벡에 의하면 위험사회는 새로운 근대화의 단계를 필연적으로 요청하게 되는데,바로 성찰적 근대화가 그것이다.이제 새로운 단계는 '배고프다'라는 인식에서 '무섭다'는 인식으로 전환되고 불평등사회에서 불안전사회로 전환시키게 된다.그 결과 결핍의 연대로부터 공포의 연대로 확산되게 되는데,이 과정에서 성찰성이 요구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찰성인데,이는 단순한 반성이 아니라 현실과 자기 자신의 직접적인 '자기 대면'이다.성찰에 맞닥뜨리게 되는 자리가 다름 아닌 위험의 자리이다.결국 산업사회에서 재화의 분배 문제를 둘러싼 갈등은 위험과 재해의 분배문제라는 새로운 갈등에 압도되어 버린다.위험은 중첩되고 개인은 끊임없이 가중되는 불안한 운명을 떠안아야 한다.

결국 그 자체가 성찰성이다.성찰성은 회피하는 것으로서의 반성을 넘어서 어쩔 수 없이,원하지 않아도 필연적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이는 모든 문제와 모든 지구화 과정 그리고 모든 계급과 모든 이들이 격렬하게 부딪치는 자기대면이다.

이 대면은 필연적으로 공공의 참여적 비판을 원천적으로 제약하는 근대적 삼권분립의 체계와 기술과학적 지식을 중심으로 구성된 전문가 체계라는 두 가지의 거대한 체계를 해체하고 재구성한다.그런 점에서 성찰적 근대화 과정은 산업사회를 지탱해 온 궁극적인 원리인 '진보'에 대한 성찰을 필연적으로 요구한다.

우리는 산업사회의 이 진보라는 이름으로 유례없는 풍요에 도취되는 한편 숱한 위험을 견디어낼 수 있었다.그러나 이제 우리에게 요청되는 새로운 과제는 이 진보에 대한 맹신이 갖는 역설을 직시하고 인류 문명을 좀 더 지속가능한 기반 위에 세우는 과정이다.바로 이것이 성찰적 근대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