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우석 서울대 교수는 우리나라에서 '영웅' 같은 존재다.

우리나라 과학자로 전 세계 주요 신문과 방송의 헤드라인을 일제히 장식할 정도로 주목받은 사람은 황 교수가 거의 유일하기 때문이다.

황 교수에게 다소 가혹할 정도로 과학 윤리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도 이런 명성 덕분(?)일 것이다.

황 교수팀의 '난자 의혹'은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낳고 있긴 하지만 한편으론 현대 과학 연구에 있어서 윤리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일깨우는 계기가 되고 있다.

학 연구의 한계는 어디이며 윤리는 어느 선까지 통제해야 하나.생글생글 10호(2005년8월16일자)에서 다뤘던 '과학과 윤리의 충돌'문제를 다시한번 살펴보자.


황우석 교수는 지난달 24일 기자회견에서 "윤리와 과학은 인류문명을 이끌어가는 두 수레바퀴"라고 말했다.

또 "과학 연구는 윤리의 테두리 속에서 진행돼야 하겠지만 현실은 앞서가는 과학을 뒷받침하는 윤리규정이 마련되지 못하는 예가 드물지 않다"고 강조했다.

현 시대에 과학과 윤리의 접점이 어디에 있느냐에 대한 화두를 던진 셈이다.

◆과학과 윤리의 충돌

과학은 새로운 원리와 사실을 밝혀내는 것이다.

그래서 과학 그 자체는 선(善)이나 악(惡)과 별개라는 게 이른바 '과학의 가치중립성'이다.

하지만 근대 이후 과학기술의 급속한 발달로 이런 관념도 퇴색되고 있다.

핵 분열 현상의 발견이 원자폭탄 개발로 이어지고 화학물질의 개발이 환경오염을 일으키는 등 과학이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면서 '과학 연구도 윤리적 행위'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어간 것이다.

과학이 윤리에 의해 통제받아야 한다는 얘기다.

이처럼 현대에는 과학기술이 사회적 윤리관에 의해 제어돼야 한다는 게 통념이다.

이번 황 교수팀의 난자 논란도 결국은 빠르게 진보하려는 과학과 이를 통제하려는 윤리의 충돌에 의해 벌어졌다고 볼 수 있다.

◆윤리의 한계는 어디인가

과학과 윤리가 완벽히 조화를 이루기란 쉽지 않다.

황 교수의 표현대로 앞서가는 과학을 윤리 규정이 따라가지 못할 수도 있다.

과학이 새로운 윤리 규정의 정립을 기다리지 못하고 과속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윤리적 규범이란 나라나 문화권별로 틀린 데다 시대별로도 변화하기 때문에 과학 연구를 윤리적 잣대에 완전히 맞추기란 쉽지 않다.

다만 과학과 윤리가 수레바퀴처럼 동시에 변화하고 발전해 나가야 한다는 데에는 윤리학자나 과학자 모두 동의한다.

어느 한쪽이 앞서가거나 혹은 뒤처지면 수레는 넘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에서의 특징이라면 과학이 윤리규범의 변화를 상당 부분 이끌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시험관 아기가 처음에는 강렬한 사회적 저항에 부딪혔지만 결국은 보편화된 게 좋은 예다.

'삶의 질 향상'을 앞세운 과학이 사회의 윤리적 가치관을 바꾼 셈이다.

복제 기술도 마찬가지다.

여전히 복제에 대한 반대론은 드세지만 최초에 복제양 '돌리'가 나왔을 때와는 천양지차다.

우리나라를 비롯 상당수 국가들이 치료용 복제를 법적으로 허용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을 정도다.

윤리도 과학의 발전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셈이다.

복제 기술에 대한 윤리 규범이 과연 어느 선까지 바뀔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춰야

과학에 대한 윤리적 잣대가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규범에 철저히 맞춰가야 한다는 게 과학자나 윤리학자들의 공통된 견해다.

이제 이런 윤리 규범을 따르지 않고는 국제 과학계에서 신망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이번에 논란으로 떠오른 황 교수팀의 난자 확보 과정은 당시의 국내 윤리 잣대로는 이해될 수도 있다는 게 대체적인 여론이다.

실제로 조사를 담당했던 기관에서도 윤리적 문제가 없다는 의견을 내놨다.

다만 이를 국제적 윤리 잣대로 평가할 경우 논란의 소지가 있기 때문에 파문이 확산된 것이다.

우리나라 안에서 나름대로 법적 장치를 만들어 연구를 제어하되 '글로벌 스탠더드' 테두리 안에서 과학자 사이의 윤리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가야 할 때다.

장원락 한국경제신문 과학기술부 기자 wrj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