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경제의 동향을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 가운데 하나가 월마트의 월별 매출이다.

월마트의 매출이 늘거나 줄어드는 것을 바로미터 삼아 미국 소비자들의 소비 동향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월마트의 영향력은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다.

세계 최대 유통업체라는 명성에 걸맞게 매주 월마트에 들러 쇼핑하는 미국 외 고객이 4000만명에 달할 정도다.

이 같은 유통 공룡 월마트를 키운 사람이 바로 창업자 샘 월튼 회장이다.

◆박리다매 철학

오클라호마 시골뜨기였던 샘 월튼은 1945년 아칸소주의 싸구려 상품을 파는 잡화상을 인수해 유통업에 뛰어들었다.

이 구멍가게를 운영하면서 유통업에 대한 노하우를 터득한 월튼은 1962년 월마트 1호점을 열었다.

월튼이 월마트를 시작하면서 내건 슬로건은 '우리는 항상 싸게 판다'였다.

그는 가격을 낮추면 판매가 늘어나고 결국 더 많은 이윤을 남길 수 있다는 박리다매를 자신의 사업철학으로 삼았다.

헨리 포드가 자동차를 발명하지 않았지만 자동차를 대량 생산해 널리 보급했던 것처럼 월튼도 대형 할인점을 처음 세우지는 않았지만 월마트를 통해 전 세계 소비자들의 쇼핑 문화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월마트 1호점이 생길 당시 미국에서는 K마트와 타깃 등 대형 할인점이 잇따라 등장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월튼은 먼저 K마트를 경쟁상대로 삼았다.

고객이 월마트에서 구입한 물건을 2주일 내에 K마트가 더 싸게 팔면 차액을 보상해줬다.

물론 K마트도 이 같은 월마트의 공격에 맞대응했다.

당시 월마트는 점포가 19개에 불과해 250개를 거느린 K마트에 대적할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월튼은 이처럼 작은 덩치의 약점을 딛고 대형 할인점을 성공시킬 수 있는 전략을 수립하고 실천해 K마트와의 가격파괴 전쟁에서 승리했다.

이를 통해 월튼은 생산자가 쥐고 있던 시장의 힘을 소비자로 옮겨놓았다.

◆한국에서는 고전

월튼은 어떻게 할인점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을까.

가격을 낮추면서도 이익을 늘려야 하는,어찌보면 모순된 상황에서 빛을 발한 것은 월튼의 끊임없는 실험정신이었다.

그는 복잡하고 정교한 경영계획을 세워 그것을 실행하는 경영전략가는 아니었다.

오히려 1945년 처음 가게를 연 이후 줄곧 새로운 것을 시도했고,성공한 것은 지속적으로 실천하고 실패한 것은 과감하게 포기하는 식으로 멈추지 않고 새 방법에 도전하는 행동파였다.

월튼의 실험정신은 물류 첨단화에 대한 투자에서 가장 크게 성공을 거뒀다.

고객들에게 싼 값에 물건을 팔기 위해서는 물류 관리에 컴퓨터 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매장의 현금등록기부터 임직원들의 PC에 이르기까지 전사적인 컴퓨터망을 구축했다.

또 월마트에 상품을 공급하는 업체들까지 컴퓨터망에 끌어들여 첨단 배송 체계를 갖췄다.

현재 월마트는 인공위성까지 활용해 물류 전반을 관리하고 있다.

이 때문에 월마트는 미국 국방부를 제외하고 세계 최고 수준의 컴퓨터망을 보유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정보화 시대 최초의 보스'라고까지 불리는 월튼은 자신의 끊임없는 실험정신과 관련, "성공하기 위해서는 항상 변화의 최전선에 서 있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강조했다.

그러나 세계적인 월마트도 한국에서는 이마트 등 토종 유통업체에 고전하고 있다.(한국사람 정말 대단해!)

◆검소한 부자

월튼 가문은 미국에서 가장 돈이 많은 집안이다.

1992년 암으로 사망한 월튼의 미망인과 네 자녀가 가진 재산을 모두 합치면 1000억달러가 넘는다.

이는 세계 최고 갑부인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회장 재산의 2배가 넘는 액수다.

하지만 정작 월튼 자신은 평생을 검소하게 살았다.

억만장자가 됐을 때도 그가 즐겨 입는 옷은 월마트에서 파는 50달러짜리 상의와 16달러짜리 바지가 고작이었다.

죽기 전까지 비행기 3등석을 이용했고 픽업 트럭을 직접 몰고 다녔다.

월튼은 후손들이 물려받은 유산으로 무위도식하는 것을 경계해 근검절약을 가르치는 자서전도 남겼다.

"다시 태어나도 소매상인이 될 것"이라고 말했던 월튼은 1992년 4월5일 세상을 떠나기 직전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민간인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영예인 자유의 메달을 수상했다.

장경영 한국경제신문 국제부 기자 longrun@hankyung.com